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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심리학/정신병리

"나는 좋은 행동을 하고 아주 나쁜 생각을 해!": 양가감정을 버틸 수 있는 능력

by 오송인 2018. 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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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요약: 양가감정을 버틸 수 있으려면 모성적 돌봄이 필수적임. 양가감정을 지니게 된다는 것은 자기 안의 나쁜 것들을 수용함으로써 자기와 타인의 구분이 가능해지고, 더 나아가 타인에 대한 죄책감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임.


심리평가를 하다 보면 부모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됐다고 말하는 경우를 생각보다 자주 접하게 됩니다. 청소년이든 대학생이든 불혹을 넘긴 아저씨든 간에 환자를 만나다 보면 이런 경우가 많고, 제게 심리학적 지식이 없었다면, 특히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사람이 이런 얘기를 하는 경우 단순히 철이 덜 들었다고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부모에게 문제의 책임을 전가하는 태도는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이 현재 어떤 사람에 대한 사랑과 증오의 감정이 공존하는 상태를 경험할 수 없다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심리학적 용어로는 양가감정이라고 하는데요. 양가감정을 견딜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죠.


이 양가감정이라는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멜라니 클라인(Melanie Klein, 1882-1960)의 편집분열(paranoid-schizoid) 단계와 우울 단계에 관한 썰을 조금 풀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멜라니 클라인은 프로이트의 one-person psychology에서 자기와 대상이라는 two-person psychology로의 혁신의 시발점이 된 사람입니다. 욕구보다 관계성에 초점을 맞췄죠.


멜라니 클라인의 저 개념은 사실 볼 때마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개념 중의 하나인데, 제가 생각할 때 심리치료를 통한 환자의 변화 과정을 역으로 영유아기의 자연스러운 발달 과정과 연관시키려 했기 때문에 다소 소설처럼 들리는 면이 없지 않은 것 같습니다.


...클라인은 원시적인 사랑 충동은 공격적인 목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유아는 여러 가지 파괴적인 생각들을 지니고 있다고 간주했다. 이런 생각들은 생의 아주 초기에 한정될 수 있다. 우리가 관찰하고 있는 유아는 염려(concern)라는 것을 가질 수 있는 시기보다 더 이전의 아기들이다. 여기서 염려는 발달과정에서 아동이 본능적 충동을 표현할 때, 어머니가 그 표현을 사랑으로 감당해 주는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다. - 성숙과정과 촉진적 환경, by 도널드 위니캇, 26쪽.


요는 유아의 사랑 충동 안에 이미 공격성(프로이트가 death instinct라고 부른, 혹은 멜라니 클라인이 본능적 만족의 좌절과 관련된 공격성이라고 부른 무엇)이 섞여 있고, 자기 안에 있는 이 공격성을 자기로부터 분열시켜서 엄마에게 투사함으로써 엄마가 자기를 박해할지도 모른다는 환상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편집-분열 단계에 관한 것입니다.


만일 어머니가 자연스럽게 고도의 적응적인 방식으로 행동한다면, 유아는 차츰 자신의 무자비한 공격 대상이 어머니이며, 그 어머니가 유아 돌봄 상황에 책임이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다. 같은 책, 26-27쪽.


바로 위에 인용한 위니캇의 설명이 멜라니 클라인의 우울 단계와 관련됩니다. 위니캇은 엄마가 유아의 공격성을 잘 받아줄 때 유아가 자기와 어머니가 각각 독립된 unit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야말로 유아에게 자아(ego)라고 할 만한 어떤 것의 배아가 탄생하는 것이죠. 이와 동시에, 어머니가 자신을 박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머니를 공격하고 있다고 느끼게 됨에 따라 어머니를 공격한 데 따른 결과를 염려하게 됩니다. 위니캇은 이것을 죄책감의 기원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보다 중요하게 죄책감이 사랑과 증오라는 양가감정을 수용할 수 있게 된 결과 발생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쯤에서 편집성 성격을 지닌 환자를 어떻게 치료할 수 있는 낸시 맥윌리엄스의 설명 중 일부를 가져와 봅니다. 편집성 성격을 지닌 환자는 유아들처럼 자신이 지닌 bad part(특히 수치심)를 분열시켜 상대방에게 투사합니다. 상당한 분노와 함께. 열등하고 수치스러운 사람은 내가 아니라 저들이 되는 것이고(수치심 투사), 저들은 나를 박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분노 투사) 당하기 전에 재빨리 역공세를 펼쳐야 한다는 식의 태도를 갖기 쉽습니다. 유대인을 말살하려 했던 히틀러가 극단적인 수준의 편집성 성격을 지닌 대표적인 인물이죠. 유아의 공격성은 환타지에서 머물지만 생애 초기 결핍으로 인해 그 환타지가 성인기까지 지속될 때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지.. 각설하고.. 흐흠..


