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SM-5 같은 진단 체계는 양날의 검 같은 것이라, 치료진이 환자의 특성을 이해하고 치료 방향을 잡는데 매우 유익한 도구가 되기도 하지만, 환자를 라벨링하는 도구로 오용될 수 있는 여지도 다분하다. 환자의 삶이 지닌 구체성에서 멀어질수록 오용 가능성은 커지게 마련인데, 올리버 색스가 경계하는 것도 그런 부분인 것 같다. 이 사람의 글을 읽다 보면 그가 환자를 이해하기 위해, 그것도 듣도 보도 못한 그런 희귀병을 지닌 환자를 이해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많이 썼는지 느낄 수 있다. 환자가 지닌 병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은데, 무지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환자가 살아가는 환경 속으로 들어가서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 임상가가 된다는 것이 단순히 직업을 갖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소명의식을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과도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 것임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소명의식이라는 게 하나님의 계시 같은 것을 받아서 하루 아침에 생기는 것은 당연히 아닐 테고, 올리버 색스 같은 의사의 행동을 지향점으로 삼아 하루하루 성실한 자세로 임하다 보면 조금씩 생기지 않을지. 나는 주로 치료라는 행위가 함의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이 책을 읽었지만, 환자 입장이 되어 읽어 보아도 좋은 책임에 분명하다. '몸이 없는 크리스티너'나 '익살꾼 틱 레이' 같은 사례는 자신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질병에 맞서는 처절한 투쟁의 기록이다. 인간은 한없이 저열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누구나 이런 환자들이 보여준 고귀함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그들을 어떤 틀에 끼워맞춘다든지 시험하려는 시도를 버려야 한다. 그 대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알려고 해야 한다. 마음을 열고 조용히 관찰해야 한다. 일체의 선입견을 버리고 겉으로 드러난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로 대해야 한다. 그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생각하며 둘이서 조용히 무얼 하고 있는지를. 설령 그 모든 것이 기묘하게 여겨질지라도 오히려 공감하는 마음의 자세로 지켜보아야 할 따름이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겠지만, 거기에는 무엇에도 비길 수 없을 신기한 것이 숨겨져 있다. 그것은 필시 근원적이라 해도 좋을 만한 어떤 힘이요, 심연이다. 그들을 안 지도 벌써 18년이 되었지만 내겐 여전히 '풀지 못한'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3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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