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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심리학

한국 임상심리학의 발자취와 전망 / 염태호

by 오송인 2018.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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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2월 임상심리학회 동계 학술대회에서 원로 교수 초청 특강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 장소에서 발표된 내용 같습니다. 

출처는 이 곳입니다.




머릿말


   우리나라에서는 1946년에 한국심리학회의 창립과 활동, 서울대와 중앙대의 심리학과(心理學科) 개설 및 후진 양성을 통해서 한국심리학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당시에는 독일 계통의 실험심리학이 지배적인 풍토였는데, 8.15 광복과 더불어 미국 계통의 응용심리학이 도입되고 있었다.즉, 심리학계에 있어서는 미군정시절(1946-1948)에 재미교포 심리학자 염광섭 박사와 미국인 임상심리장교 Dr, Jones가 국내의 심리학자들에게 임상심리학(臨床心理學) 관련 분야들을 소개하기 시작하였다. 

   국내에서 임상심리학으로서의 전문직 등장은 1960년대 초엽부터 심리학자들이 병원 신경정신과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 그 시초였다. 그리고 이들 의료계 근무 심리학자들의 임상심리수련을 위해서 1964년 11월 [한국심리학회] 산하 [임상심리분과회]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1967년부터 심리학도들이 의과대학 임상심리학 교수 부임과 공사립병원 신경정신과 진출이 활성화 되기 시작하였다. 1972년부터 심리학과에 임상심리학 교수 부임이 시작되었다. 1973년부터 한국심리학회에서 임상 및 상담심리전문가 배출과, 대학원에 임상심리학 석,박사과정 개설과 석,박사 배출이 시작되었다. 1997년부터 학회 공인 전문가는 보건복지부의 국가자격 정신보건임상심리사 1급 및 2급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임상심리학회 회원들의 가속적 증가로 2004년 2월 현재 1천 8백여 명의 대형 학회로 성장해 왔다.


   1961년부터 심리학도들의 임상 현장 진출

   심리학도들이 병원에서 활동을 시작한 1960년대 초엽과 임상심리분과회가 설립된 1964년 당시 국내 대학교 심리학과에 '임상심리학 교수'는 존재하지 않았고, 또한 대학원에도 임상심리학 전공 석사과정 및 박사과정이 개설되지 않았다(정양은, 1972, 2000). 그럼에도 우리 사회의 요청에 부응하여 심리학도들이 이미 육군 현역 임상심리장교로서 복무하고 있었고, 또한 의과대학 및 공사립병원에 심리학도들이 진출하여 임상심리학적인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육군 임상심리장교 

   우리나라에서 심리학자의 임상심리 활동은 육군병원에서 미육군 신경정신과 군의관과 임상심리장교 제도의 도입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즉, 1960년대 초엽에 국방부 요청으로 심리학과 및 교육학과 출신으로 선발된 육군장교들이 미국 월터-리드(Walter-Reed) 육군병원 파견 6개월간 단기교육과정(인턴과정)을 이수한 이후에 국내 육군병원에서 임상심리장교로서 복무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1호는 한명택(韓命澤, 동아대, 파견, '61.8-'62.4)은 제1육군병원('62-'67),  

   2호는 원호택(元鎬澤, 서울사대, 파견, '62.8-'63.4)은 제3육군병원('63-'65), 

   3호는 원호식(元鎬植, 서울사대, 파견, '63.8-'64.4)은 제3육군병원('64-'66),  

   4호 김철수(金哲洙, 서울대 심리학과, 파견, '64.8-'65.4)는 수도육군병원이었다(김영환, 1989 ; 원호택, 염태호, 1986 ; 이현수, 1990 ; 임상심리학회, 1996).


