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PD수첩을 보는데 KTX 여승무원들이 11년 넘게 투쟁을 지속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2015년 대법원 판결에서 최종적으로 패소하였으나 그들의 투쟁은 현재진행형이다. 노동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의 투쟁을 이백프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2015년 당시의 대법원은 자본의 입장을 옹호한 것 같다. KTX 김승하 승무원은 이 결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음… 힘들지만… 저희뿐만 아니라 요즘에 너무 많은 분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어서… 같은 서비스업종에 위장도급과 불법파견이 많은데 저희가 안 좋은 선례가 된 것 같아서, 앞으로 (다른 노동자들도) 이런 힘든 일을 겪을 것 같아 마음이 너무 아프다."
출처: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63926
이 투쟁은 본질적으로 노동자 개개인의 이해관계를 넘어선다. 이 승무원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만을 위해 투쟁했다면 이렇게 긴 시간 동안 투쟁이 지속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들은 한국 노동 환경에서 열악한 처우를 경험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싸우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조금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면서 후대에서라도 이런 부당한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싸우는 것이다.
나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TV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나라면 투쟁에 동참했다 하더라도 얼마 못 버티고 체념한 채 다른 직장을 알아봤을 것 같다. 대의를 지키는 것보다 내 가족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을 것이고, 내 가족이 나로 인해 함께 힘들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윤리적 딜레마가 발생하게 된다. 내가 옹호하는 절대적 가치들을 지키는 과정에서 가족이 힘들어질 때, 나는 그 절대적 가치들을 포기하기가 쉬울 것이다.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해 보자. 매국을 하지 않으면 가족의 안위를 담보하기 힘든 그런 상황에 처했을 때 나라면 아마도 매국을 할 것 같다. 극단적인 예지만, 현실에서의 이해관계나 알력관계 앞에서 절대적 가치라는 것은 너무나 가벼운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숭고해지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가치들을 지켜내는 데 있다. 절대적 가치들을 지켜낸 인간들, 예를 들어 KTX 여승무원들과 같은 인간들이 결국 세상을 변화시켜 왔다. 하지만 그렇게 숭고한 인간은 극소수가 아닐지.
절대적 가치라는 것이 애초에 지키기 어려운 것이니 그것을 좇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말을 하고자 함이 아니다. 그것을 좇는 것이 어렵지만, 최소한 절대적 가치를 현실에 적용하고 있지 못한 자신의 행동에 일말의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필요함을 말하고자 함이다. 염치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 같다.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오늘은 집안일을 소홀히 하여 아내의 마음을 상하게 한 데 대한 사죄라도 해야겠다. 양성 평등에 힘쓰지 못 한 죄. 조금 더 쉽게 풀어 말하면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 눈 감으려 한 죄. 이런 사소한 죄들이 쌓이고 쌓여 오늘날의 염치 없는 한국 사회를 만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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