...이를 위해서는 치료자의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부정적 전이를 편안하게 대화의 주제로 삼을 수 있고, 치료자 자신을 겨냥한 그런 증오와 의심은 예견했던 일임을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당황하지 않고 강력한 적개심을 수용하는 치료자의 자세는 보복당할지 모른다는 환자의 불안을 줄여 준다. 또한 증오심을 앞세워 가리려고 했던 깊은 두려움을 줄이고, 환자 스스로 악으로 간주했던 자기의 모습이 그저 평범한 인간적 속성에 불과함을 예증해 준다. 정신분석적 진단, 310-311쪽.


이러한 치료 과정은 엄마가 유아의 공격성을 잘 받아줬을 때와 정확히 같은 프로세스죠? 두 과정의 공통점은 엄마의 적절한 보살핌과 치료자의 적절한 버텨주기를 통해 유아나 환자의 내면에 있던 사랑과 증오가 통합됐다는 데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사랑으로 증오를 품는 과정을 엄마나 치료자가 보여줌으로써 유아나 환자는 공격성이나 증오가 자신이 지닌(!) 그저 평범한 인간적 속성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분열됐던 마음이 하나로 통합되는 거죠. 양가감정을 마음 속에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자, 이 얘기를 하려고 여기까지 왔네요. 이 글의 도입부로 돌아가서,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다 부모 때문이라고 말하는 환자를 볼 때마다 그 환자가 신경증과 정신병의 스펙트럼 사이 어디에 있든지 간에, 마음의 통합이 잘 돼 있지 않은 상태 혹은 ego의 기능이 약화된 상태라는 가설을 세울 수밖에 없습니다. 타인에 대한 심한 비난은 결국 자기 비난과 통합니다. 타인의 결점을 수용하지 못 하는 것은 자신의 결점을 수용하지 못 하는 것과도 같죠. 분열된 마음으로 보는 세상은 선 아니면 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만사 문제의 원인은 외부에도 있고 내부에도 있습니다. 부모 비난하는 환자를 예로 들었지만, 다른 예도 얼마든지 들 수 있습니다. 이를 테면, 커플 사이의 불화라든지.. 이런 대인 갈등이 심할수록 자기 문제를 볼 수 없을 만큼 마음이 분열된 결과일 수 있습니다. 사랑보다 증오가 커서 두 감정을 모두 담아내기 어려운 것이죠.


이에, 분열된 마음이 통합될 수 있도록 치료자가 버텨주는 것이 중요해지는데, 낸시 맥윌리엄스가 편집성 성격을 지닌 환자를 버텨줄 때 필요한 여섯 가지 정도의 치료기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중 제게 의미 있게 다가오는 기법 하나를 소개합니다. 생각과 행동의 차이점에 대한 반복된 언급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자기 딸 이야기를 꺼내고 있습니다. 모든 기법은 증오와 같은 부인된 자기의 일부를 잘 수용할 수 있게 돕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우리 딸이 유치원에 다닐 때, 유치원 선생님이 선행이란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행동을 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 말을 들은 내 딸은 걱정이 많았다. 나는 선생님 말씀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나쁜 생각을 한다는 건 정말 재미있는 일이지만, 그런 생각에도 불구하고 좋은 행동을 할 수 있다면 특히 더 그렇다고 말해 주었다. 딸아이는 크게 안심하였다. 몇 달 후, 딸아이는 아기인 여동생을 괴롭히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짓궂은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좋은 행동을 하고 아주 나쁜 생각을 해!" 같은 책, 317쪽.


분열편집 단계에 위치한 사람이 우울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저 딸이 그랬던 것처럼 분노, 적개심, 욕심, 질투 등 부인하고 싶어하는 감정이나 못나 보이는 자기 모습에 대해 보다 유머러스하게 대응하는 연습이 필요할 수 있겠습니다. 그 일환으로 생각은 나쁘게 행동은 좋게 하는 것도 방법일 수 있겠네요. 자기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쓸모 없는 인간이라고 진심 믿지만 그냥 한 번쯤 반대로 행동해 보는 것이 큰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겠습니다. 산책을 한다든지.. 타인에 대해서도, 예를 들어 정말 시어머니가 싫어도 그 앞에서는 알랑방구도 한 번 뀌어볼 수 있겠고요.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생각은 나쁘게 행동은 좋게!


부모가 정말 객관적으로 학대나 방임을 일삼은 bad person이라 하더라도, 부모 비난을 통해 그 과거를 되돌릴 순 없겠죠. 하지만 치료를 통해 그런 박탈적 환경으로 인해 분열되었던 자신의 일부를 수용하고 양가감정을 버틸 수 있게 되면, 삶이 늘 전쟁터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경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조금 우울해질 수야 있겠지만 그만큼 다른 사람에 대한 따뜻함과 감사를 느낄 가능성도 높아질 것 같고요.


* 스팀잇에 동시 게재된 글입니다.

url: https://steemit.com/kr-psychology/@slowdive14/6nwgg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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