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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심리학/상담 및 심리치료

심리치료의 출발점

by 오송인 2018. 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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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냐 바이런이라는 영국 임상심리학자의 심리치료 픽션을 읽고 있다. 왜 소녀는 다섯 살 난 동생을 죽였을까? 라는 흥미로운 제목을 단 번역서로 국내 출판돼 있다. 영미권에서 매우 히트친 스테디셀러라 하는데, 과연 올리버 색스 수준의 깊이와 필력을 보여주고 있고, 무척이나 재미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참 많은 생각이 교차하고 있다.


이전에도 티스토리 블로그에 이와 비슷한 글을 쓴 적이 있지만, 정신과적 진단과 분류체계의 한계는 너무나도 명확하다. 정신과적 진단과 분류체계 그리고 그에 근거한 약물치료의 효용은 증상을 가라앉히는 데 도움이 될 뿐 근본적인 치료로서는 한계가 많다고 생각한다.


정신장애를 지닌 환자의 경우 약물치료에 심리치료가 병행이 되는 것이 최선이라고 여기지만, 심리'치료'라는 말 자체에 대한 의구심도 사실 든다. 자의든 타의든 심리치료를 받으러 오는 사람의 1/3은 개선을 보인다. 치료가 됐다고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1/3은 별 차도가 없고 1/3은 점점 악화된다는 게 임상가들 사이의 암묵적 통설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데 치료 효과가 나타나는 1/3도 그 개선이 얼마나 지속되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어렵다. 심리치료를 하는 임상가는 그들 인생의 매우 일부만을 함께 할 뿐이다. 후일담을 들어볼 기회는 거의 없다. 치료가 됐다고 생각한 그들이 정말 치료가 된 것이 맞나? 치료된 이들 중 몇 퍼센트나 재발하지 않고 해피엔딩을 지속할까? 한 병원에서 3년을 근무하다 보면 퇴원했던 환자가 재입원하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목도하게 된다. 그럴 때마다 인생은 근본적으로 고통이고, 해피엔딩은 허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재입원한 환자든 일반인이든 간에 고통스러운 인생의 여정을 묵묵히 걸어가는 한 사람일 따름이다.


나는 임상심리를 전공하기 전부터 미셸 푸코라는 프랑스 철학자의 팬이었다. 권력 개념에 대한 푸코의 정의는 여전히 모호한 면이 많지만, 최소한 이상과 정상을 가르는 기준이 한 시대의 통념을 반영하고 있고 이 통념이라는 것이 힘의 우위 혹은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기능을 할 때가 많다고 보는 그의 견해에 동의하는 쪽에 가깝다. 이데올로기를 설정하는 어떤 주체나 권력자를 상정하지 않는다는 점은 푸코 철학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분명하다. 정상과 이상의 구분이 '치료'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치료적인가? 타나 바이런은 "사실 '치료'라는 말은 정신 건강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도와야 할 때는 별 쓸모가 없는 단어이다"라고 말한다. 임상가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우리가 모두를 다 도울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말한다. 환자나 내담자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은 그게 약물치료든 인지행동치료든 정신분석적 치료든 간에 다 써보되, 임상가로서의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치료가 되지 않는 환자 곁에서 그저 묵묵히 지켜봐야 하는 순간들이 오히려 더 치료적인 순간일 수 있다. 임상가와 환자라는 권력 관계에서 벗어나 인간 대 인간으로 온전히 마주하는 그 순간이.


증상이나 징후는 정신적 고통에 직면한 한 인간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 결과로서 이해해야 한다. '역기능적', '부적응적'이라는 기술적 용어조차 타냐 바이런의 시각에서 보면 환자를 공감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반치료적 용어일 뿐이다. 자살시도나 자폐적 공상으로의 철수조차 '그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일지 모른다. 그러한 시도를 역기능적이거나 부적응적인 대처라고 서술하는 것은 어쩌면 정상/이상이라는 도식을 벗어나지 못 한 임상가의 오만일지 모른다.


정신장애이든 신체적 장애이든 간에 장애를 지니거나 지니지 않는 것은 우연에 가깝다. 개인의 의지와는 무관할 가능성이 높다. 정신장애를 지니지 않았다고 해서 정신장애를 지닌 사람에 비해 우월하다고 볼 근거는 전혀 없다. 더욱이 정상인 우리는 어떤 면에서는 다들 미친 사람이다. 불완전하고 한계가 많은 인간일 뿐이라는 점에서 정신장애를 지닌 사람과 정신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이 하등 다를 바 없다는 것, 이를 뼛속 깊이 각인하는 것, 치료의 시작은 여기서부터일지 모르겠다.


스팀잇에 동시 게재된 글입니다. url: https://steemit.com/kr-psychology/@slowdive14/5qgy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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