Jellineck는 음주형태에 따라 alpha, beta, gamma, delta, epsilon alcoholism의 5가지 형태로 분류하였다. Alpha형은 신체적, 감정적인 고통해소를 위한 심리적인 의존에서 알코올을 찾는다. Beta형은 신체적, 심리적 의존없이 기질적인 합병증을 보이는 경우이다. Gamma형은 금단증상 및 내성으로 세포대사의 변화가 일어나고 조직의 내성이 형성된 경우로 금주가 가능하나 일단 마시기 시작하면 끊지 못하며, 미국에 많은 편이다. Delta형은 gamma형과 함께 질병형에 포함되는 형으로 임상양상은 gamma형과 비슷하지만 매일 술을 마시는 편으로 금주가 불가능하며, 유럽에 많다. 마지막으로, epsilon형은 일시적으로 폭음하는 경우이다.1


알코올 남용으로 인한 명백한 법적 혹은 금전적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나는 안 마시려고 하면 두세 달은 안 마실 수 있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문제음주에 대한 통찰을 하지 못 하는 경우를 빈번하게 보게 됩니다. 하지만 알코올리즘에 대한 Jellineck의 유형 분류에 잘 나타나 있듯이 일시적인 금주 역시 알코올 의존 사이클의 일부입니다.


알코올중독은 절주를 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채 절주에 집착하는 병이다.2


위 인용한 문장과 비슷하게 혹자는 알코올 사용 장애(Alcohol Use Disorder)가 조절을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음에도 조절할 수 있다고 믿는 '조절망상'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고 보는데요. 망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너무 극단적인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망상의 정의를 잠깐 살펴볼까요. "망상은 현실에 맞지 않은 잘못된 생각이며 실제 사실과 다르고, 논리적인 설명으로 시정되지 않고, 교육 정도나 문화적인 환경에 걸맞지 않는 잘못된 믿음 또는 생각"3입니다. 이 정의를 따르면 조절망상이라는 용어가 적절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알코올 의존으로 인한 내성이나 금단 증상은 일차적으로는 뇌의 구조나 기능상의 문제입니다. 문제음주의 빈도나 심각성에 따른 뇌의 구조나 기능상의 변화가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지, 신경인지장애처럼 불가역적인 수준에 이르게 되는 때는 언제인지 사실 잘 알지 못 합니다. 공부가 필요합니다. 다만 알코올 의존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정신과 입원을 통해 해독 과정을 거쳐야 하며 약물치료가 반드시 수반돼야 합니다. 알코올 의존인 사람이 약물치료를 받지 않고 의지를 통해 낫겠다고 하는 것은 앞서 말한 조절망상입니다.


대부분의 정신장애가 그렇듯이 알코올 의존 역시 유전적 요소, 기질적 특성, 성격적인 취약성, 환경적 요인, 생애 스트레스 사건과 같은 다양한 변수가 상호작용한 결과입니다. 약물치료 이외에도 다른 치료적 개입이 필요한 이유이죠. 인지행동치료, 동기강화면담 등 여러가지 치료적 개입 중 역사가 길고 치료효과가 잘 검증된 비약물치료 개입은 12단계 중독 치료입니다.4 단주를 하고 있거나 단주를 하려고 마음 먹은 사람들의 자조(self-help) 모임인데요. 1935년에 미국에서 시작돼 현재 전세계에서 자조 모임이 열리고 있습니다. 물론 한국에서도 여러 12단계 집단이 정신과 안팎에서 진행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음 사이트를 참고하세요. http://aakorea.org/)


12단계는 이론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단주자들의 경험에 근거합니다. 또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자신의 결점을 찾아내어 개선하려고 하고 대인관계에서의 자신의 미숙을 성찰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세계 및 우주적인 차원에서의 자신의 존재목적을 찾아 이를 위해 살고자" 함에 있어 12개의 단계를 밟게 됩니다.5 알코올에 앞에서 무력했고, 알코올로 인해 우리 삶을 수습할 수 없었다고 인정하는 1단계부터 우주적인 차원에서 자신의 존재목적을 찾게 되는 12단계까지 차례대로 통과하게 됩니다.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이었던 삶에서 타인의 안녕을 생각하게 되는 단계로까지 나아가는 전과정에서 신의 도움을 갈구하게 됩니다. 종교는 분명 아니지만 영성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다는 것이죠. 치료가 되는 것은 나의 의지 때문이라기보다 신의 도움 때문이라고 봅니다. 나의 의지와 나의 고집 때문에 내 삶과 가족의 삶이 처참하게 망가졌으니 나의 의지와 나의 고집을 내려놓는 것에서 삶의 수습이 시작된다고 보고, 내 의지 대신 신의 의지에 나를 맡기는 과정이 펼쳐집니다.


12단계에서 말하는 신이 개신교 신자에겐 하나님이 될 수 있겠지만 꼭 하나님일 필요는 없습니다.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서 타인의 안녕을 고려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그것이 가치가 됐든, 다른 어떤 사람이 됐든 간에 신이 될 수 있습니다. 나라는 좁은 틀에서 벗어나 좀 더 넓은 관점에서 자기 및 타인의 삶을 조망할 수 있게 돕는 조력자로서의 신인 것이죠.


12단계는 중독을 의학적 질환으로 봅니다. 다만 성격의 변화가 뒷받침돼야 단주가 지속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성격의 변화를 위한 노력을 강조합니다. 알코올 의존을 지닌 사람은 문자 그대로 의존적입니다. 의존의 대상이 현재는 알코올이지만 단주 시기에는 담배를 비롯한 다른 물질이 될 수도 있고, 성이나 소비, 강박적 운동, 심지어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기타 여러 행위 중독에 빠져들 수 있죠. 어떤 대상에 강박적으로 의존하는 성향이 강하지만 충동적인 방식으로 행동할 때가 많아 사회적인 지지를 받기가 어렵습니다. 의존을 갈구하지만 정작 다른 사람의 지지를 이끌어내진 못 한다는 것이죠. 충동적 행동으로 인한 잦은 문제가 발생한다면 가족으로부터도 외면 받기 쉽습니다.


조력자인 신의 도움을 받아 타인의 안녕을 고려하는 수준에 이르게 된다면, 제일 먼저 자기 때문에 가족들이 얼마나 심한 어려움을 경험해 왔는지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도박 중독이든 알코올 중독이든 간에 중독은 자기뿐만 아니라 가족의 인생까지 수렁으로 끌고 들어갈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무섭다고 할 수 있죠. 12단계의 5단계부터 10단계까지가 자기 성격의 문제점을 철저하게 검토하여 이를 개선하기 위해 힘쓰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을 잘 통과한다면 비로소 자기 문제에 관해 남탓하기를 그치고 자신을 변화시킴으로써 가족을 비롯한 타인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게 됩니다. 그간의 행동 결과에 대해 잘못을 구하고 가족을 비롯한 주변 사람으로부터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을 확률이 높아지겠죠.


하지만 제가 12단계를 6개월 동안 진행도 해보고 참여도 해보면서 느낀 것은 우리가 알코올에 무력했음을 인정하는 1단계를 통과하는 것이 매우 어렵고, 설령 통과했다 하더라도 다시 통과 전으로 돌아갈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만성적인 알코올 의존으로 인해 간경화나 간암과 같은 심한 신체적 질병이 찾아온 경우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이런 경우들을 보며 그 환자 개개인의 나약함이나 취약성을 보기보다 나를 포함한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고집이 세고 자기중심적인지 돌아보게 됐습니다. 12단계의 리더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며(물론 정신과에서는 의사나 정신건강전문요원이 진행의 주축이 되긴 하지만) 설령 진행을 맡고 있다 하더라도 진행자 역시 자신의 성격적인 문제를 들여다 보고 솔직하게 오픈하는 과정에 놓이게 됩니다. 저 역시 알코올 중독을 지닌 분들과 다를바 없이 많은 성격적 문제를 지닌 인간임을 생각해 보게 되는 과정이었죠.


짧게 쓰려 했는데 길어져 버린 감이 있습니다. 요약하면 알코올 남용 및 의존, 즉 알코올 사용 장애의 핵심은 알코올 사용을 조절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음에도 조절할 수 있다고 믿는 상태입니다. 알코올 사용 장애가 의심되는 경우 반드시 정신과 내원하여 정신과 의사의 처방하에 약물치료를 받아야 하며, 제가 생각하기에 12단계와 같은 자조모임에 참여하는 것 역시 약물치료만큼이나 중요합니다. 12단계 치료 과정을 요약하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조력자로서의 신의 도움을 받아 끊임없이 자신의 성격적 문제를 개선하여 궁극적으로는 타인의 안녕에 기여하는 경지에 이르는 것입니다.


중독은 의지만으로는 절대 이겨낼 수 없습니다. 의지로 이겨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내리막길에서 자동차 브레이크가 고장났는데 악셀레이터 밟으며 차를 멈출 수 있다고 믿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ref)


1. 임명호, 백기청, 이경규, 홍성도, 김현우, 이민규 (1997). 알코올사용장애의 유형별 특징. 신경정신의학, 36(5), 850-860.

2. 하종은 (2000). 왜 우리는 술에 빠지는 걸까 (p. 317). 서울: 소울메이트.

3. Amc.seoul.kr. (n.d.). [online] Available at: http://www.amc.seoul.kr/asan/healthinfo/disease/diseaseDetail.do?contentId=31898 [Accessed 10 May 2018].

4. Witbrodt, J., Ye, Y., Bond, J., Chi, F., Weisner, C., & Mertens, J. (2014). Alcohol and drug treatment involvement, 12-step attendance and abstinence: 9-year cross-lagged analysis of adults in an integrated health plan. Journal of substance abuse treatment, 46(4), 412-419.

5. 김한오, 박선희 (2013). 중독의 12단계 영적 치료. 중독정신의학, 17(2): 61-67.

아동학대법에 따르면 아동학대는 네 가지 subtype으로 구분이 됩니다. 첫째는 신체학대, 둘째는 정서학대, 셋째는 성학대, 넷째는 방임입니다. 아동학대가 성인기의 반사회적이거나 병리적인 행동을 예측한다는 연구는 많았으나 아동학대의 subtype을 구별하여 각각의 subtype이 미치는 영향력을 보는 연구는 부족했습니다. 특히 다른 subtype에 관한 연구에 비해 방임에 관한 연구가 부족했습니다.


