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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서평

대성당

by 오송인 2016.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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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유명한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을 읽어 봤다. 미국 단편문학의 정수, 무라카미 하루키가 가장 사랑하는 작가 등등의 수식어구가 붙는 작가가 레이먼드 카버이다. 10년도 더 전에 이 사람이 쓴 단편선을 읽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는다. 그래서 블로그를 뒤져보니 아니나 다를까 이 사람 단편을 읽고 몇자 감상 적어 놓은 게 있어서 부끄럽지만 가져와 본다. 2004년 2월의 단문이다.


"숏컷의 독특한 분위기는 아마도 작가의 문체와 상관이 있으리라. 작가는 가정의 파탄이나 불화 등을 주요 사건으로 배치할지언정 절대 일을 부각시키는 법이 없다. 그냥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마치 내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소한 일상인냥 대수롭지 않게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연스러운 일상의 사건은 이야기와는 별 상관없는 행동이나 말 따위의 급작스럽고도 강렬한 이미지에 의해 내 머릿속에서 슬몃슬몃 지워져 나가는 듯했다. 이런 것들이 작가의 문체상의 가장 큰 특징인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제목들의 이미지 또한 그렇다. 노래에서처럼 주요 단어를 따서 제목을 정하기보단 이야기에서 외따로 떨어진 가장자리의 소재들을 차용해서 제목을 붙이거나, 연상의 끄트머리에나 있을 법한 문구를 차용하는 식이었다. 제목만 봐서는 절대 무슨 이야기가 전개될 것인지 추측할 수 없을 것이다. 내게는 이런 요소들이 매력적이었다(비록 흥미진진한 재미는 없었을망정)."


지금도 경험이 많은 편이라 보긴 어렵지만, 이 짤막한 글을 쓸 당시는 지금보다 더 경험이 없어서 레이먼드 카버 단편에서 나타나는 불행에 처한 사람들의 삶을 이해할 만한 깜냥이 없었을 것이다. 대체 소설 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건 대체 뭘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이 상징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머리를 싸맬 수밖에 없었을 것인데, 싸맨다고 답이 나오나. 안 나오니 별 상관없는 행동이나 말이라는 둥 제목만 봐선 절대 무슨 이야기가 전개될 것인지 추측할 수 없을 것이라는 둥의 말을 하는 것이다. 저 글을 보면 내가 당시에 카버의 소설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연히 소설 속 모든 행동과 말은 다 의미가 있고 단편의 제목도 그 단편을 내용을 가장 잘 집약한 것이라 할 만하다. 이해도 못한 주제에 흥미진진한 재미는 없었을망정 매력적인 부분이 있었다는 말까지 하는 것을 보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뭔가 더 멋있어 보였던(당시에 전위음악 같은 것에 심취해 있기도 했다) 이십대 초반의 허세가 느껴지기도 해서 '흥미진진하게 재미있다'(흥미진진하게 재미있다는 반복된 표현도 좀 웃긴다. 흥미라는 말에 이미 재미가 포함돼 있다. ㅋ). 아무튼..;


대성당 얘기로 돌아오면, 단편선인 대성당도 숏컷처럼 실직이나 자식의 죽음, 별거 등등의 불행에 포커스를 맞춘다. 불행은 불행인데 아침 막장 드라마처럼 불행을 드라마틱하게 부각시키기보다 일상에 도사리고 있는 불행의 편린에 포커스를 맞추는 전략을 취한다.(예외가 되는 단편이 있다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유일하게 등장인물이 죽는다) 이런 전략은 효과가 큰데, 불행의 편린이 지닌 뿌리 깊은 속성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독자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불행은 대개 서서히 한 사람 인생을 잠식해 들어오다가 의식하지도 못한 어느 순간에 수면 위로 출현하게 마련이다. 질병에도 병력이 있듯이 불행에도 불행의 역사가 있게 마련인데, 카버는 이를 테면 독자가 그 불행의 역사를 상상해 볼 것을 요구한다는 말이다. 지금 이 불행이 어디서부터 시작돼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를. 당연히 이십대의 나와 같은 수동적인 독자는 나가리된다.


