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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심리학/상담 및 심리치료

공개사례발표 끝: 초보 상담자로서의 1년을 돌이켜 보며

by 오송인 2019. 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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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사례발표가 끝났다. 상담심리사 수련 과정에서의 첫 공개사례 발표였다. 폭주하는 병원로딩을 감내하면서 틈틈이 자료 준비하느라 수요일부터 토요일까지 4일이 걸렸다. 다 끝내고 나니 속이 후련하다.

 

준비하느라 나만 고생한 게 아니라, 부부는 일심동체인지라 와이프도 고생했다. 평일에 야근을 두어 번 하고 토요일 오전에도 병원에서 자료를 만드느라 와이프가 딸을 전담 마크했고 너무 힘들었는지 입술이 부르트기도 했다. 남편이 상담심리사 따려고 노력하는 것을 지지적으로 응원해 줘서 사랑하는 와이프에게 늘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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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오늘 상담을 마치고 사례발표 장소로 이동하면서 임상심리전문가 공개사례발표 때가 떠올랐다. 그 때는 정말 상담에 대한 지식이나 감이 지금보다 더 없었다. 병원에서 심리평가만 하던 사람이 상담을 하려니 상담심리 석사생들보다 못 하면 못 했지 나을 게 없었다고 본다. 더욱이 내 임상심리 수퍼바이저 선생님을 인격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매우 존경하지만수퍼바이저 선생님도 한 병원에서 오랫동안 심리평가 위주의 업무를 하다 보니 상담 수퍼비전을 상세히 해주기 어려운 면이 분명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원이 많고 상담 동기도 충분한 대학생 내담자 덕에(정말 내담자 덕분이었다. 내가 뭘 한 게 없으니.) 20회기 가까이 채워서 사례발표 동의를 얻었고, 발표 당일에 서울 어느 주요 대학병원 임상심리전문가 선생님이 수퍼바이저로 와서 사례발표를 지도했다. 당시를 돌이켜 보면, 가뜩이나 불안 수준 높은데 연단에 서서 20~30명은 족히 될 것 같은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고 있노라니 나도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싶은 심정이었던 것 같다. 자연스레 수퍼바이저 선생님이 하는 얘기도 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무사히 이 시간이 넘어가기만을 바랐던 것 같다. 추운 겨울날 대학병원에 공개사례발표 하러 가던 아침 버스에서 들었던 노래만이 귓가에 남아 있다.

 

https://youtu.be/310CHeJPNU8

Dustin O'Halloran - Opus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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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취득의 마지막 고비였던 공개사례발표를 마치고 전문가를 취득했지만, 반쪽짜리 전문가라는 셀프이미지를 지울 수가 없었다. 수련생을 인격적으로 대우해 주고 수퍼비전도 꼼꼼하게 해주는 수퍼바이저 선생님을 만나서 심리평가의 기본 토대를 잘 닦고 나왔다는 자신이 있었지만 심리치료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느낌, 전문가로서의 부적절감이 컸다. 일전에도 몇 번 이 블로그에 적었지만 그래서 작년 1월부터 상담심리사 수련을 시작했다. 첫 직장에서 동료 선생님들이 놀이치료나 집단치료 하면서 아동 내담자를 변화시키는 것을 보면서 심리치료 하면 대체로 좋아진다는 확신을 얻은 것도 기폭제가 됐다.(그 전까지만 해도 심리치료의 효용을 의심했다. 심리치료의 효용에 대한 의심이 아니라 결국 치료자로서의 자신에 대한 의심이었을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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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심리사 수련을 1년 채운 시점에서 지난 1년을 되돌아보면 그야말로 우왕좌왕 좌충우돌이다. 불과 한두 달 전까지만 해도 라포형성이 제대로 된 것인지, 이 내담자가 좋아지고 있기는 한 것인지, 가도 가도 제자리걸음은 아닌지 뭐 그런 생각들을 많이 했다. 그래서 블로그에도 상담 어렵다’, ‘상담 힘들다류의 글을 종종 썼다. 상담심리사 2급은 다들 쉽게 따는 것 같았는데, 과정은 안 보고 결과만 보니 그렇게 느껴졌던 것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들 얼마나 많은 내담자와의, 그리고 스스로와의 부침이 있었을까.

 

내담자를 어떻게 도와야 될지 몰라서 수퍼비전을 받지만 수퍼비전 받을 때 잠시 희망을 볼 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 같은 때도 있었다. 애를 많이 쏟은 내담자가 갑자기 안 오기도 하고, 그 내담자의 부와 모 모두 일탈이 잦은 자식 걱정에 하염없이 우는 모습을 보며 마음 아프기도 했다.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야 되는지 해결책을 자꾸만 묻고 상담이 도움이 안 된다며 낯빛이 어두워지는 내담자 앞에서 좌절감을 경험하기도 했고, 내담자와 라포형성이 된 상태에서 상담자에 대한 모의 불신으로 인해 상담이 부지불식간에 조기종결되기도 했다. 내담자의 상담 동기가 높더라도 부모가 내담자를 안 보내면 정말 허망하게 상담이 종결될 수도 있음을, 아동청소년 상담에서 부모와의 관계가 중요함을 경험을 통해 배우기도 했다. 남성이라는 성별이 상담의 어떤 경우에서는 장점일 수도 있지만 걸림돌이 될 수도 있음을 어떤 사례를 통해 배웠다.