방임의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방임은 자신의 보호ㆍ감독을 받는 아동을 유기하거나 의식주를 포함한 기본적 보호ㆍ양육 및 치료를 소홀히 하는 방임행위로 규정한다. 즉, 보호자가 고의적, 반복적으로 아동에 대한 양육 및 보호를 소홀히 함으로 인하여 아동의 건강이나 복지를 해치거나 혹은 정상적인 발달을 저해할 수 있는 모든 행위를 말하며 방임에는 의료적 처치의 거부 등 신체적 방임, 유기, 장시간 아동을 위험한 상태로 방치하는 등의 부적절한 감독, 교육적 방임, 정서적 방임 등이 있다.1


제가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Bland와 동료들의 리뷰 논문은 방임이 다른 subtype만큼이나 인간발달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2 즉 방임의 결과로서 내현화 및 외현화된 문제 행동, 인지나 정서 발달에서의 지연, 자아탄력성에서의 부족이 단기 및 장기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죠. 특히 방임은 성인기 사이코패시(정신병질)와 연관되는 아동기 심리적 특질의 발달에 기여하는 것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본 리뷰에서는 성인기 폭력 행동(violent behavior)이 결과 변수입니다. 방임이 다른 subtype만큼 영향력이 커 보이긴 하는데, 구체적으로 성인기 폭력 행동에 대해서 어떤지 보려는 것이죠. 이를 위해 아동학대의 subtype을 구별하여 성인기 폭력 행동에 관한 상대적 영향력을 보는 논문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구조방정식을 사용한 Vachon 등(2015)의 연구에서는 다른 subtype에 비해 방임이 외현화 행동(눈에 띄는 문제 행동, 예를 들어 싸움이나 파괴적 행동 등)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갖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방임이 대개 신체적 학대 및 정서적 학대와 함께 나타나는 경우가 많아서 방임의 영향력이 간과되기 쉬운데, 이 연구는 분리해서 분석하여 방임이 오히려 더 큰 영향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죠.


하지만 학대에도 신체적 학대와 정서적 학대가 구분되듯이 방임에도 신체적 방임과 정서적 방임을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Taillieu 등(2016)은 정서적 방임과 정서적 학대의 상대적인 영향을 비교하였는데 정서적 방임이 주요우울장애, 사회불안장애, 분열성, 분열형, 회피성 성격장애 등과 관련되는 데 반해 정서적 학대는 물질사용장애 등을 포함하여 모든 정신장애의 발달에 관여할 수 있는 유의미한 위험인자였습니다. 이 연구에서 정서적 방임과 외현화된 행동 문제 간의 관계를 다루진 않았지만, Bland 등은 정서적 방임이 성인기 폭력 행동의 위험성을 증가시킬 가능성이 적을 수도 있다는 시사점을 짚어냅니다.


이런 선행 연구 결과들이 있는바, 첫째 정서적 및 신체적 방임을 구별하고, 둘째 학대의 다른 subtype도 포함하여, 외현화된 문제 행동에 대한 각각의 상대적 영향력과 subtype을 합쳐서 분석하였을 때의 상대적 영향력을 살필 필요가 있음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Rivera와 Widom(1990)의 종단 자료를 재분석한 Grogan-Kaylor와 Otis(2003)에 따르면, 인종, 나이, 성별, 아동기 신체적 및 성적 학대를 통제한 이후에도 아동기 신체적 방임이 성인기의 범죄로 인한 체포를 예측했습니다. 한편 Mersky와 Reynolds(2007)의 연구에서는 아동기 방임이 성인기 폭력 행동의 발달에 기여하지만, 아동기 신체적 학대가 성인기 지속적인 폭력 행동에 대한 보다 강력한 예측인자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Evans와 Burton(2013)의 연구에서는 아동기 신체적 학대가 아니라 아동기 신체적 방임이 청소년기의 폭력적 범죄와 연관됨을 밝혔습니다. 정서적 방임을 비롯한 학대의 다른 subtype과 달리 신체적 방임만이 폭력 범죄의 유의미한 예측인자였습니다.


대규모 종단연구 자료를 활용한 한국인 연구자의 연구도 언급이 되고 있네요. Yun 등(2011)의 연구에서는 아동기 신체적 및 정서적 학대가 아닌 아동기 방임만이 초기 성인기 폭력 행동의 빈도를 유의미하게 예측했습니다. 앞서의 연구가 감옥이나 소수자 집단에서 행해진 것과 대조되게 이 연구는 국가적으로 시행되는 대규모 표집에서 아동기 방임과 성인기 폭력 행동 간의 연관을 시사했다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참고로 연구자는 한국 사람이지만 연구자가 속한 대학은 미국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아동기 방임이 어떻게 성인기 폭력 행동의 발달에 기여하는 것인지 유전적, 뇌과학적, 환경적, 아동기 정신병리적인 측면에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 중 아동기 정신병리와 관련하여 살펴보면, 아동기 방임과 middle childhood(아동과 청소년의 사이쯤 되는 기간?)의 외현화된 행동 장애의 발달 간의 연관을 시사하는 연구가 많습니다. middle childhood에 나타날 수 있는 외현화된 행동 장애의 예로 적대적 반항 장애(oppositional defiant disorder)와 품행장애(conduct disorder)가 있죠. 이 두 장애는 성인기 반사회적 행동과 공격성을 강력하게 예측합니다. 이런 경로를 통해 아동기 방임이 성인기 폭력적 범죄로 이어지는 것일 수 있겠다고 말합니다.


끝으로 고등학교 졸업, 취업, 결혼과 같은 변수들은 아동기 학대 및 방임으로 인한 성인기 폭력 행동의 가능성을 낮추는 보호 요인(protective factors)입니다. 아동기에 방임을 경험한 경우,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조기 개입을 하여 그 나이 또래의 발달 과업을 잘 성취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성인기의 범죄를 예방하는 한 방법일 수 있겠습니다.


범죄가 발생한 후에 그것을 처리하고 관리하기 위해 쏟아붓는 예산에 비한다면 예방에 쏟아붓는 예산은 더 적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아동이 방임되는 것에 관한 사회적 예방책 마련은, 이 리뷰의 논리를 따른다면 사회의 범죄 발생율을 감소시키는 데도 분명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본 리뷰에서 연구자들이 외현화된 문제 행동을 결과 변수로 삼은 연구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내현화된 문제 행동으로 인한 사회적 손실을 측정하기가 상대적으로 어렵기 때문일 것입니다. 본 리뷰의 저자는 방임이 내현화된 문제 행동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다루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으나, 제도적 대비책 마련과 같은 주제를 염두에 둔다면 사회적 손실이 어느 정도 측정 가능한 외현적 행동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나을 테죠.


여기서부터는 이 논문과는 다소 관련성이 미약한 얘기일 수도 있겠습니다. 심리학자는 흔히 개인 내적인 것에만 관심을 둔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 말도 일견 맞지만 개인 내적인 것과 개인 외적인 것, 즉 사회적인 것은 당연히 결부가 돼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심리치료를 하는 전문가들은 마음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현상에도 자연스레 관심을 둘 수밖에 없습니다. 가상화폐만 해도 그렇죠. 이걸 투기로 볼 것인지 아니면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으로 보고 빛과 그림자를 분명히 해야 할 것인지 가늠하기 위해서는 관심을 둘 수밖에 없죠. 가상화폐로 인해 불면이 생긴 어떤 사람이 치료자를 찾아 왔다고 칩시다. 투기로 인한 중독으로 접근하는 치료자와 기술적 진보의 그림자로 보는 치료자는 치료 방식이 다를 것입니다.


병리적인 혹은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개인의 행동을 야기하는 원인을 찾아내는 것은 마음의 안팎을 오가는 작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너무나도 다양한 개인 내외적 원인이 있을 수 있고 원인들 간의 상호작용도 복잡한 경우가 태반입니다. 다만 그 복잡한 실타래를 잘 풀어서 최대한 인식 가능한 영역으로 끌고 오는 것이 임상심리학이나 정신의학의 역할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이런 노력의 최종 목표는 개인의 치료뿐만 아니라 사회의 치료가 될 것입니다.


저는 아직 심리상담이나 치료는 초보에 가깝지만, 이 분야에 오래 몸 담게 된다면 사회의 병든 부분을 개선하기 위해 심리학자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본 리뷰의 저자처럼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개인의 행동(예. 폭행이나 성범죄)의 근원을 다각도로 탐색하여 예방책을 제시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ref)


1. 안동현, 강지윤 (2002). 아동 학대 및 방임. 신경정신의학, 42(1), 14-33.

2. Bland, V. J., & Lambie, I. (2018). Does childhood neglect contribute to violent behavior in adulthood? A review of possible links. Clinical psychology review, 60, 126-135. *아직 출판되지 않은 따끈따끈한 논문입니다.

이전 글에서 미래의 긍정적 사건에 대한 기대에서 오는 즐거움을 예기쾌감(anticipatory pleasure)이라고 불렀습니다. 오늘은 이 예기쾌감에 관한 매우 흥미로운 연구를 발견하여 자세히 다뤄보고자 합니다.

 

제가 알기로 심리학 저널은 보통 impact factor(인용 횟수 등에 근거한 저널의 공신력 지표) 1만 넘어도 믿고 볼 만한 저널입니다. 본 연구는 JCR Impact Factor4에서 5를 오가는 Journal of Abnormal Psychology에 실렸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감이 안 오시니 순위로 알려드리면, 임상심리학 저널이 2016년 현재 121개 정도 있는데 그 중 랭킹 11위입니다. 좋은 저널에 실렸다는 것은 아이디어가 좋고 아이디어를 뒷받침하는 연구의 논리 또한 정교하다는 것이죠. 그럼 얼마나 똑부러지는 논문인지 한 번 살펴볼까요. UC 버클리 소속 심리학자의 내공을 들여다 봅시다~

 

저자는 예기쾌감이 다음 네 가지 요소의 상호작용이라고 봅니다. 애플파이에 대한 예로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애플파이 조각을 먹는 것에 대한 예기쾌감은 1. 과거에 애플파이를 먹었던 기억에 비추어 2. 애플파이를 먹게 될 미래 시점에 대한 예견을 하게 되는 과정과 3. 예견하는 과정에서 즉각적으로 얻는 즐거움(=현재 즐거움) 및 미래 시점에서 얻게 될 즐거움에 대한 예측(=예측된 즐거움)으로 구성됩니다.

 

조현병을 지닌 사람은 예기쾌감을 경험하는 능력에서 손상이 있다는 연구들이 많은데, 저자는 예기쾌감에서의 손상을 기억, 예견, 정서라는 세 가지 차원의 상호연관된 과정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주요한 아이디어는 조현병을 지닌 사람이 예기쾌감에서 손상을 보이는 이유는 애플파이를 먹게 될 미래 시점에 대한 예견 과정에서 과거에 애플파이를 먹었던 기억을 끌어오는 데 어려움을 경험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애플파이에 관한 과거 즐거운 경험을 토대로 애플파이를 먹게 될 미래 시점을 떠올리는 것이 어렵고, 결과적으로 이는 애플파이를 먹게 될 미래 시점을 떠올리고 있는 현재의 즐거움애플파이를 먹게 될 미래 시점에서 예측된 즐거움의 감소로 이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거 즐거운 경험을 회상할 수 있게 돕는다면 조현병을 지닌 사람도 정신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만큼 예기쾌감을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러한 아이디어를 검증하는 것이 이 연구의 주요 목적입니다. 저자의 아이디어를 뒷받침할 수 있을 만한 선행 연구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없다면 너가 아직 덜 찾은 것이다라고 말하길 저희 지도교수님은 즐기셨죠. 그만큼 세상에는 수많은 연구가 있고 내가 생각해 본 것은 남도 이미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연구를 통해 저널에 실렸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저자의 아이디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선행연구들에 대한 개관이 논문의 서두에 이어집니다. 기억과 예견의 관계, 조현병에서의 기억, 조현병에서의 예견이라는 챕터로 구분돼 있습니다. 이걸 다 다루기엔 제 에너지가 부족한바 바로 가설로 들어가 보도록 하죠.