   의과대학 및 공사립병원 심리학자 진출 

   1960년대부터 우리나라 의료계로부터 임상심리학자를 요청해 옴으로써, 심리학도들과 전직 임상심리장교들이 병원 신경정신과에 진출하는 것을 시작으로 한국 임상심리학에 있어서 개척기가 도래하였다. 이를 구체적으로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1962년 12월 안가희(安佳熙, 이화여대)의 국립정신병원(서울) '임상심리과원', 

   1963년  3월 이현수(李鉉洙, 서울대 심리학과)의 국립정신병원 '임상심리과장', 

                   김중술(金重述, 서울대 심리학과)의 가톨릭의대 '임상심리조교', 

                   신동균(申東均, 서울대 심리학과)의 우석의대 '임상심리연구원', 

   1965년 원호택(元鎬澤)과 박상규(朴相圭, 중앙대)의 경북의대 '외래교수', 

             양원숙(梁元淑, 이화여대)의 연세의대 '외래강사', 

   1966년 원호식(元鎬植)은 청량리뇌병원 '임상심리과장', 

   1967년 한명택(韓命澤)의 대구동산병원 '임상심리학자', 

             조신웅(趙信雄, 성균관대)의 국립정신병원 '임상심리과원', 

   1968년 염태호(廉泰鎬, 서울대 심리학과)의 청량리뇌병원 '임상심리과장', 

   1969년 김영환(金榮煥, 경북대)의 가톨릭의대 '임상심리수련생' 

   이 분들이 국내 의료분야에서 활동한 임상심리학자의 선구자들이다(임상심리학회, 1996).


   1964년 11월 임상심리분과회 창설

   상기와 같이 심리학자들이 속속 정신과 임상에서 임상심리학자로서의 현장활동을 시작하면서 이들의 자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자체 교육과 훈련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같은 필요성에 부응해서 창설된 것이 한국심리학회 산하 "임상심리분과회(臨床心理分科會)"였다(원호택, 2000). 분과회 설립 이전에 몇명의 관심있는 교수들의 집담모임이 있어 왔다. 그렇지만 설립 당시 심리학과에 임상심리학 교수는 1명도 없었기 때문에 임상심리분과회는 심리학과를 중심으로 창설되지 못하고 서울대학교의 법정기관인 학생생활연구소가 중심이 되어 1964년 11월 21일에 창립총회를 열었다. 특히, 임상심리분과회의 창립 당시 연구소 소장 김기석(金基錫) 교수(서울대 사범대학)의 적극적인 주선에 힘입은 바가 크다(임상심리학회, 1996 ; 정양은, 1972, 2000). 


   1960년대 후반부터  의과대학(醫科大學) 임상심리학 교수 부임

   1967년 가톨릭의대에 김중술(金重述, 1967-1974) 전임강사, 

             연세의대에 양원숙 외래강사(1967-1976) 

   1971년 고려의대에 신동균 교수(申東均, 1971-2002), 

             경희의대에 원호택 교수(元鎬澤, 1971-1975) 

   1974년 순천향의대에 김중술 교수(1974-1976), 

   1975년 한양의대에 원호택 교수(1975-1982), 

             경희의대에 염태호 교수(廉泰鎬, 1975-2004) 

   1976년 연세의대 양원숙 교수(梁元淑, 1976-82) 

   1979년 순천향의대 노명래 교수(盧明來, 1979-199?) 

   1980년 부산의대 김재환 교수(金在煥, 1980-82) 등이 부임하였다. 

   그후 1996년도 13개 의과대학의 임상심리학 교수, 그리고 14개 대학병원에서 임상심리학자로서 활동하였다. 이는 후학들이 대학병원 및 기타 임상현장에서 전공교육과 실습교육의 터전이 마련되었음을 의미한다(임상심리학회, 1996).