이러한 요구는 인물의 행동에 대해 묘사할 때도 마찬가지다. 무슨 말인가 하면, 불행의 역사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들듯이 행동의 맥락을 늘 염두에 두고 행동을 해석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 행동 이전에 어떤 행동들이 있었고 그래서 지금 이 행동은 어떤 의미고(어떤 정서를 내포했고) 앞으로 어떤 행동이 나타날 것 같은지. 카버는 심리 묘사에 치중하기보다 짤막한 행동 묘사를 고집하다시피 한다. 하지만 독자가 그 행동이 어떤 뉘앙스인지 파악할 수 있게, 행동이 출현하게 되는 맥락 설정을 간결하게 잘 해놓고 있기 때문에 사소해 보이는 행동이라 할지라도 그 행동을 통해 인물의 심리상태 및 행동의 변화 방향까지도 파악해 낼 수 있다. 물론 이 때도 독자가 짱구를 쉴 새 없이 굴리고 있다는 단서가 달리는 한에서 말이다. 카버는 적극적인 독자를 요구한다, 수동적인 독자, 이십대 때의 나와 같은 독자, 행동이 나타나고 있는 맥락을 놓친 독자는 피상적인 책읽기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특히, 사람은 겉과 속이 다를 때가 많은데 카버는 이런 겉다르고 속다른 이중구속을 활용할 때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딴 생각하다가 맥락을 놓치면 카버가 써놓은 문자의 표면 내용만 보고 속은 보지 못하게 된다. (단편은 호흡이 빠르고 맥락을 놓치는 건 정말 한순간이다.) 이 정도로만 적어 놓으면 당췌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울 테니 대성당에 실린 12단편 중 가장 재미있게 읽은 <신경써서>라는 작품을 통해서 설명해 보겠다.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아내와 별거하여 지내게 된 남자가 있다. 그런데 2주가 지난 어느 날 아내인 이네즈가 찾아온다. 


"그는 그게 이네즈의 목소리이며 이번 방문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별거가 정확히 어떤 식으로 도출된 결론인지, 예를 들어 일단 따로 살면서 서로가 결혼생활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갖기로 온건하게 합의를 본 것인지 아니면 이렇게는 못 살겠다는 아내의(혹은 이렇게 술을 못 먹게 하는 아내와는 못 살겠다는 남편의) 울분에 의한 것인지 어떤 것인지에 대한 설명은 생략돼 있다. 다만 소설 시작부에 부부가 수많은 이야기를 나눈 뒤에 주인공이 홀로 살게 됐다 정도로 처리되고 있는데, 이걸 봐선 전자 같기도 하다. 어찌 됐든 저 문장은 주인공이 아내와의 관계에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고 나아가 그 관계를 깨뜨리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최소한 이전처럼 술에 취해 있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는 상황인 것이다. 아내가 방문한 시점이 오전 11시이기 때문에 더. 


하지만 작가는 아내의 방문에 대한 상황 묘사를 하기 전에 이미 그가 샴페인 세 병을 사서 자신의 거처로 올라오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에 더해 그가 아침에 샴페인과 도넛으로 아침 식사를 한들 그게 뭐 대수냐고 생각하는 지경, 그 자신이 이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지경에 이르렀음을 알려준다


"그러다가 샴페인과 함께 도넛을 먹은 일이 떠올랐다. 예전의 그였다면 살짝 미친 게 아니냐며 친구에게 들려줘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거든 저거든 그게 뭐가 문제냐는 생각이 들었다. 샴페인과 도넛으로 아침식사를 했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가 아내가 방문한 날 아침에도 샴페인을 아침밥 대용으로 먹었는지 여부는 기술돼 있지 않으나, 그래서 어쩌라고 와 같은 자포자기의 말을 고려하면 이미 일어나자마자 한잔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고, 샴페인을 몇병 더 사러 나갔다가 돌아오는 것은 이러한 유추에 방점을 찍는다. 쉽게 말해 먹다가 모자라니까 아침부터 술 사러 나간 것이다. 그런 대목에서 작가가 하는 말이 "그는 그게 이네즈의 목소리이며 이번 방문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이다. 심지어 이번 방문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난 직후에도 샴페인을 한 잔 더 먹고 나서야 아내를 맞이하기 위해 문을 열러 나간다고 독자에게 가감없이 보여준다. 그가 아내와의 관계 개선 혹은 유지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고, 이를 위해 술 취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까지도 파악할 수 있을 정도의 지능은 갖추었으나, 이런 깨달음 따위는 이미 술에 실려 위장으로 내려가버렸음을.