 

이 연구의 가설은 총 여섯 개입니다. 두 개는 기억과 관련되고, 두 개는 예견과, 다른 두 개는 정서, 그 중에서도 긍정적 정서와 관련됩니다.

 

기억

(1a) 조현병을 지닌 사람은 정신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보다 예견을 할 때 과거 기억을 덜 참조할 것이다.

(1b) 특정한 단서에 의해 기억 인출이 촉진되는 경우 조현병을 지닌 사람은 정신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만큼 생생하게 기억을 회상할 것이다.

 

예견

(2a) 조현병 유무와 관계없이 통제 과제를 시행했을 때보다 기억 과제를 시행했을 때, 보다 생생한 예견을 하게 될 것이다.

(2b) 기억 과제 시행 유무와 관계없이 조현병을 지닌 사람은 정신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에 비해 덜 생생한 예견을 할 것이다.

 

긍정적 정서

(3a) 긍정적 정서 자극에 의한 기억 회상 과제를 수행한 후 실시되는 긍정적 정서 자극에 의한 예견 과제에서 조현병을 지닌 사람과 정신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은 비슷한 수준의 현재 즐거움 및 예측된 즐거움을 보고할 것이다.

(3b) 조현병에서의 예기쾌감 손상을 시사하는 선행연구들에서와 일치되게, 통제 과제 시행 후 실시되는 예견 과제에서 조현병을 지닌 사람은 정신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보다 예기쾌감을 덜 경험할 것이다.

 

이 연구에서 조현병 집단이 32명 정신장애를 지니지 않은 일반인 집단이 29명이었습니다. 실험 설계는 참가자 간 요인과 참가자 내 요인을 포함하는 혼합 설계입니다. 무슨 말인지 감이 안 오시죠? 참가자 간 요인이라 함은 집단 구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 연구에서는 조현병 유무에 따라 집단이 나뉘어졌습니다. 참가자 내 요인은 각 집단의 참가자가 다양한 과제를 수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연구에서 참가자 내 요인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조건(기억 과제, 통제 과제)이고 다른 하나는 정서가(긍정적, 부정적, 중립)입니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볼까요. 조현병 집단 참가자는 기억 과제와 통제 과제를 모두 수행하게 됩니다. 연구자들이 궁금한 것은 기억이 예견에 미치는 영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억 과제를 수행하게 되는데 그 자체만으로는 예견에 미치는 영향이 큰지 작은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통제 과제도 수행하게 하여 상대적인 비교를 하게 됩니다.

 

자 그런데 여기서 더 복잡해지는 것은, 연구자들은 정서가’(valence)에 따라서 예기쾌감의 과정이 영향을 받는지도 궁금해 하고 있습니다. 부차적인 연구 목적이죠. 선행연구를 개관하면서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조현병을 지닌 사람은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정서가가 들어간 단서에 의해 기억을 회상할 시 정신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에 비해 덜 생생하게 기억을 회상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기억과 예견이 연관돼 있다면 정서가가 들어간 단서를 제시 받은 경우 덜 생생한 예견을 할 가능성이 있겠죠.

 

저도 머리가 아파오는데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은 오죽할까 싶습니다. working memory 과열 상태입니다. 핵심은 참가자가 수행하게 되는 기억 과제에는 긍정, 부정, 중립의 세 가지 회상 단서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예견 과제도 마찬가지로 세 가지 정서가의 회상 단서가 주어집니다. 한 참가자가 이 세 가지 단서에 근거하여 기억 회상 과제와 예견 과제를 수행하게 됩니다.

 

참가자 간 요인과 참가자 내 요인을 포함하는 실험설계 내용을 표로 만들어 봤습니다. 백마디 말보다 한 장의 표가 낫죠.


 


각각의 조건에서 측정하고자 하는 결과변수의 핵심은 기억이나 예견의 생생함입니다. 얼마나 생생하게 떠올리는지 보려는 것이죠. 그리고 특히 예견에서 과거 기억을 얼마나 참조했는지가 중요하게 다뤄집니다. 결과변수의 평가는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나뉩니다. 하나는 자가 평가이고 다른 하나는 관찰자 평가입니다

 

자가 평가는 감각적(시각, 청각, 후각, 미각 정보를 포함) 및 맥락적(장소의 명확성, 장소에서 물건이나 사람의 공간 배치에 관한 정보를 포함) 경험에 대한 1(정보 없음)에서 7(정보 매우 많음) 사이의 평가와 현재 정서, 예견된 정서, 회상에 따른 정서 경험에 대한 1(긍정적)에서 7(부정적) 사이의 평가를 포함합니다. 관찰자에 의한 평가는 예견을 함에 있어 과거 기억의 참조 여부(Past reference), 시간/공간에 대한 구체적 언급(Time/place), 사회적 상호작용의 정도(Sociality), 묘사의 디테일(Elaborative detail), 명쾌함(Clarity)을 포함합니다.

 

과제 설명도 좀 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기억 과제에서 참가자들은 제시되는 단서에 따라 기억을 회상해야 합니다. 제시되는 단서는 총 다섯 개로 두 개는 긍정 두 개는 부정 한 개는 중립적 정서가를 포함합니다. 각각의 단서에 따라 과거 특정 시점에서, 제시되는 단서와 연관되는 상황을 구체적으로 떠올리도록 지시 받습니다. 예견 과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서에 따라 미래 특정 시점에서, 제시되는 단서와 연관되는 상황을 구체적으로 떠올리도록 지시 받습니다. 통제 과제에서 참가자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다섯 가지 활동을 다른 사람이 완수할 수 있게 각각의 활동마다 다섯 단계로 세분화하여 말해야 합니다. 활동의 예로 자판기에서 음식을 사는 일을 들 수 있습니다. 참가자들은 자판기에서 음식을 살 때 거쳐야 하는 과정을 다섯 단계로 세분화하여 말하게 된다는 것이죠. 기억 과제에서처럼 정신적인 시뮬레이션의 과정이 필요하지만 개인적인 특정 기억을 회상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기억 과제와의 차이입니다.

 

결과를 살펴보겠습니다.

 

Past Reference in Prospections

(1a) 조현병을 지닌 사람은 정신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보다 예견을 할 때 과거 기억을 덜 참조할 것이다. <-- 가설이 지지됐습니다. 통제 과제 후 예견을 하든 기억 과제 후 예견을 하든 간에 조현병을 지닌 사람은 정신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보다 과거 기억을 덜 빈번하게 참조하였습니다. 또한 조현병 유무에 관계 없이 참가자들은 통제 과제 이후보다 기억 과제 이후 예견을 할 때 과거 기억을 더 빈번하게 참조하였습니다. 조현병을 지닌 사람이 정신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보다 예견을 함에 있어 과거 기억을 덜 빈번하게 참조하지만, 통제 과제 이후보다 기억 과제 이후에 더 빈번하게 과거 기억을 참조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Content, Clarity, and Experience in Memories

(1b) 특정한 단서에 의해 기억 인출이 촉진되는 경우 조현병을 지닌 사람은 정신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만큼 생생하게 기억을 회상할 것이다. <-- 가설이 지지됐습니다. 조현병 유무에 관계없이 통제 과제보다 단서가 제시되는 기억 과제에서 더 생생하게 기억을 회상했습니다. 다만 조현병을 지닌 사람은 정신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에 비해 기억 과제에서 덜 명쾌하게 말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덜 명쾌하다는 것은(less clarity), 생생하게 회상하긴 하지만 다른 사람이 이해하기 쉽게 논리적으로 말하는 것에서 다소 어려움이 있었다는 의미 같습니다.

 

이 연구는 앞서 언급했다시피 정서가에 따라서 기억이나 예견이 달라지는지를 보려는 목적도 있습니다. 모든 참가자들은 긍정적 및 중립적 자극에 의한 회상에서보다 부정적 자극에 의한 회상을 할 때 감각적 경험의 정보가가 낮아졌습니다. 감각적으로 덜 정교한 회상을 했다는 것이죠.

 

Content, Clarity, and Experience in Prospections

(2a) 조현병 유무와 관계없이 통제 과제를 시행했을 때보다 기억 과제를 시행했을 때, 보다 생생한 예견을 하게 될 것이다. <-- 가설이 지지되지 않았습니다. 모든 참가자는 기억 과제 후 예견의 생생함과 통제 과제 후 예견의 생생함에서 차이가 없었습니다.

(2b) 기억 과제 시행 유무와 관계없이 조현병을 지닌 사람은 정신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에 비해 덜 생생한 예견을 할 것이다. <-- 가설이 지지됐습니다. 또한 정서가를 중심으로 분석을 해보니 모든 참가자는 긍정적 및 중립적 자극에 의한 예견에서보다 부정적 자극에 의한 예견에서 덜 생생한 보고를 하였습니다. 아울러 부정적 자극에 의한 예견에서 조현병을 지닌 사람은 정신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보다 덜 명쾌하게 말했습니다.

 

Emotion Experience and Positive Prospections

(3a) 긍정적 정서 자극에 의한 기억 회상 과제를 수행한 후 실시되는 긍정적 정서 자극에 의한 예견 과제에서 조현병을 지닌 사람과 정신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은 비슷한 수준의 현재 즐거움 및 예측된 즐거움을 보고할 것이다. <-- 가설이 지지됐습니다.

(3b) 조현병에서의 예기쾌감 손상을 시사하는 선행연구들에서와 일치되게, 통제 과제 시행 후 실시되는 예견 과제에서 조현병을 지닌 사람은 정신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보다 예기쾌감을 덜 경험할 것이다. <-- 가설이 지지됐습니다.

 

아이디어가 좋고 이를 뒷받침하는 이론적 배경에 대한 개관도 잘 돼 있는 편인데, 결과까지 비교적 예측한 대로 나왔습니다. 통계 결과를 보고 연구자는 지도교수와 함께 임팩터 팩트 높은 저널 가즈아아~~~’를 외쳤을 법합니다.

 

결과 기술 후에는 본 연구의 결과를 선행 연구 결과에 비추어 해석하고 추후 연구 방향을 제시하는 논의(Discussion)가 뒤따르게 됩니다. 결과가 나오지 않은 부분에 대한 해석이 중요할 수 있는데요. 이를 잘 해석하지 못 하면 reject(저널 리뷰어가 게재를 거부하는 것) 당할 가능성이 높죠. 연구자가 제일 꺼려 하는 상황입니다.

