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에 딱 들어 맞는 환자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 환자가 있다면 내가 지금 교과서에 그 사람을 끼워 맞추려고 하는 건 아닌지 곰곰 생각해 봐야 하는 것 아닐까 싶다
마찬가지로 DSM 진단에 딱 들어 맞는 사람도 없다.
외현적으로는 들어 맞아도 뭔가 다른 문제'들'이나 역동이 기저에 깔려 있게 마련인 것 같다.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onset이 언제고 경과가 어떤지 차트 리뷰를 꼼꼼하게 할 필요가 있다 하더라도,
단 한 번의 심리평가로 한 사람을 범주화하는 것에는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흔히 쓰레기통 진단으로 취급되는 NOS(성격장애에선 Borderline)나 R/O 등으로 진단이 나간다 해서 이렇게 진단 내릴 거면 진단 왜 하냐는 식으로 폄하하는 것은 억지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진단명은 가설일 뿐이다.
퍼슨스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진단은 가설이고 따라서 환자와 함께 계속해서 수정해 나갈 필요가 있음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그리고 낸시 맥윌리엄스가 말했듯이, 진단을 통해서 어떤 사람에 대한 청사진이 그려지면 그 다음부터 그 사람을 볼 때 진단명은 생각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것보다 중요한 건 왜 그런 진단을 내리게 되었는지에 대한 근거들과 근거들에서 추론된 성격 구조 및 역동이 그 사람을 정말로 잘 설명하는지 재차 질문해 보는 것 아닐까 한다.
누가 뭐라고 한 것은 아니지만, 그냥 최근에 들었던 생각을 줄줄이 써 본 것인데,
물론 현실적으로 한 번 나갔던 진단이 수정되는 경우는 없다.
국내 병원 셋팅에선 불가능한 얘기에 가까운데,
내가 속한 곳만 해도 병상이 800개 이상에 정신과 전문의가 10명이 넘는데 심리평가하는 사람은 수퍼바이저 선생님과 나 단 둘밖에 없고, 업무 로딩이 많기 때문에 한 번 평가했던 환자를 추가적으로 면담하는 데는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이 점이 제일 안타깝다. 보고서가 올라가더라도 환자들과의 추가적인 면담을 통해서 환자에 대한 이해를 더 깊게 하고 싶다는 바람 정도를 늘 마음에 가지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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