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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일상

스크랩 헤븐

by 오송인 2006. 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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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취의 다른 말에 지나지 않는 임금노동과 그것을 지속 가능케 하는 소비사회의 선전술, 이 강제된 필연성의 자연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실제적인 죽음을 의미한다. 반사회적이라 규정되어진 일탈 행위는 이미 내면에 프로그램화 되어 있는 두려움과 공포로 인해 정상궤도로 복귀하는 수순을 밟게 되며, 이것이 성공하지 못했을지라도, 기어이 체제의 룰을 벗어나 잃어버린 나를 찾으려 하는 사람에게는 국가의 포획장치가 가동되기 마련이다. 소수자들의 지배와 이윤을 가능케 하는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 노예의 삶, 분초를 다투며 뼈빠지게 일하지만 정작 자신의 삶은 죽을 때까지 유예하기만 하는 가혹한 운명을 받아들이기 싫은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공리계 안에 피난처는 없다. 부랑자나 노예 둘 중 하나의 선택을 강제당한다.

<스크랩 헤븐>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체념과 굴종의 정서로 점철된 영화이다. 같은 감독의 전작인 <식스티 나인>은 영화보다 무라카미 류의 원작을 먼저 봤고, 원작이 유쾌함 속에서도 놓지 않았던 성찰적인 회고의 시선이 배제된 오락거리로서의 영화에 충실했다는 견해에 동감하는 바이다. 하성태의 글을 읽어 보자.
'무라카미 류'의 원작과 69년이라는 무거운 시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감독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되지만 영화가 놓친 것은 무라카미 류가 소설 속 에필로그에 담아놓았다.
"그러나 어느 시대 건, 선생이나 형사라는 권력의 앞잡이는 힘이 세다. 그들을 두들겨 패보아야 결국 손해를 보는 것은 우리쪽이다. 유일한 복수 방법은 그들보다도 즐겁게 사는 것이다. 즐겁게 살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싸움이다. 나는 그싸움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69 식스티 나인>은 즐겁게 살자고 독려하기만 할 뿐 어떠한 싸움의 에너지는 전혀 보이지 않는 그저 발랄한 '청춘영화'가 되어버렸다. '상상력은 권력을 쟁취한다'라는 '68혁명'의 대표적 구호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스크랩 헤븐>에서도, 감독이 의도한 바라고는 볼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이러한 조소가 이어지고 있다. 정의구현이라는 이상과는 한참 동떨어진 답답한 관료체계 속에서 일탈을 꿈꾸던 소심한 풋내기 경찰관 싱고는 젊은 혈기의 행동파 테츠에게 감화되어 그와 함께 복수대행업을 시작하며 자신의 이상을 구현하려 한다. 의료사고를 내고도 그것을 은폐하려 하는 병원 원장에 대한 복수 따위가 그들이 받는 의뢰의 일례이며, 죽지 않을 정도로만 엿먹이는 데 있어 이 두 사람은 환상의 콤비플레이를 펼친다. 한편 테츠에게는 오움진리교 사린 가스 테러로 인해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아버지가 있다. 그의 아버지는 육체적으로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지만 일터에서 방해물 취급을 받게 돼 사건 후 1개월 만에 평생을 몸 바쳐 일해 온 회사를 떠날 수밖에 없었고, 후유증 때문이 아니라 친구나 동료에게 버림받았다는 충격으로 인해 미쳐 버렸다는 게 테츠의 설명이다. 그는 아버지의 인생을 두고 쓰레기라고 말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자살은 그의 인생 또한 마찬가지라는 비관을 선명하게 자기인식시키며 사건을 어둡게 몰아간다.(테츠가 왜 아버지의 인생을 그렇게까지 비하시켰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간에 처음부터 테츠는 자신의 아버지를 매몰차게 추락시켜 버린 체제의 야만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그에 복수하려 했던 게 확실하다.)

"상상력이 있으면 나도 이 세상도 좀 제대로 굴러갈 거라고 생각해" 라며 테츠를 따르던 싱고는 사건이 의외의 방향으로 비화되고 그로 인해 사상자가 발생하자 유희와도 같았던 이상실현의 좌절에, 혼란에 휩싸이며 자살을 택하게 되는데 농담과도 같은 우연에 의해 그의 자살 또한 실패를 겪게 된다. 나는 이 마지막 씬에서 이상일 감독의 관점을 알아챌 수 있는 실마리를 잡았다. 내게 있어 레퍼토리나 다름없는 순진한 체제 진단으로 이 잡담을 시작했던 이유는 그가 만든 일련의 두 작품에서 굉장히 보수적인 색채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영화를 이런 식으로 읽는 방식 좋아하지 않지만,<식스티 나인>에서 <스크랩 헤븐>으로 이어지는 '상상력 예찬'은 자본에의 굴종의 길을 걷고 있는-어느 것하나 바꿀 수 없는 무산 대중의 무기력함에 대한 명백한 조소가 아닐까 한다. 하지만 "테츠에게 들은 '상상력이 없다'는 말을 형사과의 고참형사에게서 똑같이 듣게 되는 싱고의 아이러니. 그것이 싱고의 현실이자 우리의 현실이다." 라는 어떤 분의 언급이 의미하듯 이것은 스스로에 대한 믿음의 상실에서 연유하는 자기조소적 성격이 짙다. 테츠와 끝까지 함께 갈 순 없었던 싱고의 머뭇거림은 우리 세대의 자화상에 다름 아니다. 희미하게나마 다른 세상을 꿈꾸지만, 삶이 임금노동이라는 타율에 전적으로 포획되어 자신감을 완전히 상실한 채 초월의 역사를 살고 있는 우리들 말이다.

이 세계는 결코 변하지 않을 거야.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며 사는 건 바보 같은 짓인 걸. 어느 순간 마음 속으로 그렇게 되뇌고 있는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만큼 끔찍한 일이 있을까. 하나 있다면 신념 없는 비자본주의적 삶? 이거야 말로 이도저도 아닌 완전한 패배이다. 나는 내 삶을 축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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