 

저자는 가설 (2a)가 지지되지 않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정신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은 통제 과제 후 예견 과제를 수행할 때도 기억 과제 후 예견 과제를 수행할 때만큼이나 과거 기억을 알아서 잘 끌어올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합니다. 때문에 조건(기억 과제 후 예견 vs. 통제 과제 후 예견)에 따른 결과의 차이가 없었다는 것인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현병을 지닌 사람이 통제 과제 수행 후 예견을 할 때보다 기억 과제 수행 후 예견을 할 때 더 생생한 상황을 그려내지 못 했다는 것은 의문으로 남습니다. 이는 조현병을 지닌 사람이 정신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에 비해 말을 덜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견 상황에서 두 집단 간의 단어 수 차이는 없었습니다. 더욱이 기억 과제 시 단서가 주어졌을 때 조현병을 지닌 사람은 정신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만큼이나 생생하게 기억을 회상했습니다(가설 1b). 즉 조현병을 지닌 사람이 언어적으로 손상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가 나온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저자는 조현병에서 기억과 예견의 연관성이 강하지 않고 이러한 점이 예기 쾌감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모든 참가자는 긍정적 및 중립적 자극에 의한 예견에서보다 부정적 자극에 의한 예견에서 덜 생생한 보고를 하였는데, 이는 회피라고 하는 역기능적 정서 조절 전략으로 설명이 됩니다. 걱정이 회피의 주요한 예인데요. 걱정은 앞으로 벌어질 수 있는 부정적 사건에 관한 명확한 문제 설정과 해결책 모색에 연관되는 것이 아니라 모호하고 막연하게 부정적인 미래를 예측하는 것과 관련 있는 인지적 과정입니다. 걱정은 문제해결에는 1도 도움이 안 되지만 불안과 같은 부정적 정서를 약화시키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정신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도 자주 사용하는 회피적 정서 조절 전략이죠. 아울러 부정적 자극에 의한 예견에서 조현병을 지닌 사람은 정신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보다 덜 명쾌하게 말했습니다. 이는 걱정과 같은 회피에서 조현병을 지닌 사람이 정신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에 비해 능숙하지 못 하다는 의미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끝으로 조현병에서 기억과 예견의 연관성이 '생생함'의 측면에서는 강하지 않아 보이지만, 긍정적 과거 기억을 참조하는 것이 예기쾌감이 저해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긍정적 정서 자극을 통한 기억 회상 과제 후 긍정적 정서 자극을 통한 예견 과제를 시행했을 때 조현병을 지닌 사람은 정신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만큼 현재 즐거움 및 예측된 즐거움을 보고했습니다. 기억 과제가 아닌 통제 과제 수행 후에는 예기쾌감의 손상이 나타났습니다. 현재 즐거움 및 예측된 즐거움에서 정신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보다 유의미하게 낮았다는 것이죠.

 

조현병을 지닌 사람은 정신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에 비해 미래를 예견할 때 과거 기억을 참조하는 것이 어렵고, 덜 생생한 예견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적 사건에 대한 예견에 앞서 스스로가 경험한 긍정적 사건에 대한 회상을 돕는 일은, 긍정적 사건에 대한 예견에 수반되는 긍정적 정서를 경험하는 능력이 저해되는 것을 막습니다. 조현병을 지닌 사람이 과거 즐거웠던 일을 구체적으로 회상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예기쾌감에서의 손상을 방지하고, 이 연구에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예기쾌감이 회복되면 무욕증과 같은 음성 증상에서도 개선이 뒤따를 것으로 예측해 볼 수 있습니다. 애플파이를 먹는 것에 대한 기대에서 오는 즐거움은 실제로 애플파이를 먹는 것을 목표로 행동하게 할 가능성을 높이지 않을까요? 우리가 스달을 현금화하는 것을 상상하는 것에서 오는 즐거움이 스달을 모으는 행동(글 쓰는 데 에너지를 쏟고 큐레이션 활동을 열심히 하는 등)을 강화하게 마련이니까요.

 

오늘의 연구 소개는 여기까지입니다. 제가 이해한 만큼 전달했고 이해가 안 돼 넘어간 부분도 있습니다. 이해한 부분만이라도 잘 전달이 됐나 모르겠습니다.

 

사례를 언급하지 않고 정신장애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좀 어려운 면이 있어서 주로 최신 연구 소개에 그치게 되네요. 조현병에 관한 연구를 백날 보는 것보다 조현병을 지닌 환자 한 분을 직접 만나 보거나 사례와 관련된 디테일한 얘기를 듣는 것이 참학습인데 아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도 환자의 정보를 노출하지 않는 것은 직업적 윤리니까요. 앞으로 계속 글을 연재하게 될 텐데 특정 정신장애를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는 다른 방안이 없나 모색 중입니다. 연구 소개 자체도 매우 잼있긴 합니다마는..

 

ref)

- Painter, J. M., & Kring, A. M. (2016). Toward an understanding of anticipatory pleasure deficits in schizophrenia: Memory, prospection, and emotion experience. Journal of abnormal psychology, 125(3), 442.

 

 

무쾌감으로 주로 번역되고 있는 anhedonia는 조현병을 지닌 사람이 즐거운 경험을 하더라도 긍정적 정서를 잘 느끼지 못 한다는 의미입니다. 무쾌감은 조현병의 음성 증상에 포함되며, DSM-IV에서 부수적 특징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현병 환자가 정말 긍정적 정서를 잘 느끼지 못 하는 것일까요?


지금까지 연구된 바에 따르면 즉각적으로 긍정적 정서를 느끼는 것에서는 정신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과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정신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보다 미래의 긍정적 사건에 대한 기대에서 오는 즐거움을 잘 느끼지 못 한다는 것이 서로 다른 연구자의 연구를 통해 반복적으로 검증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와 관련한 비교적 최신 연구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현재 어떤 경험으로 인해 즉각적으로 긍정적 정서를 느끼는 것을 완료쾌감이라고 부르고, 미래의 긍정적 사건을 기대하고 원하게 되는 데서 야기되는 긍정적 정서를 예기쾌감이라고 부르겠습니다.1 둘 간의 차이를 쉽게 비교하자면 liking와 wanting의 차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맛있는 것을 먹을 때의 즐거움과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을 기대할 때 느끼는 즐거움은 다르다고 보는 것이죠.


캐나다 출신의 Silva와 동료 연구자들(2017)은 조현병을 지닌 사람이 정신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과 완료쾌감에서 차이를 보이지 않을 것이지만 예기쾌감에서는 차이를 보일 것이라는 가설을 가지고 연구를 했습니다.2 즉 조현병을 지닌 사람이 정신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에 비해 낮은 예기쾌감을 보일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가설1). 그에 더해 예기쾌감에서의 손상이 조현병 환자 중에서도 무욕증이 더 심한 환자 집단과 관련될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가설2). 참고로 무욕증은 어떤 일을 하고자 하는 동기가 현저하게 줄어든 상태로, 조현병의 DSM 진단기준에서 감정 표현에서의 감소와 함께 음성 증상 중 하나로 명시돼 있습니다.


연구에 참여한 사람은 조현병이나 조현정동장애를 지닌 외래 환자가 84명, 정신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이 81명이었습니다. 환자 집단은 Apathy Evaluation Scale(AES)로 측정한 무욕증의 수준에 따라 고/중/저로 나뉘어서 분석이 진행됐습니다.


완료쾌감과 예기쾌감을 측정하기 위해 사용된 도구는 Temporal Experience of Pleasure Scale(TEPS)입니다.3 18개의 문항으로 구성된 자기보고식 질문지입니다. 이 질문지에는 완료쾌감과 관련된 문항이 있고 예기쾌감과 관련된 문항이 있는데, 완료쾌감 문항은 이를 테면, “따뜻한 침대에 누워서 듣는 창밖의 빗소리를 사랑한다”, “야외 산책을 할 때 신선한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는 것을 즐긴다”입니다. 주로 신체적인 즐거움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예기쾌감 문항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배우가 출연한 새 영화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될 때, 난 빨리 그 영화를 보고 싶어진다”처럼 미래 경험에 대한 기대에서 오는 즐거움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연구 결과를 살펴보면, 완료쾌감과 예기쾌감 모두에서 외래 환자 집단과 정신장애를 지니지 않은 일반인 집단 간의 차이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외래 환자 집단을 무욕증 수준에 따라 고/중/저로 나누어 이차적으로 분석하였을 때, 고수준의 무욕증 환자 집단은 일반인 집단과 저수준의 무욕증 환자 및 중간 수준의 무욕증 환자 집단보다 각기 유의미하게 낮은 수준의 완료쾌감과 예기쾌감을 경험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완료쾌감과 예기쾌감 각각에서 중간 수준의 무욕증 집단, 저수준의 무욕증 집단, 일반인 집단 간의 유의미한 차이는 없었습니다.



Adapted from Da Silva et al. Psychiatry Res 2017;254:112-117.


또한 연구에 참여한 전체 인원의 데이터를 놓고 볼 때 무욕증의 수준은 완료쾌감과 예기쾌감의 수준을 예측했습니다. 무욕증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더 낮은 수준의 완료쾌감과 예기쾌감을 경험할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Adapted from Da Silva et al. Psychiatry Res 2017;254:112-117.


가설1에서 조현병의 유무에 따라 완료쾌감의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했는데 이 부분은 지지됐습니다. 다만 조현병의 유무에 따라 예기쾌감의 차이가 나타날 것이라고 했는데 이 연구에서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설명이 필요한데, 저자들은 다른 두 연구에서도 이렇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이례적인 결과는 아닐 수 있다는 것이죠. 또한 차이가 났던 연구의 환자 구성을 살펴보면 차이가 나지 않았던 연구에 비해 정형 항정신병 약물을 사용하는 환자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저자들은 정형 항정신병 약물이 뇌의 보상 체계에 기능상의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제시하면서, 정형 항정신병 약물의 사용이 예기쾌감을 경험하는 능력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조현병을 지닌 사람에게서 예기쾌감의 손상이 나타나는지 여부는 연구가 더 필요한 부분 같습니다.


가설과 달리, 병의 유무에 따른 예기쾌감에서의 차이가 없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하지만 조현병의 유무와 관계없이 무욕증의 수준은 완료쾌감과 예기쾌감에 모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죠. 이는 가설2를 지지하는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무욕증 고수준 집단에서 완료쾌감과 예기쾌감의 수준이 다른 집단에 비해 유의미하게 낮았다는 것에 대해 저자들은 높은 수준의 무욕증으로 인해 즐거움 추구 행동이 감소되는 것이 무쾌감의 한 측면일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무욕증과 무쾌감이 연관되고, 무쾌감을 무욕증이라고 하는 동기 결핍의 측면에서 이해하려는 시도인 것 같은데 사실 무슨 말인지 이해는 잘 안 됩니다. 더욱이 무욕증 고집단에서 다른 집단에 비해 예기쾌감뿐만 아니라 완료쾌감이 현저하게 낮았던 것에 대한 설명도 안 돼 있는 듯합니다. 무욕증이 현저한 조현병 환자는 그렇지 않은 조현병 환자보다 예기쾌감뿐만 아니라 완료쾌감을 경험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것일까요? 질문에 대한 답이 또 다른 질문을 낳았네요.


