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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심리학/심리평가

로샤 검사: 주관과 객관 사이에서

by 오송인 2018.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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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로샤 검사에 대한 신뢰가 있습니다. 이 검사에 대한 흥미가 많았고 개인적으로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항간에서는 로샤 검사가 객관성이 없고 그런 연유로 미국에서는 이 검사를 사용하지 않는 추세라고 말하며 로샤 검사의 무용함을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의 맹점이 있습니다. 세상 그 어떤 검사도 완전히 객관적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질문지 개발 과정 자체만 봐도 그렇습니다. 질문지 개발 초기의 문항 선정 과정에서 이미 주관이 들어갑니다. 시중에서 널리 쓰이는 질문지를 모아놓고 그 중에 몇몇을 추려 약간 변형합니다. 질문지가 측정하려는 것에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문항을 새롭게 만들어내기도 하죠. 그리고 통계를 돌려서 요인구조 등을 분석하고, 요인구조에 포함되지 못 했다 하더라도 질문지 개발자가 보기에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문항은 살아 남습니다. 그렇게 모은 문항들을 다른 전문가들에게 감수를 받기도 합니다. 질문지 개발(혹은 척도 개발)은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어찌 주관성이 개입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많이 쓰는 MMPI 개발 과정도, 제가 자세히 알지는 못 하지만 이와 별반 다를 것 같지 않습니다. 이론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경험에 근거한 문항 선정이었다고 하더라도 다른 문항이 아닌 그 문항, 그 문장, 그 단어를 선택한 것 자체가 주관의 개입이니까요.


설령 로샤 검사가 MMPI 등에 비해 객관적 데이터가 부족하다고 한들 그게 이 검사의 무용함을 주장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MMPI에서 임상척도나 재구성임상 척도, 내용 척도 등등이 모두 정상 범위로 나왔으나 로샤 검사에서 환자의 상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여러 결과를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일례로 반응 수가 적절하다면 로샤 검사는 사고장애 감별에 매우 유용한 도구입니다. 정신과 장면에서 로샤 검사의 반응 수가 14개가 안 되는 경우가 14개 이상인 경우보다 체감상 더 많고, 구조적 해석을 하기에 반응 수가 적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TDI 채점 체계를 통해서 환자가 지닌 사고의 이상을 확인하는 경우도 종종 있죠. 숙련된 전문가인 경우 굳이 로샤 검사가 아니어도 인터뷰상에서 사고장애를 감별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최소한 경험을 쌓고 있는 전문가에게 로샤는 든든한 지원군입니다.


로샤 비판자들의 말처럼, 내가 지금 채점을 정확하게 한 것인지 의문이 들 때가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더욱이 구조적 요약의 결과가 어떤 변인과 계산법에 의해서 도출되는지 아는 경우 자기가 보고 싶은 결과가 나오게 채점할 수도 있죠. 그 과정이 의식적이진 않다 하더라도. 현대 과학은 관찰자가 개입하는 즉시 관찰대상이 변화한다는 것을 알려줬습니다. 객관적인 실체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에 우리가 다가가려고 하는 순간 그 객관성은 주관성의 영향에 의해 변화하게 마련입니다. 심리평가 자체가 객관과 주관을 오가는 정교한 작업이기 때문에 보다 객관적인 검사를 쓰는 것이 좋다는 주장은 사실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 검사가 있다 한들 해석 과정에는 반드시 평가자의 주관이 개입되게 마련이니까요. 저는 HTP 검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보고서를 다 쓴 뒤 마지막으로 한 번 참고하는 정도로만 봅니다. 상대적인 중요도가 떨어지는 검사지만 저는 이 검사가 여전히 쓸모가 있다고 여깁니다. 객관성이 떨어지는 검사지만 환자에 대한 전반적인 인상을 그리는 데 매우 유용하기 때문입니다. 


오랫 동안 쓰이고 있는 검사들은 그것이 낡고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보일 때조차 누군가에게는 그 유용성을 발휘하게 마련입니다. 사실 도구보다 더 중요한 게 그 도구를 사용하는 사람의 숙련도와 경험치라고 생각합니다. 데이터에 근거하여 평가하는 것이 맞지만 데이터가 내담자를 이해하는 통로로 사용되기 위해서는 평가자의 주관과 직관이 필요합니다. 평가자의 주관과 직관이 신통치 않다면 어떤 객관적인 검사를 사용하더라도 내담자에 대한 의미 있는 이해를 전달하지 못 할 것입니다. 누군가는 컴퓨터가 심리평가자의 자리를 꿰찰 수 있다고 보지만, 과연 그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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