   1972년 심리학과(心理學科) 임상심리학 교수 부임

   2000년 9월 기준으로 전국 심리학과의 재직 교수는 179명이다. 국내 심리학과 중 임상심리학 교수 부임은 1972년에 중앙대의 이현수 교수(李鉉洙, 1972-97)가 1호였다. 이를 시작으로 2000년도에는 20개 심리학과에 총 26명의 임상심리학 교수들이 재직하였다. 이 중 외국 박사 교수가 8명, 국내 박사 교수가 18명이었다. 이들 26명이 앞으로 한국 임상심리학을 주도적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 이외에 상담심리학 교수는 13명, 건강심리학 교수는 2명, 재활심리학 교수는 1명이다. 그러나 각 심리학과에 임상심리학 교수 거의가 1명씩일 뿐이고, 일부는 2명 또는 3명의 학과도 있으나 이들은 전국 각처에 분산되어 있는 것은 고도의 전문적 수련을 요구하는 임상심리전문가 양성에 문제가 있다. 우리나라의 현재 제도로서는 어떤 학문이든 발전하려면 대학원이 충실해야 한다. 일제 시대에는 대학원에 진학하지 않아도 강좌 주임 교수의 승인만 얻으면 유급 또는 무급의 조수로 교실에 남아 공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식 교육을 따온 우리 대학교에서는 대학원생이 아니면 학교에 남아 공부를 계속할 명분이 없고 또 그와 같은 무적자를 학교에서 책임지고 받아들일 수도 없다. 그러므로 어떤 학문이든 발전하려면 대학원이 충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심리학의 어떤 분야이던 간에 1명 내지 2명의 전공 교수로는 충실한 대학원 과정을 운영하는 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최근에는 어떤 특정 심리학과는 특정 심리학 분야를 집중적으로 전담하는 분업 형태를 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예를 들면, 어떤 특정대학 심리학과는 임상심리학을 집중적으로 강화하여 그에 따라 교수진을 재정비하여 학생들에게 충실한 임상심리학 교육을 실시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구상은 행정적인 문제가 야기됨으로 일거에 실시하기에는 어렵지만, 각 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들은 고려해 볼만 하다고 생각된다(정양은, 2000).


   1973년 임상심리전문가 및 1997년 정신보건임상심리사

   임상심리분과회는 1964년 창설된 이래  임상심리전문가와 상담심리전문가 자격증 제도를 마련하여 1971년 한국심리학회의 이름으로 공포된 이래 1973년부터 제1회 자격시험과 심사를 거쳐서 전문가 자격증을 부여하기 시작하였다. 


   1973년도 한국심리학회 제1회 "임상심리전문가" 자격 취득자 7명 

   1호는 김성태(金聖泰, 고려대 교수), 

   2호는 이현수(李鉉洙, 중앙대 교수), 

   3호는 김중술(金重述, 가톨릭의대 교수), 

   4호는 신동균(申東均, 고려의대 교수),  

   5호는 원호택(元鎬澤, 경희의대 교수), 

   6호는 한명택(韓命澤, 대구동산병원), 

   7호는 염태호(廉泰鎬, 청량리뇌병원)였다. 

   이들을 한국 임상심리학의 1세대로 본다(원호택, 2000). 그후 전문가는 1999년에 176명(김정규, 1999), 2002년에 243명(오상우, 2002 ; 임상심리학. 안창일 편저, 2002. 42-46쪽), 2003년도에 270명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임상심리학회 총회원수가 1806명(남 303명, 여 1503명)으로 폭증하였는데, 그 중 1천 5백명 정도가 수련생과 대학원생이었다(한국임상심리학회, 2004년 1월 현재). 

   2004년 9월 현재 한국심리학회 임상심리전문가는 316명과 임상심리사는 329명으로 증가, 

   보건복지부 정신보건임상심리사 1급은 326명 및 2급은 518명으로 증가되었다. 

   그리고 임상심리학회의 총회원수는 1914명으로 증가되었다고 한다.


    1973년도 제1회 "상담심리전문가" 자격증 취득자 6명 

    1호는 김기석, 2호는 이상로, 3호는 최정훈, 4호는 진위교, 5호는 홍성화, 6호는 한덕웅("임상심리학회30년사". 1996. 228쪽, <표 20> 임상 및 상담심리전문가 명단). 그 이후의 상담심리전문가 배출은 '상담 및 심리치료학회'에서 전담하고 있다.


   정신보건임상심리사 

   1995년 12월에 국회를 통과한 정신보건법이 1997년부터 발효됨에 따라서 학회 공인 임상심리전문가와 임상심리사의 신분이 건국 이래 처음으로 정신보건임상심리사 1급 및 2급 자격으로 변화되기에 이르렀다.  