이 연구를 세 줄로 요약하고 글을 끝맺고자 합니다.


- 조현병을 지닌 사람도 정신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처럼 즉각적인 즐거움, 즉 완료쾌감을 경험합니다.

- 조현병을 지닌 사람은 예기쾌감을 경험하는 능력이 손상돼 있다고 알려져 왔으나 이 연구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정신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과 차이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 조현병 유무와 관계없이 무욕증이 심할수록 더 낮은 완료쾌감과 예기쾌감을 경험할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습니다.


조현병 환자의 예기쾌감에서 이상이 있음을 시사하는 연구가 많기 때문에 다음 글에서는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다루고자 합니다. 기억과 관련하여 말이죠.


우리가 앞으로 벌어질 즐거운 사건에 대한 기대를 할 때는 그와 유사한 과거 경험에 기대기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 생크림케잌을 먹을 생각에 즐거운 아동을 떠올려 봅시다. 이 아동의 머릿속 어딘가엔 생크림케잌을 먹고 즐거웠던 자서전적 기억이 저장돼 있다는 것이죠. 그렇지 않고서야 앞으로 먹게 될 생크림케잌이 즐거움을 주기 어렵습니다. 조현병을 지닌 사람은 즐거웠던 기억을 상세하고 명료하게 떠올리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예기쾌감에서도 손상이 발생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4 다음 글에서 소개할 내용입니다.


ref)

1. Klein, D. (1984). Depression and anhedonia. In D. C. Clark & J. Fawcett (Eds.), Anhedonia and affect deficit states(pp. 1–14). New York: PMA Publishing.

2. Da Silva, S., Saperia, S., Siddiqui, I., Fervaha, G., Agid, O., Daskalakis, Z. J., ... & Foussias, G. (2017). Investigating consummatory and anticipatory pleasure across motivation deficits in schizophrenia and healthy controls. Psychiatry research, 254, 112-117.

3. Gard, D. E., Gard, M. G., Kring, A. M., & John, O. P. (2006). Anticipatory and consummatory components of the experience of pleasure: a scale development study. Journal of research in personality, 40(6), 1086-1102.

4. Painter, J. M., & Kring, A. M. (2016). Toward an understanding of anticipatory pleasure deficits in schizophrenia: Memory, prospection, and emotion experience. Journal of abnormal psychology, 125(3), 442.

우주비행에서 '자세'는 방향성을 가리킨다. 태양과 지구 또는 다른 우주선의 위치와 견주어 나의 우주선을 어디로 향하도록 할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자세를 제어하지 못하면 두 가지 일이 생긴다. 우주선이 공중제비를 돌기 시작하면서 승무원들이 정위치를 벗어나고, 우주선 또한 올바른 경로를 이탈한다. 시간이나 연료가 부족할 경우, 이로 인해 생사가 갈릴 수 있다. (중략) 궁극적으로 내가 바라던 경력상의 목표에 이르렀는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 것은 내가 아니다. 세상에는 내가 제어할 수 없는 변수가 수두룩하다. 하지만 단 한 가지는 내가 제어할 수 있다. 바로,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의 자세다. 자세를 통해서만 든든함과 안정감을 느끼며, 옳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고 확신활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의식적으로 자세를 살피고 필요하다면 고친다. 자세를 잃는 것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한 결과를 가져올 테니까. p.62-3

정신과에서 진단 기준에 관한 편람으로 주로 사용되는 DSM 진단 체계는 시대의 흐름과 연구 결과의 축적에 따라 변화를 거듭해 왔고 현재 5판까지 나온 상태입니다. 4판에서 5판으로 넘어오면서 조현병 진단 기준이 달라진 부분 중 눈에 띄는 것은 4판에 있던 조현병의 세부 유형들, 이를 테면 편집형(paranoid type), 와해형(disorganized type, 해체형이라고도 부릅니다) 등 조현병의 아형(subtype)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러한 구분은 이론적인 혹은 통계적인 기반에 의해 정립되었다기보다 조현병을 정의내리는 데 큰 영향을 미친 임상가들의 임의적인 구분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전 글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 크레펠린이나 Bleuler 등이 조현병의 아형을 정립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습니다.1 대가가 그렇다고 하면 사실 후학들은 그 말을 따르게 되기 쉽고, 그래서 이러한 구분이 명맥을 이어 온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거의 백 년 전에 세워진 이러한 아형 분류가 타당한지 검증해 보려는 시도가 많았고, 결과적으로 조현병의 실제 현상과 잘 맞지 않는다고 판단돼 DSM-5에서는 사라지게 됩니다.


아형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세부 진단 기준에서의 변화가 눈에 띕니다. 그 중 제가 오늘 얘기하고 싶은 부분은 조현병의 음상증상 중 하나인 정서적 둔마(affective flattening)가 DSM-5로 넘어오면서 감정 표현의 감소(diminished emotional expression)로 바뀌게 된 것과 관련 있습니다.


둔마라는 표현이 잘 와닿지가 않으시죠? 대학원 입시를 준비하던 중 이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나, 그 때로부터 7~8년이 지난 지금이나 저도 이 표현이 별로 와닿지가 않습니다. 둔마라는 표현을 이해해 보고자 여러 문헌을 찾아보고 나름의 이미지를 그려보았던 적이 있습니다. 정신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이 잔잔하게, 때로는 격하게 물결치는 감정을 경험한다면 조현병을 지닌 사람의 감정 경험은 평평한 유리 표면처럼 감정의 높낮이가 없는 그런 상태일까? 높낮이가 없다는 것은 감정을 경험하지 못 한다는 말의 다름이 아니지 않을까? 아니면 정신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에 비해 감정을 약하게 경험한다는 것인가? 그게 둔마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다는 것이죠.


누차 강조하지만 조현병을 지닌 사람의 감정 경험은 정신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의 감정 경험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조현병을 지닌 사람 역시 정신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삶의 희노애락을 경험합니다. 아주 당연해 보이는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정신장애, 특히 조현병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간과되기 쉬운 사실이기도 하죠. ‘정서적 둔마’라는 명료하지 못 한 표현이 이러한 편견에 일조하는 면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신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조현병을 지닌 사람은 삶의 희노애락을 경험하지만, 스스로가 경험한 감정을 표현하는 능력에서 조현병을 지닌 사람은 정신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과 차이를 보이게 됩니다. 제가 이런 결론을 내리기까지 봤던 몇 편의 연구가 있는데 그 중 한 편을 오늘 소개하고자 합니다.


정서가 둔마되었다고 하는데 조현병을 지닌 사람은 정말 매우 약화된 형태로 감정을 경험하는 것일까? 아니면 정신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과 비슷한 수준으로 감정을 느끼되 자신이 경험한 감정을 표현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것일까? 저와 같은 의문을 품었던 임상가들이 과학적으로 이 문제를 검증하고자 했습니다. 간단히 말해, 주관적 정서 경험과 실제 객관적으로 관찰된 정서 표현을 비교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Aghevli이라는 성을 지닌 미국 임상심리학 박사가 동료들과 함께 2003년에 퍼블리쉬한 재미있는 연구를 한 편 소개해 봅니다.2 DSM 4판 기준으로 조현병 진단이 내려진 33명의 외래 환자와 15명의 일반인을 비교한 연구입니다.


조현병 집단과 일반인 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각기 사회적 역할 연기(The role play test)라는 특정 과제를 수행하게 됩니다. 이 과제는 절차라든지 세부 수행 과정 등이 매우 구체화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연구자가 수행하더라도 동일한 절차를 따르게 돼 있는 그런 과제입니다. 실제 사회적 상황에서의 관찰 결과를 활용할 수 있다면 좋겠으나 실제 상황은 연구자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들이 많고 이는 도출된 결과의 해석을 복잡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선행 연구들에서 지속적으로 검증된 이런 구조화된(structured) 과제를 사용하게 됩니다.


아무튼 이 과제가 가상의 상황이긴 하지만 실제 사회적 상황에서 어떤 사람이 어떻게 행동할지를 예측함에 있어 신뢰할 만하다고 반복적으로 입증돼 왔기 때문에 이 연구에서도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사회적 역할 연기 과제를 사용한 이유는 궁극적으로, 사회적 상황에서 조현병 집단과 일반인 집단이 ‘주관적 정서 경험’의 차이를 보이는지, 그리고 외부 관찰자가 보기에 두 집단이 ‘표현된 정서’에서 차이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비교를 통해 조현병 집단에서 주관적 정서 경험과 표현된 정서 사이의 차이가 있는지 여부를 가시화할 수 있습니다.


Adapted from Aghevli et al. Psychiatry Res 2003;119(3):261-70.


결과를 살펴보면, Fig 1은 주관적 정서 경험과 관련됩니다. 위쪽 그래프는 긍정적 정서 경험과 관련되고 아래쪽 그래프는 부정적 정서 경험과 관련됩니다. 두 그래프 모두에서 빈 막대가 일반인 집단을 의미하고 검은 막대가 조현병 집단을 의미합니다. Baseline은 우리가 기저선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평소 상태를 의미하고, Affiliation과 Assertion은 비교적 상반되는 두 사회적 상황을 의미합니다. 즉 전자는 일상적인 대화를 시작하는 상황과 관련되고 후자는 협상이나 타협과 관련되는 상황인 것 같습니다.


결과를 보면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정서에서는 어떤 상황에서든 간에 두 집단이 별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역할 과제를 수행하는 조현병 집단과 일반인 집단의 참가자들을 관찰한 외부 관찰자가 ‘표현된 정서’를 평가한 부분을 살펴볼까요?


표현되는 정서는 참가자들의 수행을 비디오로 녹화한 자료를 보며 FACES라는 평가 체계를 이용해 외부 관찰자가 평가했습니다.


역할 연기 이전에 증상과 관련한 인터뷰가 조현병 집단의 각각의 구성원에게 실시되는데, 이 실시 장면도 비디오에 담기게 됩니다. 이 인터뷰 장면은 SANS라는 평가 도구를 통해 외부 관찰자에 의해 평가됩니다. SANS 문항 중 정서적 둔마와 관련되는 다섯 문항을 사용했고 이를 통해 임상적 평가를 할 수 있게 됩니다. 다섯 문항의 내용을 살펴보면, 변하지 않는 얼굴 표정, 상대방의 눈을 잘 맞추지 못 하는 것, 억양이 부족한 것 등입니다. 각각의 문항에 대해 0점에서부터(not present; normal) 5점(severe) 사이에서 평가하게 되고요.


