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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심리학/정신병리

내가 죽기 전에 가장 듣고 싶은 말(2017)

by 오송인 2018.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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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벽두에 본 영화인데 굉장히 스토리가 엉성하고 결말도 진부하다. 진부하고 세속적인 것을 얼마나 진부하지 않게, 신선하고 색다른 관점으로 풀어낼 수 있느냐를 평가 기준으로 본다면 이 영화에는 매우 낮은 점수를 줄 것이다. 


가운데 앉아 있는 저 해리엇이라는 영화 속 주인공이 자기애성 성격장애의 면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내현적 자기애라기보다 상당히 외현적이고 오만한 병리적 자기애를 지닌 캐릭터다. 영화 속에서는 해리엇의 딸이 엄마를 비난하며 '엄마처럼 나도 강박성 성격장애 진단을 받았어요' 라고 냉소하는 장면이 있는데, 강박성 성격장애를 지닌 사람은 해리엇처럼 나만 잘났고 다른 사람은 멍청이기 때문에 혼자가 되는 상황을 택하지 않는다. 그렇다기보다 자신의 엄격한 규칙과 기준들 안에 갇혀 지내다보니 다른 사람과 친해지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상황에 더 가까운 것 아닐지. 


아무튼 해리엇은 자신의 부고 기사도 아름답게 포장되기를 바라며 부고 기사만 전문적으로 쓰는 기자인 앤(아만다 사이프리드)을 고용한다. 앤은 해리엇의 지인들을 인터뷰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하나같이 해리엇에 대한 매우 부정적인 관점과 태도다. 해리엇은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어렵고, 이에 자신이 추론해 낸 아름다운 부고 기사의 네 가지 요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앤과 어떤 일들을 모의하게 된다. 그러면서 영화가 전개된다. 


해리엇은 오랫동안 왕래가 없던 딸을 보고자 하는데 그 이유도 '자기'가 좋은 엄마였는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함이다. 자연스럽게, 정말 오랜만에 만난 딸에게서도 등돌림을 당한다. 굉장한 워커홀릭이자 완벽주의자였던 그녀의 삶에서 딸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적었을 것이고, 딸이 엄마에게 보이는 울분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 해리엇이 사장으로 있었던 광고 회사의 직원들도 해리엇이라면 소스라치는 수준이다. 엄마나 아내로서의 정체성은 매우 빈약하고 직업적 커리어에서는 매우 유능하지만 독불장군이자, 사람들이 많이 쓰는 말로 하면 분노조절장애다(실제로 이런 진단은 없다). 


영화는 그녀의 성취나 젊었을 때의 아름다움이 담긴 저택 안 액자를 클로즈업하면서 시작한다. 그렇게 미끄러지던 카메라의 시선은 노년기에 접어들어 매우 고독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해리엇에서 멈춘다. 해리엇은 대인관계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에 대한 자각은 없어 보인다. 영화에서 앤과 흑인 소녀 브렌다를 만난 이후로 정서적 친밀감을 경험하는 것처럼 보이나, 너무 뻔한 반전 같았고 전혀 현실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 진부하게 느껴졌다. 


나이듦이나 질병 등으로 인해 병리적 자기애의 역기능적 측면들이 개선될 가능성이 없지 않지만, 자기애성 성격장애는 나이를 들어서도 별로 나아지지 않더라는 연구들 또한 있는 것으로 안다. 해리엇의 경우도 평생을 따뜻하거나 지지적인 상호작용 없이 지냈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런 그녀가 어느날 갑자기 친밀감을 경험할 수 있을지.. 자기애성 성격장애를 지닌 사람에게 친밀감은 매우 위협적이고 압도적인 어떤 것으로 경험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 영화는 자기애성 성격장애를 지닌 사람들이 경험하는 극도의 자기비판과 그에 수반되는 수치심 등을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 자기애성 성격장애의 핵심 감정은 내가 생각할 때 분노도 분노지만 수치심이다. 못난 자기가 드러나는 것이 너무나 두렵기 때문에 높은 포부 수준을 세우고 그 포부 수준을 성취하기 위해 애쓰고(물론 애쓰지 않는 자기애성 성격장애 부류도 있다) 애쓰는 과정에서 완벽주의적인 성향을 보이고, 자존감을 고양하고자 하는 자신의 목표를 위한 대상으로서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이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내적 기준이나 목표에 도달하지 못 했고 이에 사회적 인정을 받지 못 했을 때 자기애성 성격장애를 지닌 사람은 수치심과 함께 일시적으로 붕괴되기 마련이다. 그게 아래글에서 Elsa 박사가 말하는 Narcissistic emotional trauma고, 트라우마에 대한 다양한 반응이 나올 수 있는데 그 중 하나가 Shame-based aggressive rage reactions이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나 inside out처럼 심리학적인 배경이 탄탄하고 상업성도 모두 갖춘 영화들이 있는 것을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다. 한 사람이 경험하는 내적 갈등을 짧은 시간 안에 모두 보여주기는 어렵다. 그리고 이 영화의 핵심이 병리적 자기애도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 영화는 그런 부분에 대한 고민이 거의 없이 진부한 플롯으로 보는 이를 지루하게 만든다. 아무 감흥이 없는 영화다. 다만 주인공 역할을 맡은 셜리 맥클레인의 아우라는 대단하다. 아만다 사이프리드는 보이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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