전체 18페이지 중 초반 4페이지 분량을 통해 작가는 우리가 이 커플의 결말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게 해준다. 이 부부가 어떻게 살아 왔고 어떻게 이 남자가 알코올중독이 됐는지 디테일을 알 순 없지만, 단 4페이지를 통해서 매우 세련된 방식으로 이 부부가 지금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어떤 상태에 처했고 그 상태가 어떤 식으로 변해갈지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부부가 처한 맥락이 그려졌으니 그 다음부터는 부부 행동의 겉과 속을 읽는 재미만 남았다. 


문을 열고 아내를 맞이한 주인공.. 아무리 취했어도 양심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매우 뻘쭘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음주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에 혼자 있는 게 좋기도 했다. 당분간은 혼자 지낼 필요가 있다는 점을 그는 스스로 분명히 해두고 있었다." 이 문장을 보면 주인공은 최소한 자신은 음주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상태에 있는 것이라고 믿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뻘쭘하니까 아내에게 한다는 얘기가 귀지 이야기다. 아침부터 귀지가 막혀서 소리도 잘 안 들리고 평형 감각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2주만에 아내가 본 남편은 수염을 깎지 않고 머리도 덥수룩한 데다 술에 취해 있는 등 알코올중독 때문에 자기관리가 안 되고 있는 상태고, 아내가 왜 왔는지는 물어보지도 않은 채 보자마자 한다는 얘기가 귀지 이야기다. 중독자로서의 모습이나 상대방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태도는 아마도 별거 직전의 모습과 다름이 없었을 것이다, 남편과 깊이 있게 알코올문제에 관해 얘기 나눌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간파했을 아내는 그래도 남편의 주호소인 귀지를 처리하기 위해 매우 애를 쓴다.(겉으로 드러나는 행동) 약간은 블랙코미디 같은 대목이다. 


아내는 무언가 의도가 있고 할말이 있어서 왔다. 남편도 그 사실을 안다.(술이 취했어도 아내의 이번 방문이 중요함을 안다는 데서 유추할 수 있는 것. 귀지 이야기 하면서 어쩌면 의도적으로 동문서답이나 하고 있지만.) 이혼 얘길 꺼내려 온 것일 수도 있고, 조금이라도 낙관적으로 보자면 주인공이 알코올중독에서 벗어나서 부부로서 함께 살아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지를 타진하러 왔을 수도 있다. 그 할말이 무엇이었는지 작가는 알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남편이 예전과 조금도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을 알았을 아내의 마음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아내가 남편에게 일말의 기대라도 했다면 남편에게 실망했을 것이고 이미 그런 실망조차도 아까울 정도의 상황이었다면 남편을 불쌍하게 여겼을 것인데, 남편의 귀지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 애쓰지만 남편의 손길을 외면하거나 남편과 시선을 맞추지 않는 태도(속마음이 반영됐을 행동)는 아마도 후자에 더 비중을 두게 만든다. 그야말로 미운 놈 떡 하나 주기이자 반동형성이 아닐지.


주저리 써놨지만 이 작가가 대단한 건 행동을 묘사하는 간결한 문장과 문장 사이에 복잡미묘한 심적 뉘앙스를 담아 놓았고, 독자가 그 뉘앙스를 다차원적으로 생각해 보게끔 참여시킨다는 데 있다는 얘길 하고 싶었다. 실제로 어떤 말이 발화되고 있는지보다 그 말을 할 때의 어조나 표정 같은 비언어적 정보들이 발화자의 의도를 캐치해 내는 데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은 교과서적인 얘기인데, 카버의 소설을 읽다 보면 이 위대한 작가는 그런 비언어적인 풍부한 정보들을 언어적으로, 그것도 매우 심플한 언어에 담아, 독자가 가져가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재능이 있구나 감탄하게 된다. 쉽게 말해 대단히 간결한 언어로, 다른 사람의 마음이 어떨지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게 멍석을 깔아준다는 것이다. 점점 퇴화돼 가는 현대인의 그 능력을 사용해 볼 수 있게.


한편 대성당에 실린 단편선을 관통하는 메시지라 할 만한 것도 울림이 컸다. 대성당을 읽다 보면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경청이 아닐까도 생각해 보게 된다. 비슷한 맥락에서 김중혁 작가는 슈퍼맨이 아니라 hearman이 필요하다고 말한 적도 있는데 그런 역할은 특히 상담 및 임상심리학자가 더 잘 해야 되는 부분 아닐지! 이 부분은 나중에 기회되면 다시 써보고 싶다. 물론 안 쓸 가능성이 크다. 


2016년 4월 17일 낮 12시 40분 최종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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