FACES와 SANS 모두 평가에 있어 외부 관찰자의 주관이 섞일 수밖에 없는바, 같은 자료를 또 다른 외부 관찰자가 평가하게 하여 두 관찰자 간의 일치도가 얼마나 높은지 보게 됩니다. 평가자 간 일치도를 본다고 하는데요. 본 연구에서 평가자 간 일치도가 매우 높은 수준으로 나왔습니다. 즉 표현되는 정서를 평가함에 있어 객관성을 확보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저널에 실릴 수 있었을 것이고요.



Adapted from Aghevli et al. Psychiatry Res 2003;119(3):261-70.


FACES 평가 체계는 저도 처음 보는 것이라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 합니다. 다만 위에 제시한 Fig. 2를 보시면 표현되는 정서에서 집단 간의 차이가 유의미했음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Affiliative 상황에서 조현병 집단은 일반인 집단에 비해 유의미하게 낮은 수준의 긍정적 정서 표현이 나타났습니다. Assertive 상황에서도 조현병 집단은 일반인 집단에 비해 유의미하게 낮은 수준의 부정적 정서 표현이 나타났습니다. 긍정적 정서든 부정적 정서든 조현병 집단은 일반인 집단에 비해 유의미하게 표현을 덜 하는 것으로 나타났네요.


그럼 SANS로 측정한 정서적 둔마와 FACES 간의 상관이 있을까요? 즉 임상적 평가와 실제 행동 간의 상관이 있었을까요? 네 상관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즉 정서적 둔마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수록 Affiliative 상황에서 긍정적 정서가 덜 나타났습니다. Assertive 상황에서도 유의미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연구자들은 SANS로 평가한 정서 둔마의 정도와 가상의 사회적 상호작용에서 나타나는 정서 표현(FACES로 평가) 사이에 연관이 있어 보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조현병을 지닌 사람이 역할 연기 과제에서 정신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과 비슷한 수준의 주관적 정서 경험을 하지만 표현되는 정서에서 이처럼 집단 간 차이가 두드러지는 점은, 조현병을 지닌 사람이 약화된 형태로 정서를 경험한다는 생각의 타당성이 적음을 의미합니다.


정서가 둔마되었다는 표현이 약화된 형태의 정서 경험을 가리킨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기 때문에, 이 연구뿐만 아니라 이 연구와 비슷한 결과를 도출한 다른 연구 성과들에 비추어 DSM-5에서 ‘정서적 둔마’가 아닌 ‘감정 표현의 감소’로 진단 기준을 바꾼 것 같습니다.


비슷한 말일 뿐이고 이러한 변화가 임상적으로 큰 영향이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임상가도 있는 것 같습니다.3 하지만 제가 볼 때 정서적 둔마가 약화된 형태의 주관적 정서 경험을 포괄하는 뉘앙스를 조금이라도 갖고 있다면, 혹은 애초에 이 용어를 사용했던 저자의 의도와 달리 오해석의 여지가 있다면  감정 표현에서의 감소라고 정확하게 표현하는 게 진단이나 치료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특히 약화된 형태의 주관적 정서 경험이라고 생각하는 임상가와 감정 표현에서의 감소라고 생각하는 임상가는 서로 다른 방식의 치료적 접근을 할 것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결과가 임상적으로 중요한 함의가 있다고 봅니다. 


다음 글에서도 조현병을 지닌 사람의 정서에 초점을 두겠습니다. 저는 조현병을 지닌 사람의 정서 경험에 관심이 많습니다. 정신건강임상심리사 수련생으로 있을 때 조현병을 지닌 환자분을 많이 평가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호기심이 생겼고, 공부를 틈틈이 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이런 쪽으로 얘기를 많이 하게 되네요.


조현병을 지닌 사람은 즐거움을 어떻게 경험하는 것일까요? 조현병을 지닌 분을 심리평가할 때, 살아오며 즐거웠거나 행복했던 때가 언제인지 떠올려 보라고 하면 대답을 잘 못 하는 분이 많습니다. 앞으로 펼쳐질 즐거운 사건에 대한 기대도 적어 보이고요. 전반적으로 조현병을 지닌 사람은 정신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보다 즐거운 일에 대한 기억이나 기대가 적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현병을 지닌 사람이 즐거움을 경험하지 못 하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 다음 글에서 자세히 얘기해 보고자 합니다.


ref)


1. McKenna, P. J., & Oh, T. M. (2005). Schizophrenic Speech: Making Sense of Bathroots and Ponds that Fall in Doorways. UK: University Press, Cambridge.

2. Minu A. Aghevli,, Jack J. Blanchard., and William P. Horan. (2003). The expression and experience of emotion in schizophrenia: a study of social interactions. Psychiatry Research 119, (3), 261-270.

3. 조철현, 이헌정 (2014). DSM-5의 조현병 스펙트럼 장애 : 새로운 변화인가?. 대한조현병학회지, 17, 5-11.

집 근처 공원으로 봄맞이 나들이를 다녀왔습니다. 벚꽃이 아직 만개해 있더군요.이제 9.6kg 정도 되는 딸래미를 아기띠에 하루 종일 메고 있었습니다. 딸이 엄마 껌딱지인데, 몸은 힘들었지만 딸과 심리적 거리를 좁히는 시간이 됐습니다. ㅎ 평소에는 딸이 저를 별로 거들떠보지 않는 느낌이 들 때가 많은데, 하루 붙어 있었다고 제게 많이 엥기네요. 살짝 몸살도 나고 여러모로 저질 체력 인증했지만 만족스럽습니다. 육아에도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데, 쉽지 않네요. 아내에게 핀잔 들을 때가 많습니다. 살림과 육아는 공동이라는데, 제 몸은 왜 집에만 가면 눕고 싶은지.. ㅜㅜ 저질 체력인 것을 아내가 알고, 그래서 많이 봐줍니다. 다행이라면 다행일까요.

조현병을 치료함에 있어 정서가 차지하는 비중은 사고에 비해 적었습니다. 조현병은 사고장애라는 도식을 강하게 지닌 치료자일수록 조현병을 지닌 사람이 경험하는 정서에 포커스를 덜 맞추기 쉽죠. 하지만 조현병에 대한 최근 연구의 주요 흐름 중 하나가 조현병을 지닌 사람이 경험하는 정서에 관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이해함에 있어 그 사람의 정서 경험을 간과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일 수밖에 없겠죠. 오늘은 조현병 환자가 어떤 식으로 정서를 경험하는지를 정서 자각과 정서 조절에 비추어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정서를 자각하는 능력과 조절하는 능력은 우리 삶에 없어서는 안 되는 매우 중요한 능력입니다. 이 중 정서를 자각하는 것은 말 그대로 내 감정이 지금 어떤 것인지 식별하고 표현하는 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원시시대나 지금이나 불안이나 공포 등을 감지하지 못한다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위기 상황을 인식하지 못 해 실제로 죽게 될 가능성이 높아질 것입니다. 생명을 잃는 상황까지 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정서 자각 능력은 우리 일상 곳곳에서 중대한 영향력을 미칩니다.

 

사회적 상황에서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행동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중요한 나침반 가운데 하나가 정서입니다. 비근한 예로, 누군가에게 화가 난다는 것은, 즉 우리가 우리의 감정에 라는 라벨을 붙여 화를 식별했다는 것은 그 누군가에 대한 나의 기대와 상대방의 실제 행동 간의 큰 차이가 발생했음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습니다. 분노는 우리가 이 차이를 인식하게 하고, 어떤 식으로 상대방에게 행동할 것인지 선택하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따라서 정서를 자각하지 못 한다면 내게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판단을 내리는 것이 매우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정서를 제외한 채 이성적으로만 판단을 했을 때 얼마나 불합리한 선택을 할 수 있는지 뇌손상 환자의 사례를 통해 어렵지 않게 배울 수 있습니다. 정서를 자각하지 못 한다는 것은, 좀 더 쉽게 표현하면 피부를 통해 어떤 감각도 느끼지 못 하는 상태와 비슷할지 모르겠습니다. 감각을 느끼지 못 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해로운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듯이, 정서 자각의 어려움은 사회적 기능 수준의 저하와 상관을 보일 것입니다.

 

정서를 자각하는 능력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정서를 조절하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분노라는 정서를 자각했다 하더라도 분노를 부적절하게 표출하게 되면 그에 합당한 사회적 책임을 지게 돼 있습니다. 화가 난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물건을 부수거나 다른 사람에게 위해를 가한다면 철컹철컹 쇠고랑을 차겠죠. 요즘 분노조절장애라는 말이 유행처럼 쓰이고 있는데, 분노조절장애가 정식 진단명은 아니라 하더라도 한국 사회에서 분노 조절의 어려움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회적 문제가 야기되고 있는지를 상징하는 표현 같아 씁쓸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분노를 사회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방식으로 표출하도록 돕는 것과 관련 있는 능력이 정서 조절 능력입니다. 이지영(2006)에 따르면 정서조절은 개인이 불쾌한 정서를 감소시키기 위해 동원하는 다양한 노력입니다. 분노조절장애라는 표현은 분노를 감소시키는 데 완전히 실패하여 사회적인 역기능이 발생한 상황을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겠네요.

 

정서 조절에 관해 학자마다 다른 견해를 제시하고 있지만, Gross 같은 학자에 따르면 정서 조절은 어떤 정서를 어느 시점에 어떤 방식으로 경험하고 표현할지와 관련된 일종의 전략입니다. 불쾌한 정서를 감소시키기 위해 동원하는 다양한 노력을 이처럼 조금 더 세분화시키는 작업은, 우리가 동일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서로 다른 정서를 경험하고, 비슷한 정서 경험을 하더라도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에서 또 저마다의 차이가 있게 되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각자가 사용하는 정서 조절 전략이 다르기 때문에 동일한 상황에 처하거나 비슷한 정서 경험을 하더라도 저마다 다른 정서 반응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죠.

 

Gross에 따르면 정서 조절 전략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정서가 발생하기 전에 적용하는 선행사건 초점적 전략(antecedent-focused strategies)과 정서가 발생한 후 적용하는 반응 초점적 전략(response-focused strategies)입니다. 전자의 예로는 인지적 재해석이 있고 후자의 예로는 억제가 있습니다. 인지적 재해석은 상황에 대한 해석을 다르게 함으로써 부정적 정서의 발생 가능성을 낮추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상대방이 그 상황에서 그렇게 행동할 수 있겠다고 역지사지함으로써 부정적 정서의 발생 가능성을 낮추는 것이죠. 억제는 말 그대로 이미 발생한 부정적 정서를 꾹 참고 누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화가 나도 표현하지 않고 참는 것입니다. 옛날 우리 어머니들이 이런 정서 억제 전략을 많이 사용하다가 홧병이 종종 나곤 하셨죠. . 연구 결과를 살펴보더라도 반응 초점적 전략보다 선행사건 초점적 전략이 정신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정서 자각과 정서 조절에서의 어려움은 최근 조현병을 이해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요소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하려고 서두가 길었습니다. 이전까지는 주로 신경인지(nuerocognition) 혹은 사회인지적(social cognition) 측면에 포커스를 맞춰왔다면 지금은 조현병 환자가 경험하는 정서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죠.