   1980년대 정신의학의 변화와  임상심리학의 변화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신의학 분야에서는 정신 역동적인 정신의학이 쇠퇴하면서 생물 정신의학 쪽으로 급격히 선회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여파로 정신과 임상에서 임상심리학자들의 자리가 위축되게 되었다. 새롭게 임상심리학자를 필요로 정신과 병원은 줄어 들었고, 그 업무기능도 많이 제한받게 되었다. 즉, 정신과 병원에서 심리치료의 선호가 사라졌고 임상심리학자에게 더 이상 심리치료를 허용하지 않는 병원이 많아졌다(원호택, 2000). 한국심리학회에서 자격증을 취득한 임상심리전문가와 보건복지부에서 자격증을 부여받은 정신보건임상심리사가 근무하는 직장들은 대략 5개 분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는 각 대학교의 심리학과 및 관련 학과의 교수집단이다. 둘째는 의과대학 소속의 임상심리학 교수집단이다. 셋째는 의과대학 부속 병원 근무자집단이다. 넷째는 일반 정신병원이나 개인정신과 의원 근무집단이다. 다섯째는 각종 연구기관이나 봉사단 종사집단이다(정양은, 2000). 그런데, 한국심리학계는 1980년을 전후로 기존 심리학과와 새로 증설된 심리학과에서  석,박사 과정 개설이 증가했는데, 특히 임상심리학 전공 학생들의 증가가 뚜렷하며, 임상심리학의 교육과정 역시 정신 역동적 입장보다는 인지 행동적 입장의 연구기법과 치료기법에 관한 교육을 강화하는 쪽으로 선회하였다. 또한 심리평가 기법에서도  전통적인 평가 이외에도 개별 증상에 대한 인지 행동적 평가는 물론  뇌와 행동과의 관계에  대한 신경심리학적 평가를 하는 심리검사 도구의 개발과 연구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으로 바뀌어져 왔다. 그 결과로 1985-1996년 사이에 임상심리학 전공 박사학위 취득자 30여 명의 학위논문 가운데 3분의 2 이상이 심리장애의 인지 행동적 측면에 관한 연구였고, 건강심리학이나 행동의학 등의 분야로 영역을 확대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1990년대 임상심리전문가와 정신보건임상심리사 

   1990년대 초엽부터는 직업 창출의 일환으로 심리상담 서비스를 위한 개업 임상심리학자들이 생겨나는 동안에 1995년 12월 국회를 통과한 정신보건법의 시행령이 1997년부터 발효됨에 따라 임상심리학자들이 보건복지부에서 자격증을 발급하는 정신보건임상심리사 1급 및 2급 신분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정신보건임상심리사 자격 취득을 위한 국가공인 수련기관은 2002년에 전국적으로 56개이며, 그간에 1급 자격 취득자는 247명과 2급 자격 취득자는 384명에 이르렀다(오상우, 2002). 이같은 임상심리학도의 신분변화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눈에 띄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학회로서는 국가정책적인 정신보건임상심리사 1급과 2급 제도를 수용하는 한편 종래와 같은 한국심리학회 공인 임상심리전문가 자격증 제도를 계속해서 병행하여 유지하고 있다(임상심리학회, 1996). 그 이유는 한국심리학회 임상심리전문가 자격의 기본 정신은 전문가들이 의사와 같은 수준으로 대우받도록 허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보건복지부 방침은 석사학위가 아닌 심리학 전공 학사로서 수련기관에서 1년간안 실습수련을 거친 수료생들을 대상으로 임상심리사 2급 자격을 부여하는 양산정책을 통해서 전국 정신보건센터에 투입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정부정책은 자칫 심리학과를 자격시험 준비기관으로 타락시킬 우려가 있다. 그런 우려의 구체적 증거가 법과대학이다. 현재 전국의 법과대학들은 사법시험 준비기관이 되어 법학이란 학문이 쇠퇴하다싶이 한 반면에 산골짝에 있던 고시촌들이 이제는 대도시의 고시원들로 바뀌게 되었다. 최근의 임상심리학계에 있어서는 또 다른 중요한 변화의 조짐은 한국심리학회가 주관하는 임상심리전문가 자격규정을 국가기관에서 공인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임상심리사 자격증은 보건복지부에서 주관하는 정신보건 업무에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임상심리학자의 광범위한 역할과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되는 것으로서 임상심리사의 독립적인 활동을 더욱 촉진하게 될 것이다(원호택, 2000).


