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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심리학/상담 및 심리치료

심리치료의 원리: 내 마음과 현실을 잘 구분할 수 있는 자아경계 세우기

by 오송인 2019.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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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두 돌이 안 된 유아의 마음: 사고의 구체성


19개월인 내 딸은 상징화 능력을 지니지 못 했기 때문에 아빠가 사자 흉내를 내면 정말 사자인 줄 알고 겁을 낸다.


상징, 추상화의 어려움이 있을 때 심리학적인 용어로 사고가 concrete하다고 표현한다. 사고가 '구체적'이라고 번역하면 의미가 잘못 전달될 수 있기 때문에 심리평가 보고서에 그냥 영어로 표기할 때가 많다.


여기서의 concreteness는 사건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정신병을 지닌 환자 중에 속담의 본래 의미를 추론해 내지 못 하는 경우가 많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라는 속담의 뜻을 액면 그대로 해석하는 것은 내 딸이 아빠의 사자 흉내를 장난으로 받아들이지 못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사고가 concerete하여 말이나 대상에 부여된 상징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 하는 것이다.


2. 나와 나 아닌 것의 경계 허물어짐: 사고의 구체성과 과잉포괄적 사고로 인한 상징화의 어려움 

 

이것이 정신병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이유는 다음 삽화에서 잘 드러난다. 대상관계 이론과 실제라는 책 389쪽에서 퍼왔다.


"환자는 점점 더 빠르게 말했다. 그녀는 무언가를 붙잡으려 하는 것 같았다. 정신과 의사는 그녀의 요구에 반응하지 않았다. '여자의 지갑은 여자의 한 부분이에요.'라고 그녀는 핸드백을 움켜쥐며 말했다. '내 말은 정말 지갑은 진짜 그 여자라는 뜻이에요. 선생님이 이해할지 모르겠어요. 남자 지갑하고는 달라요. 남자도 지갑을 갖고 다니고 신경 쓸지도 모르지만, 여자의 지갑은 실제로 여자 자신이에요. 내 지갑이 나를 엉망으로 만들어요. 나는 지갑을 정리하려고 애를 써요. 물건을 버리느라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요. 하지만 내가 정리하려고 하면 할수록 모든 게 더 엉망이 되어 버려요."


이 내담자는 어머니가 최근 사망했고, 자신의 결혼생활과 직장을 모두 잃기 직전에 있다고 두려워하는 상황이다. 10년 전에 이미 정신병적 삽화를 경험했기 때문에 다시 제정신을 잃을 것에 대해 두려워하는 상황이기도 하다.


이 내담자에게 지갑은 곧 자기 자신이다. 자신의 내적인 혼란에 대처하기 위해 지갑을 정리하게 되는 것은, 내담자가 잘 이야기해 주었듯이 지갑이 곧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상징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실제적인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이 문제다. 어질러진 내 지갑 속처럼 내 마음도 혼란스러워요 라고 상징적이고 비유적으로 표현했다면 문제가 되지 않았을 테지만 이 내담자는 지갑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다. 지갑을 자기 자신으로 여기는 것은, 지갑이라는 대상과 자신(의 생각)의 경계가 무너졌다는 의미다. 이를 두고 현실검증력을 상실했다고 표현한다.


아이의 마음에서 사자 흉내를 내는 아빠는 사자다.

앞선 환자의 마음에서 어질러진 지갑은 자기자신이다.


이 둘의 공통점은 paleological thinking이다. 두 대상이 10가지가 달라도 한 가지만 같으면 전부 같은 것으로 보는 게 이 paleological thinking이다. 많이들 드는 예로,


성모 마리아는 여자다.

나는 여자다.

그러므로 나는 성모 마리아다.


주부와 술부에서 술부만 같으면 주부(성모 마리아, 나)가 마법처럼 하나가 된다.


지갑이 어질러져 있다.

내 마음도 어질러져 있다.

나는 지갑이다.


사자는 어흥한다.

아빠도 어흥한다.

아빠는 사자다.


대상의 단편적 속성에 따라 두 대상이 하나가 되기란 너무나 쉽다. 어질러져 있는 것은 지갑이나 마음뿐만 아니라 방이 될 수도 있고, 메모장이 될 수도 있고, 책장이 될 수도 있고, 한강변이 될 수도 있고 지구를 포함한 세상 만물이 될 수 있다. 세상 만물과 나는 하나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자아경계가 무너진다. 현실검증력을 상실한다.