 

조현병 환자가 경험하는 정서에 관한 연구 중 어떤 연구는 일반인 집단에서보다 조현병을 지닌 사람들 집단에서 정서 자각의 어려움이 크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다른 어떤 연구에서는 일반인 집단에 비해 조현병을 지닌 사람들 집단에서 정서를 억제하는 경향이 더 뚜렷하게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연구에서는 인지적 재해석과 억제를 사용함에 있어 두 집단이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고 보고되고 있습니다. 사실 과학적 연구라는 것이 이처럼 모인지 도인지 확실하게 정립되지 않는 상황이 빈번하고 그래서 후속 연구자들이 모인지 도인지 계속 검증을 해보게 됩니다.

 

David Kimhy와 동료 연구자들(2012)은 조현병을 지닌 사람들이 일반인 집단보다 정서 자각 및 조절에서 어려움이 큰 지 검증해 보고자 하였습니다. 또한 정서 자각 및 조절에서의 어려움이 조현병을 지닌 사람들의 사회적 기능 저하를 얼마나 설명하는지 알아보고자 했습니다. 이 사람들의 주요 연구 목적은 후자입니다. 기존 연구에 자신들만의 고유한 성과를 더하고자 함이죠. 이들의 연구에서 사회적 기능은 가족 및 친구로부터 받는 지원 및 관계의 질에 관한 환자의 지각을 의미합니다.

 

조현병을 지닌 사람들 집단에는 조현병 환자 35명뿐만 아니라 조현정동장애 환자 3, 조현양상장애 환자 3, 달리 분류되지 않는 정신병적 장애 환자 3명 등 총 44명의 환자가 포함됐습니다. 일반인 통제 집단은 20명이었고, 이들은 모두 정신병의 과거력이 없고, A군 성격장애로 진단 받은 적이 없는 등의 기준을 충족시켜야 했습니다. 아래는 결과입니다.

 


 Adapted from Kimhy et al. Psychiatry Res 2012;200:193-201.


결과를 살펴보면 일반인 집단에 비해 조현병 집단에서 정서 자각(정서 인식 및 표현) 및 조절의 어려움이 큰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일반인 집단에 비해 조현병 집단에서 정서를 인식(identifying)하고 표현(describing)하는 것의 어려움이 크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한 일반인 집단에 비해 조현병 집단에서 인지적 재해석을 덜 사용하고 억제를 더 많이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반응초점적 전략인 억제는 선행사건 초점적 전략인 인지적 재해석에 비해 정신건강에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기 쉬운 정서조절 전략입니다.

 


 Modified from Kimhy et al. Psychiatry Res 2012;200:193-201.


조현병을 지닌 환자 집단에서 이처럼 정서 자각 및 조절에서의 어려움이 뚜렷하다면, 과연 조현병을 지닌 환자의 사회적 기능에 정서 자각 및 조절의 어려움이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궁금하겠죠. 그래서 통계적 기법 중 하나인 회귀분석을 연구자들이 실시하게 됩니다. 복잡한 중간 과정은 생략하고 결론만 말씀 드리면, 정서 자각에서의 어려움이,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서를 표현하는 것에서의 어려움이 조현병 환자의 나이나 신경인지 기능 등을 통제하고 나서도 35%나 사회적 기능을 더 설명하였습니다. 나이나 신경인지 기능보다 정서 자각 능력이 조현병을 지닌 환자의 사회적 기능을 훨씬 더 많이 설명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만큼 정서 자각 능력이 조현병 환자의 사회적 기능을 이해하는 주요한 통로라는 말이죠. 정서 조절 능력은 사회적 기능을 추가적으로 10% 더 설명했으나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Modified from Kimhy et al. Psychiatry Res 2012;200:193-201.

연구자들은 정서 인식 및 표현 능력 각각이 정서 억제와 유의미한 상관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 같습니다. 즉 정서 조절 능력이 사회적 기능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정서 인식 및 표현 능력이 각각 정서 억제와 유의미한 상관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위 표에서 오른쪽에 박스 쳐놓은 부분입니다) 정서 인식 및 표현, 정서 억제, 사회적 기능 간의 인과관계를 찾아보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정서를 표현하는 것에서 평소 어려움이 있는 조현병 환자는 인지적 재해석을 사용할 시점을 놓친 채 이미 부정적 정서가 두드러지게 된 상황에서 반응초점적으로 정서를 억제할 가능성이 높고, 이로 인해 사회적인 지지를 받거나 의미 있는 관계를 맺어나감에 있어 더 많은 어려움에 처하기 쉬운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이죠. 긍정적 정서만큼이나 부정적 정서를 적절하게 표현하는 것이 관계의 질 향상에 중요하다는 것을 염두에 둘 때 말입니다.

 

이런 연구를 하는 까닭은 치료적인 함의(clinical implication)을 도출하기 위함입니다. 연구를 위한 연구도 많지만 그러한 폐해를 잠시 생각지 않는다면,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모든 연구는 근본적으로 치료와 직결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연구에서도 치료적 함의가 나왔죠. 조현병 환자 집단이 일반인 집단보다 정서 표현의 어려움이 큰데, 그로 인해 사회적 지지나 관계의 질이 심각하게 훼손될 수 있다면 치료적 개입은 조현병을 지닌 환자분이 정서적 표현을 잘할 수 있도록 돕는 방향으로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지적 기능 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할뿐만 아니라 정서 표현을 잘할 수 있게 개입을 해야 한다는 치료적 함의를 갖게 되는 연구인 것이죠.

 

조현병을 지닌 환자분은 겉으로 보기에 둔감해 보일 때가 많습니다. 특히 만성화된 경우라면 더 그렇죠. 이런 겉모습 때문에 정서에 대한 치료적 개입의 필요성이 적지 않았나 생각해 보게 됩니다. 모르긴 몰라도 90년대 혹은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조현병에서의 정서는 관심의 대상이 되질 못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보여지는 것이 다가 아니죠. 조현병을 지닌 환자분이 경험하는 정서의 물결은 거센 파도가 요동치는 바다와도 같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보게 됩니다. 슬픔, 기쁨, 두려움 등 여러 정서가 한데 엉킨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죠. 겉으로만 둔감해 보이는 것이지. 이제라도 조현병을 지닌 환자의 정서에 초점을 맞추는 연구와 치료적 개입에 관한 데이터가 축적되고 있는 것은 고무할 만한 사실인 것 같아요.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서 조현병을 지닌 환자분의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다양한 전략을 가질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ref)

1. 이지영, 권석만(2006). 정서조절과 정신병리의 관계. 한국심리학회지 : 상담 및 심리치료, 18(3), 461-493.

2. David Kimhy, Julia Vakhrusheva, Lauren Jobson-Ahmed, Nicholas Tarrier, Dolores Malaspina, James J. Gross (2012). Emotion awareness and regulation in individuals with schizophrenia: Implications for social functioning, Psychiatry Research, 200, 193-201.

 

 


앞서의 글에서 언급하였듯이 조현병은 이질적인 증상의 집합체 혹은 증후군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조현병의 증상에는 망상, 환각, 와해된 행동, 와해된 언어, 음성 증상이 있습니다. 오늘은 망상이 어떤 식으로 형성되고 유지되는지 사회적 소외와 관련하여 설명해 보겠습니다. 또한 망상과 사회적 소외가 깊어진 결과, 자기 생각이나 감정에 대해서도 확신하기가 어려운 내적 소외가 심화될 수 있음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영화 뷰티풀 마인드가 노벨상 수장자 존 내쉬의 피해망상에 관해 매우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고, 이에 조현병을 언급하는 많은 글에서 이 영화를 언급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망상은 이렇게 드라마틱하고 체계적인 내용에서부터 ‘배우자가 바람을 피고 있다’처럼 어느 정도 현실적이고 심지어 환자 얘기만 들으면 개연성이 있다고 여겨지기도 하는 내용까지 그 스펙트럼이 넓습니다.


망상으로 우리가 정의 내리기 위해서는 어떤 생각이 실제 사실과 현저하게 다름에도 불구하고 환자가 그 생각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는 상황이어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임상가는 환자의 보고에 불합리한 측면이나 오류가 없는지 가족이나 제 삼자의 말을 들어보며 사실 관계를 따져 보게 됩니다. 가족이나 제 삼자의 보고 역시 주관성이 개입하는 것이기 때문에 걸러 들어야 할 필요는 있으나, 여러 사람의 의견을 검토하고 환자가 보이는 다른 증상들을 통합적으로 고려하다 보면 환자의 보고 내용이 망상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일은 생각처럼 그렇게 까다롭지만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망상의 보편적인 주제가 몇 가지 있습니다. 교과서적으로는 피해망상, 질투망상, 색정망상, 종교망상, 과대망상 등이 있습니다. 내용은 다르지만 망상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여러 요인 중 제가 이전 글에서 조현병 환자의 보편적 경험으로 언급했던 소외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니 소외가 어떻게 망상과 관련된다는 거지?라고 반문하실 분들이 계실 것 같습니다. 소외에는 내적 소외와 사회적 소외가 있는데 우선 사회적 소외에 대해서 다루겠습니다. 사회적 소외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빈도가 낮아지거나(극단적으로는 관계가 전혀 없다거나) 관계 깊이가 얕아질 때를 가리키는 것일 수 있습니다. 사회적 소외는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인 외로움을 불러일으키죠. 외로움이라는 보편적 감정을 수반하는 사회적 소외가 망상이라고 하는 특정 증상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이 잘 이해가 되지 않거나 의아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어떤 주제의 망상이든 간에 망상은 처음부터 망상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피해망상은 아주 자연스러운 의심에서부터 시작하여 간헐적인 피해의식을 거쳐 반복적인 피해사고의 경험으로 이어지고, 이후 체계적인 망상, 즉 그릇된 사실에 대한 확고한 신념 체계로 굳어지게 됩니다. 정신장애를 지닌 환자가 나타내는 어떤 증상이 있다고 할 때, 이 증상이 정신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에게서도 발견되는 특정 기능의 극단적 표현인 것인지, 아니면 증상과 기능이 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것인지에 관한 많은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마는, 저는 거의 모든 정신병리가 인간의 보편적 기능의 어느 극단에서 발생하게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망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심에서 망상으로 발전하기까지의 연속선이 존재한다는 것이죠.