   임상심리학자의 개업 활동

   정신의학 분야에서는 임상심리학자에 의한 심리치료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2000년대로 들어선 현재 정신과 임상에서 임상심리학자의 위상은 전반적으로 1970년대보다도 위축된 상태임을 부인할 수 없다. 특히 심리치료는 더욱 부정적으로 되고 있다. 근래에는 정신과 환자에 대한 재활심리치료와 인지행동치료를 임상심리학자를 비롯하여 정신보건요원에 의해 시술하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다. 그런데 국내 정신과에서는 이러한 추세를 외면하고 있다. 이러한 여건에서 1980년대부터 임상심리학자들이 독자적인 전문성을 살리는 길을 스스로 강구하는 노력이 시작되었다. 즉, 심리치료 및 상담연구소를 시중에 개설하기 시작한 것이다. 1990년대부터 개업활동이 눈에 띄게 늘어나는 현상이 주로 서울에서 서울인지치료상담센터 등을 비롯하여 10여 군데, 그리고 대구와 부산 등에서 개업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서서히 늘어나는 추세다(임상심리학회, 1996). 1996년 이후 정신보건임상심리사의 자격을 갖춘 전문가들이 정신재활치료센터를 개설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심리클리닉은 비록 작은 출발이지만 임상심리학의 발전이란 견지에서 보면 큰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기관에서는 임상심리학자의 본연의 기능과 역할 수행 뿐 아니라 임상심리학자에 의한 임상심리사의 전문훈련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원호택, 2000).  앞으로 임상심리학도들의 개업활동이 더욱 더 많아지는 양적인 발전은 물론이고, 그 이상으로 다양한 형태의 모든 내담자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질적인 발전이 있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임상심리학의 전망


   임상심리학 석,박사 배출 

   1996년도 심리학과 대학원에 임상심리 전공 과정이 개설된 곳은 17개 학과였고, 배출된 석사는 300여 명을 넘어섰으며, 임상심리학 박사는 80여 명이었다. 그리고 임상심리학회 회원 자격을 갖추게 되는 각 대학별 임상심리 석사 및 박사를 배출한 1996년까지의 실적에서 고려대 심리학과가 압도적으로 다수인데, 임상심리학 석사는 91명과  임상심리학 박사는 18명이었다(임상심리학회, 1996). 특히 고려대에서는 안창일 교수의 지도하에 2002년 현재 배출된 임상심리학 박사가 24명, 임상심리학 석사는 70여명일 만큼 고려대는 임상심리학 인력 양성에 앞장서고 있다(안창일, 2002).   


   심리학과 임상심리학 교수실태 

   고려대 심리학과는 임상심리학 교수를 2명 두었지만 어차피 대학원 과정에서는 임상심리학을 보강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심리학과 대학원이 특성화되는 조짐이 된다면 심리학의 발전을 위하여 바람직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임상심리학 석사와 박사들은 현재 정신과 병원, 정신보건소 또는 대학의 학생상담연구소 등에서 전문 직업인으로 근무하고 있고, 그 일부는 사설 연구소를 개설하여 정신병이나 기질성 정신장애를 제외한 일반인 내담자들을 대상으로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심리상담 관련 업무에 종사하고 있다. 이처럼, 임상심리전문가들이 정신건강을 해친 사람들을 도와주는 제도가 정착되면 그 만큼 우리 사회의 부정적 측면이 치유되어 건전한 사회를 이룩하는데 심리학이 공헌할 수 있을 것이다(정양은, 2000).


   임상심리학 석사, 박사, 전문가의 현저한 증가 

   1986년도 조사에서 임상심리학회 정회원이 50명 남짓, 임상심리전문가가 20명 남짓, 임상심리학 박사가 8명이었는데, 10년 후인 1996년도 조사에 의해서 임상심리학회 정회원이 400명을 넘어선 것은 회원수가 8 배로 늘어난 것이고, 임상심리전문가가 100명을 넘어선 것은 6배 가까이 증가한 것이고, 임상심리학 박사는 10 배나 증가한 것이다. 이 숫자만 보아도 기하급수적 증가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1980년대 미국심리학 현황을 이야기하면서 헬센(Hersen) 등은 미국의 경우에 임상심리학이 지난 30년 동안에 폭발적인 발전을 했다고 표현하였다. 우리의 현실을 그 정도는 아니라 하더라도 이제 폭발적인 발전의 기틀이 마련된 상태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원호택, 2000). 이러한 예측처럼, 2004년 현재 임상심리전문가 자격 취득자는 300 명에 가까워졌다. 