 

이 기관에서 총 9사례를 맡았는데 그래도 상담의 진전이 있었고 내담자의 변화가 있었다고 여겨지는 경우가 2사례이다. 그 중 한 사례를 오늘 발표했다. 아무리 겉보기에 심각한 정신병리가 있다 하더라도 변화의 힘이 처음부터 내담자에게 있고 상담자는 그 힘이 발현될 수 있게 도우면 된다는 정말 귀중한 배움을 얻게 해준 내담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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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곁길로 빠지면, 상담심리사들의 공개사례발표 참관은 이번이 두 번째다. 첫 번째는 조OO 교수님이 부수퍼바이저로 진행된 사례발표였는데 이 분은 경력이 참 화려하다. 수학과 박사를 미국에서 하고 한국에서 상담 석사부터 박사까지 다시 한 경우이다.(이렇게 말하면 아시는 분은 다 아실 듯.) 대상관계 및 자기심리학에 능통하다는 인상을 받았고, 내 편견일 수 있지만 정확하고 엄밀한 이과적 특성이 내담자 사례개념화에서 빛을 발한다는 느낌이었다. 정곡을 찌르면서도 내담자를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느껴져서 배우는 바가 많았다. 아주 명쾌한 수퍼비전이었던지라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꼭 이분에게 수퍼비전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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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상담심리사 수련 과정에서의 두 번째 공개사례발표를 참여했고 참관자이자 발표자였다. 주수퍼바이저는 작년 봄에 알게 돼 지금까지 수퍼비전을 받고 있는 전문가 번호 200번대의 선생님이었고 부수퍼바이저는 이제 갓 1급을 취득하신 선생님이셨다. 두 분 모두 초보 상담자의 잘한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애쓰신다는 느낌을 받았다.

 

주수퍼바이저의 수퍼비전 스타일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별 걱정이 안 됐지만 부수퍼바이저는 처음 뵌 분이라 좀 긴장이 됐다. 하지만, 발표자가 두 명이었는데, 내 앞에 발표한 위클래스 선생님에게 부수퍼바이저가 잘한 부분을 많이 짚어주고 보완해야 할 부분 역시 완곡한 어조로 짚어주는 것을 보면서 불안감을 많이 내려놓을 수 있었다. (1급 취득한 분이라 그런지 몰라도 떨리고 초조하고 비판 받을 것 같아 두렵기도 한 발표자의 마음을 헤아리려 노력한다는 느낌이었다.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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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퍼비전 내용을 상세히 적을 수는 없겠으나 부수퍼바이저가 선택적 경청이라고 말한 부분이 기억에 특히 남는다. 핵심 기억에 연관될 수 있는 에피소드들을 내담자가 스치듯 얘기할 때 이걸 상담자가 꽉 움켜쥐어 그 에피소드의 디테일이라든지 에피소드에 담긴 의미나 감정을 탐색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수퍼비전 받으면서 다른 수퍼바이저로부터도 반복해서 피드백 받은 부분이다. 상담이나 심리평가나 디테일을 잘 파고들 수 있어야 내담자나 환자를 조금이라도 더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도 말처럼 쉽지는 않은 지점이다. 어떻게 하면 꽉 움켜쥘 수 있을지계속 모색을 해봐야 한다.

 

이번 수퍼비전에서도 내담자의 정신병리적 특성에서 '잠재된 강점'을 찾아내는 두 수퍼바이저의 언급에서 배움을 얻는다. 정신병리라고 해서 기능적인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숨겨진 배아가 싹 틀 수 있게 도와주고 역기능적인 부분은 감소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중요한 것 같다.

 

나를 제외한 열 명의 참가자들의 피드백을 주수퍼바이저가 강제(?)하여 덕분에 그들로부터도 귀한 배움을 얻을 수 있었다. 모두 필드에서 상담사로 일하고 있는 분들이라 그런지 현실적이고 쓸모 있는 피드백이었다.

 

단편적인 생각들의 결론이라 할 만한 게 있다면..

 

우왕좌왕하며 자기비판을 많이 했던 상담 1년을 돌아보면, 상담자의 개인 특성이 어떻든지 간에 내담자를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고자 하는 상담자의 의지가 중요해 보인다. 그리고 역전이를 비롯한 상담의 어려움이 발생할 때 이를 수퍼비전 받으려는 마음가짐도 중요한 것 같다. 하나 더 붙이자면, 잘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자신을 채찍질할 바에야 상담자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상담에 임하는 게 오히려 내담자에게 더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는 것이다


"우리가 미소 짓고, 웃고, 사랑하고, 주는 방식이나 눈을 깜빡이는 방식이 가장 정교한 치료적 개입 못지않게 내담자들에게 자신에 관하여 알게 해준다." - 상담자가 된다는 것, 325쪽.


상담심리사 2급 응시 요건을 채우기까지 공개사례발표 한 번, 심리평가 수퍼비전 두 번, 상담 수퍼비전 한 번, 집단상담 참여 두 번 정도가 남았다. 학습심리학이나 발달심리학이 어렵다고 하니 필기도 틈틈이 준비해 두어야 하겠다.

 

겸손하게 정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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