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버 색스는 의사라는 테두리에 한정짓기에는 참 폭이 넓은 사람이다. 한때 뛰어난 보디빌더이기도 했고, 오토바이 덕후에 마약중독자이기도 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게이다. 온 더 무브는 480쪽이라는 분량 속에 그 넓은 폭을 압축해서 잘 담고 있다.
지금은 의학계뿐만 아니라 탁월한 문체로 문인들에게까지 명성이 자자한 사람이지만, 주요 저작 중 가장 높은 완성도를 지닌 것으로 평가 받는 <깨어남>은 발간 당시 주류 의학계의 철저한 외면을 받기도 한다. 당시 의학계의 패러다임과 상충하는 아이디어 및 근거를 제시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그런 무시로 상처 받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는 살아 생전에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편두통>을 비롯하여 훌륭한 저서를 많이 냈다. 이 저서들의 공통점은 임상적 관찰에 의한 병례사라는 것이다. 딱딱한 병례사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을 느낄 수 있는 사례집들이라는 데 그 뛰어남이 있다. 술술 읽히는 것은 덤이다. 자서전에는 이런 책들이 탄생하게 되는 배경이 그의 개인사와 관련하여 아주 상세히 기술되고 있다. 특히 <나는 침대에서 내 다리를 주웠다>는 그 자신이 사고를 통해 경험한 '육감', 즉 자신의 신체를 자신의 일부로 지각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고유수용감각에 관한 얘기를 다루고 있다. 다리 근육이 심하게 파열돼 고유수용감각에 혼선이 생기고 급기야 자기 다리를 남의 다리처럼 지각하게 되는 흥미로운 경험에 관한 책이라고 한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만 읽어 봤기 때문에 섣불리 말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으나, 그의 책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이 세상을 지각하는 방식과 세상을 지각하는 방식이 한 인간의 정체성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것인 듯하다.
임상가이자 과학자로서 그는 이런 주제에 몰두했고 평생 끊임없이 자신의 관찰이나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메모했다. 책에 보면 도로 갓길에 차를 주차해 놓고 메모하는 모습이나 역을 빠져나와 손에 든 짐을 다 내려놓은 채 메모를 하는 그가 찍힌 사진이 나온다. 그가 많은 책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이런 꾸준한 메모 습관이 팔할인 것 같다.
호기심과 꾸준함, 포기하지 않는 마음만 있다면 올리버 색스처럼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뭐 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인생에서 내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덕목들을 고루 갖춘 인물의 일대기를 읽는 것은 꽤나 흥미진진하고 동기부여가 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포기하지 않는 마음과 관련하여, 실험과학자로서의 길에 들어섰다가 한 번 실패하고 몇 년이 흐른 뒤 재도전하는 부분이 인상적인데, 재도전했다가 실패하고 깔끔하게 포기하기 때문에 더 인상적이다. 올리버 색스는 크게 부상을 입는 것을 개의치 않는 것마냥 꽤나 무식하게 오토바이를 타고 몸을 만드는 등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시도를 많이 한 사람이지만, 정말 안 되겠다고 판단하는 경우 포기할 줄도 아는 사람이라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물러설 때를 알아야. 반면 <나는 침대에서 내 다리를 주웠다>는 지지부진 진도가 안 나가 집필에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어떤 책은 여러 출판사로부터 거절을 당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책을 완성해 냈다. 이런 끈기도 매력적이다. 청각장애 환자들의 경험에 대해 배우기 위해 수화를 6개월 동안 배우기도 했다고 하는데, 삶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삶을 풍부하게 경험하다 간 사람이라는 생각에 부러운 마음이 드는 게 사실이다. 나 또한 앞으로 그런 삶을 만들어 갈 수 있을까? 지금까지는 대체로 내가 원하는 삶을 잘 이루며 살아온 것 같은데. 커리어에서의 방향 전환을 앞두고 있어서 다시금 생각이 많아진다.
어제 처음 이 사람의 테드 강연을 봤는데, 2015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6년 전쯤에 녹화된 것이리라. 노쇠한 모습이 역력했다. 그럼에도 시각장애를 지닌 환자들이 경험하는 환시에 대해 널리 알려서 환자들이 자신의 증상을 감추지 않아도 되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잊혀지거나 소외될 수 있는 대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평생 유지한 사람답게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눈이 굉장히 맑고 선해 보였다. 이제 깨어남을 읽어볼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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