   임상심리학회의 학술활동과 연구업적 

   임상심리학회 학술활동은 1960년대 "임상심리분과회" 시절 및 1970년대 "임상 및 상담심리분과회" 시절과 전혀 다르게, 1980년대 후반부터 "임상심리학회"는 임상심리학의 이론을 학습하던 단계를 벗어나서 임상 현장에서 요구되는 또는 임상장면에서 경험한 결과를 발표하는 워크숍, 심포지움, 학술 발표회 형식의 학술활동, 임상심리 수련생들을 위한 교육활동 등에 치중하는 방향으로 선회하였다. 뿐만 아니라 [한국심리학회지 : 임상]의 꾸준한 발간을 통해서 나타난 임상심리학회 회원들의 다양한 학술적 연구업적들은 '임상심리학의 꿈은 이루어진다'는 징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회원들은 로마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듯이 현실적 어려움들을 장기적 안목으로 극복할 저력을 함양하기 위해서 임상심리학회 활동에 적극 동참하는 것이 살아 남는 길일 것이다. 


   세대교체, 어두운 측면과 밝아보이는 측면 

   서기 2000년을 전후로 임상심리학을 독자적으로 공부해 온 이른바 제1세대들이 차츰 교육 일선에서 물러나기 시작하였다(정년퇴직 : 이현수/중앙대, 원호택/서울대, 신동균/고려의대/, 김중술/서울의대, 염태호/경희의대). 그러나 앞으로 후학들은 임상심리학자에 의해서 배우고 수련받는 임상심리 전공자들이 활동영역을 넓혀 가면서 발전을 가속화 시킬 것이다(원호택, 2000). 예컨대, 서울대는 원호택 교수의 1999년 정년퇴임 이후 권석만, 최진영 및 이훈진 3명이 합류한 것은 앞으로 우리 분야의 발전을 촉진할 것으로 기대가 된다. 반면에 불행한 일은 그간 있어 왔던 의과대학 임상심리학 교수직이 없어져간다는 사실이다(연세의대, 부산의대, 경북의대, 영남의대, 순천향의대, 이화여대). 그런가하면, 이를 보상하듯이, 2003년 5월 서울인지치료센터가 주식회사 형태(마음사랑)로 발전되어서 심리학도들의 다양한 사회봉사활동, 연구개발, 출판사업 등을 추진한다는 사실, 그밖에도 많은 임상심리학도들이 도처에서 착실한 개업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앞으로 우리들의 나아갈 길을 안내해 주는 반가운 조짐일 것이다.


   국가 기술 자격 임상심리사 1급 및 2급 신설 

   2000년대에 들어서서 임상심리학은 정신보건 분야와 관련된 활동의 계속은 물론이고, 또한 국가정책적인 요구에 부응하여 개인의 삶의 질을 향상하고 각종 사회문제의 방지 및 국민의 건강을 보호하고 증진하며, 상담을 통한 치료, 재활을 위한 전문인력의 양성이 필요하여 2002년 7월부터는 전문사무 분야로서 임상심리사 1급과 2급이 국가 기술 자격으로 신설된다. 이로써, 우리나라에서 임상심리학자들의 활동 영역이 폭넓게 확대될 것이라고 본다(원호택, 2000 : 오상우, 2002).


참고문헌

김영환(1989) : 임상심리학 원론. 서울 : 하나의학사.

대한민국학술원(2000) : 한국의 학술연구. 인문 사회과학편 제1집. 

               심리학-임상심리학회(정양은, 2000, 80-90쪽).

대한민국학술원(2000) : 한국의 학술연구. 인문 사회과학편 제1집. 

               심리학-한국 임상심리학 연구(원호택, 2000, 183-193쪽).

안창일 편저(2002) : 임상심리학. 제2장 임상심리학의 역사(오상우, 2000, 21-49쪽). 

               서울 : 시그마프레스.

염태호(1984) : 한국임상심리학의 발자취. 1984년도 제3회 심리학연수회 교재, 1-42.

원호택, 염태호(1986) : 한국임상심리학의 연혁. 고려대학교 행동과학연구. 제8권. 109-117.

이현수(1990) : 임상심리학. 서울 : 박영사.

임상심리학회(1996) : 임상심리학회 30년사. 서울 : 하나의학사. 

정양은(1972) : 한국의 학보. 인맥으로 살펴본 한국의 학계-심리학계. 대한일보.

한국심리학회 편저(1996) : 한국심리학회 50년사. 서울 : 교육과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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