의심에서 망상으로 발전하기까지 잘못된 사실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증상의 악화에서도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발생합니다. 의심의 수준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그 의심을 불식시킬 만한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 매우 쉽습니다. 더욱이 의심의 수준에서는 증상으로 인한 일상생활의 기능 저하가 없거나 있다 하더라도 심각하지 않기 때문에 사회적 관계가 유지되기 마련이며, 이는 의심을 불식시킬 만한 증거를 제시하는 사람이나 기회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의심에서 피해의식으로 피해의식에서 어느 정도 체계를 갖춘 피해사고로, 피해사고에서 망상으로 변화되면서 환자분이 지닌 생각을 변화시키는 것이 갈수록 어렵게 됩니다. 더욱이 생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가 발생할 가능성도 낮아지게 됩니다. 증상이 현저해질수록 사회적 관계를 비롯한 일상생활 기능에서 눈에 띄는 저하가 발생하고, 이는 사회적 소외로 이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의심에서 망상으로 발전할수록 생각을 수정하기가 어려워지는데, 이 과정에서 사회적 소외가 비례하여 심해질 가능성이 높고 이에 생각을 수정할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드니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발생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한 번 망상으로 굳어지면 망상으로 인해 일상생활이 심각하게 저해됨에도 불구하고 치료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이처럼 사회적 소외, 즉 사회로부터의 소외는 망상의 형성 및 강화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실제로 조현병 진단을 받고 정신과에 외래로 내원하거나 입원해 계신 분들을 면담해 보면 친구가 한 명도 없는 경우가 한 명이라도 있는 경우보다 더 많습니다. 다른 가족 구성원과도 단절돼 있는 경우가 많죠. 조현병 증상으로 인해 직업 기능에서도 문제가 발생하는 일이 많고, 결과적으로 하루에 말 한마디라도 건낼 수 있는 사람이 없게 됩니다.


인간은 사회적 관계 안에서 자기에 대한 감각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톰 행크스가 주연했던 캐스트 어웨이라는 영화에 보면 무인도에 불시착해 말 건낼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주인공이 배구공에 사람 얼굴을 그려놓고 윌슨이라는 이름을 붙여줍니다. 그리고 정말 친구처럼 대하죠. 윌슨이 없었다면 톰 행크스는 자기에 대한 통합된 감각을 잃어버리고 결과적으로 온전한 의식상태를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사회적 소외가 망상이 형성되고 강화되는 데 영향을 미치면, 강화된 망상으로 인해 사회적 소외가 다시 심해지는 악순환이 발생합니다. 이 과정에서 조현병을 지닌 환자분들이 경험하는 내적 소외도 심해집니다. 우리는 사회 안에 어떤 식으로든 심리적 닻을 내려 자기감을 유지하게 됩니다. 하지만 망상과 사회적 소외는 이 닻을 거두어 올리며, ‘나’라고 하는 배를 망망대해로 흘려보내 결국 사라지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자기에 대한 통합된 감각을 상실해 가는 것입니다.


망상이라는 견고한 신념 체계가 형성되기까지 사회적 소외뿐만 아니라 다른 강화 요인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환자분이 지녔던 피해의식이 자기 결점을 방어하게 하여 인사고과에서 높은 점수를 받고 승진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수도 있죠. 피해망상을 가지고 또 다른 예를 들어볼까요. 무플보다 악플이 낫다고 사회적으로 완전히 고립돼 있는 사람은 자기를 해하려고 쫓아오는 누군가를 통해 사회적 고립을 면할 수 있습니다. 앞서 배구공 윌슨처럼 내게 피해를 주려고 쫓아오는 그 사람이 내가 닻을 내릴 수 있는 사회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현실이 아닌 것에 토대를 둔 자기감은 허공 위에 쌓은 탑이라 무너지기 쉽습니다. 망상을 통해 그나마 자기에 대한 통합된 감각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망상이 지속될수록 자기감을 유지하는 것이 힘들어지게 돼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에 대한 확신조차도 가질 수 없게 되는 내적 소외가 깊어지면 압도적인 혼란감에 빠진 채 자살을 시도하게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극단적인 경우를 떠올려 보면, 조현병에 대한 현대적 개념을 백 년 전쯤 최초로 제시했던 Kraepelin이 오늘날의 조현병을 가리켜 치료가 불가능한 조발성 치매(dementia praecox)라고 일컬었던 것이 조금은 이해가 갑니다.(크레펠린이 dementia라는 단어를 요즘과 같은 의미로 사용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외로 한다면요.) 그는 조현병을 지닌 환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제반 기능상의 저하 양상이 치매 환자들이 경험하는 것과 같은 혼란감과 일상에 만연한 불쾌한 기분, 전반적인 정신의 쇠약 등과 닮아 있다고 느꼈을 수 있겠습니다. 아울러 1900년대 초반에 조현병을 개념 정의하는 데 영향을 미친 또 다른 정신과 의사인 Bleuler가 조현병의 핵심 요소 네 가지 중 autism을 언급한 것도 이해가 됩니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채 공상 세계에 몰두하는 조현병 환자들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autism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 같다는 점에서요.


망상과 사회적 소외가 상호작용하여 내적 소외와 혼란감을 심화시킬 수 있습니다. 조현병을 지닌 환자의 이런 주관적 경험을 일반인이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임상가도 마찬가지죠. 그 누가 진정으로 이들의 경험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현병을 지녔으나 현저한 증상은 현재 나타나지 않는 환자분조차 극도의 소외와 절망을 경험하고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하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


오늘의 글 주제와 관련이 깊은 영상을 링크합니다. 13분짜리 애니메이션인데, 제가 말로 설명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여러분에게 전달할 수 있을 것 같아 첨부해요. 조현병 환자가 경험하는 심리적 고통을 공감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조현병이 예전 정신분열증을 가리키는 새로운 용어라는 것에 대한 인식이 많이 확산된 것 같습니다. 정신분열증이라는 단어 자체에 내포된 부정적 뉘앙스를 제거하고자 정신분열증을 조현병이라는 용어로 대체한 것이죠.


아시는 분도 계실 텐데, 조현 즉 현을 조율하는 데 문제가 생겨서 악기가 제대로 음을 연주하지 못 하는 이미지를 그려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마음이 일종의 악기라면, 조현병은 마음을 조율하는 데 문제가 생겼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도는 지지할 만한 것이긴 하지만 미봉책인 감이 있습니다. 사회적인 편견은 병을 지칭하는 용어를 바꾼다고 해서 쉽게 변화되는 것이 아니죠. 정신장애를 지닌 사람이 이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보다 체계적이고 집중적이며 지속적인 도움이 필요하지만 그것은 이 글의 주제가 아니므로 넘어가겠습니다.


조현병을 진단 내리기 위해서는 1. 망상, 2. 환각(환시나 환청을 포함), 3. 와해된 언어, 4. 와해된 행동, 5. 음성 증상이 필수적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 중 두 가지 이상의 증상이 1개월 이상 뚜렷하게 나타나야 하고, 그 두 가지 증상 중에 한 가지는 반드시 1, 2, 3 중 하나여야 하며, 증상으로 인해 일터나 대인관계를 비롯한 삶의 주요한 현장에서 증상이 나타나기 전과 비교했을 때 현저한 기능 저하가 나타나야 합니다. 뚜렷한 (양성) 증상이 1개월 이상 지속되는 시기를 포함하여 증상으로 인한 장해가 총 6개월 이상 나타나게 된다면 조현병 진단 기준에 부합하게 됩니다.


저는 햇수로 6년, 정신과 이외의 셋팅에서 일한 적도 있으니 실제 활동한 기간으로 보면 3년 6개월째 정신과에서 환자들을 심리평가하고 있습니다. 네. 제가 주로 하는 일은 정신과 의사가 환자를 진단 내리는 데 있어 참고가 될 만한 심리평가 결과를 정신과 의사에게 제시하는 것입니다. 환자의 진단을 명확히 하는 데 도움이 되는 심리평가적 자료를 수집하고, 이를 토대로 환자 마음 상태의 개략적인 윤곽을 그려내는 것이죠. ‘왜 이 환자분이 지금 정신과를 찾게 되었을까?’에 대한 가설(정식 용어로는 사례개념화case formulation라고 합니다)을 만들어 내고, 가설에 비추어 진단을 제시하는 과정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제일 많이 봤던 환자를 꼽으라고 하면 신경인지장애 환자와 조현병 환자를 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이 정신장애 시리즈의 서두를 두 장애가 장식하게 됐고요.


각설하고 다시 조현병 얘기로 돌아오면, 조현병은 원인이 뚜렷하게 밝혀진 정신장애가 아닙니다. 대부분의 정신장애가 원인이 불분명하고 현대 의학이나 심리학을 연구하는 연구자 및 임상가가 이 문제를 풀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조현병도 마찬가지라는 것이죠.


원인이 분명하게 밝혀진 바 없지만, 조현병은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특정 증상들의 집합으로 정의되고 있습니다. 정신과에서 주로 사용하는 진단 체계인 DSM-5에 조현병 진단 기준으로서 앞서 언급했던 망상이나 환각, 음성 증상 같은 필수 요소가 명시돼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런 증상들이 얼마나 지속돼야 하는지에 관한 세부적 지침이 제시돼 있다는 것이죠.


다만 이런 진단 기준에 부합한다 하더라도 조현병이라고 진단 내려진 환자 각각은 저마다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어떤 환자는 망상에 환청과 와해된 언어가 수반되기도 하고, 또 다른 환자는 환청이 심했다가 환청의 빈도가 줄어들자 음성 증상이 심해지기도 합니다. 진단 기준에 명시돼 있는 증상을 지녔다 하더라도 그것이 발생하는 양상은 환자마다 다르니 조현병 환자들은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더 많아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만난 조현병 환자들을 곰곰 떠올려보면 이들의 삶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신의 삶에서 꿈과 희망이 사라지는 데 대한 절망감과 뿌리 깊은 소외감을 경험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국내 한 연구를 살펴보면 조현병 환자의 자살율은 다른 정신장애 환자의 자살율에 비해 높습니다.1) 제 개인적인 경험에 국한될 여지도 있으나, 제가 느끼기에 다른 어떤 정신장애보다도 심한 절망감과 소외감을 경험하는 것이 조현병을 지닌 환자입니다. 다른 정신장애 집단보다 조현병 환자 집단에서 자살율이 높은 것이 제게는 왠지 당연한 결과처럼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앞으로 조현병에 관한 글 몇 편을 올릴 예정입니다. 대학원 때는 실습이 없고 책으로만 정신장애를 배우다 보니 앎의 깊이가 매우 얕았습니다. 지금도 그 깊이가 깊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조현병을 비롯하여 정신장애에 대한 보다 생생한 이해를 여러분에게 전달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정신장애를 지닌 환자에 대한 편견을 불식시키는 데 제가 조금이라도 일조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정신장애 환자이든 암 환자이든 간에, 환자이기 이전에 울고 웃고 고뇌하며 나름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세상을 살아온 평범한 한 사람입니다.


정신장애에 대한 앞으로의 제 기술은 질환을 찾아내 그것을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과정에서 질환의 주체를 소외시키는 입장과는 거리가 있을 예정입니다. 객관과 주관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한 번 해보려 합니다.


ref)


이호선, 이건석, 구재우, 박선철 (2015). 조현병 환자의 자살: 최근 연구결과에 대한 고찰. 대한조현병학회지, 18(1), 5-9.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