나와 내가 아닌 것, 혹은 말을 약간 달리하여, 내 내면의 생각이나 욕망과 외부 실제를 구분하는 능력은 외부 실제이면서도 내 생각이나 욕망이 투사될 수 있는 중간지대를 인식하는 것과 궤를 같이 하는 것 같다. 아빠가 어흥하는 사자로 보이면서 무섭기도 하지만, 마음 한켠에서 평소에 아빠와 놀던 기억을 떠올리며 실제로서의 아빠를 상기할 수 있는 인식 능력이랄까. '어흥한다'라는 술부로 두 대상을 동일시하던 것에서 벗어나 아빠의 다른 속성을 떠올리며 아빠와 사자를 변별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도 할 수 있다.


대상의 단편적 속성, 액면 속성에서 벗어나 좀 더 넓은 조망에서 대상을 통합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이런 능력은 추상화 능력, 상징화 능력과도 연관될 것이다.


3. 삶의 어려움을 야기하는 대인관계에서 벗어나기: 심리치료에서 상담자에게 전이된 내 마음 속 엄마 아빠를 변별해 내는 상징화 능력


이것이 심리치료에서도 함의를 갖는다. 심리치료에서 전이가 발생하지 않으면 치료가 되지 않는다는 말도 있을 정도로 심리치료의 효과가 나기 위해서는 내담자가 치료자를 성장 과정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친 주요타인(주로 엄마, 아빠)으로 대할 수 있어야 한다. 상담자와 내담자의 동기 수준이 적절한 경우에는 이런 일이 의식하지 못 한 사이 자연스레 발생하게 되며, 이를 전이라고 부른다.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많은 어려움들이 주요타인과의 관계에서 형성된 마음 속의 관계 틀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는 게 다양한 심리치료 이론 간의 공통점이라 할 만한 것인데, 심리치료에서 이 관계 틀, 혹은 내적 작동 모델(internal working model)을 변화시킴으로써 치료효과가 난다. 관계 틀을 어떻게 변화시키느냐 하면 내담자가 치료자를 엄마나 아빠로 대하는 전이를 치료자가 자각하여 이를 유연하게 다룰 때 내담자에게 삶의 어려움을 초래해 왔을 관계 틀을 변화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우리 딸이 날 사자로 오인하였듯 내담자는 치료자를 엄마나 아빠로 오인하게 마련이다. 일례로 비판적이고 거부적인 부모 슬하에서 자란 내담자는 상담자가 아무리 비판단적으로 내담자를 대해도 상담자를 두려워하며 움츠러들거나 날선 반응을 하기 쉽다. 관계 틀이 이미 그렇게 형성이 돼 있기 때문에 비판이나 거부를 예상하고 그에 적절한 반응을 하는 것인데, 모든 사람에게 일반화되니 삶의 어려움을 야기한다.


이런 상황에서 치료자가 할 수 있는 것은 내담자 마음 속의 관계틀이 야기하는 부모-자녀 상호작용의 재연을 받아들이되 상담자가 부모와 같은 반응을 하지 않는 것이다. 내담자가 떠넘기는 부모 역할을 떠맡되 내담자 부모와는 다른 반응을 반복적으로 하는 것이 삶의 어려움을 초래하는 관계틀을 변화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예상되는 반응이 오지 않는 경험이 반복되면 내담자 마음의 중간지대가 형성된다. 엄빠와는 다른 반응을 하는 상담자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런 걸 학술적으로는 교정적 정서체험이라고 부른다. 일반화를 멈추고 중간지대 안에서, 그 마음의 여백 안에서 이전과는 다른 태도와 반응으로 타인을 대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현실검증에서의 어려움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의 생각, 내적 틀 등에 의해 외부 실제(상담자를 비롯한 타인)를 왜곡하는 면이 있었는데 이 왜곡을 멈추고 자기 생각이나 관계 틀로부터 한 발자국 떨어져서 변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추상화, 상징화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상담자가 그간 엄마나 아빠처럼 느껴져서 그에 상응하는 반응을 했지만 엄마나 아빠가 아니라 그 상징으로서 기능했음을 의식 수준에서 인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대상의 단편적 속성이나 액면에 몰두함으로써 현실을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다양한 특성을 인식할 수 있는 중간지대 혹은 자아경계를 잘 확립하는 게 참으로 중요하다. 이런 능력이 심리치료를 통해 함양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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