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자로서의 가장 큰 고민 중 하나는 상담의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다. 상담의 목표를 어떤 식으로 설정하는 것인지에 관해 책에서 보긴 봤지만 이걸 실전에 적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로 여겨진다. 구체적으로 이 부분에 대해 배운 바가 없고 수퍼비전에서도 속 시원한 답변을 듣지 못 했다. 더욱이 다른 사람이 상담 사례를 공개적으로 발표하는 것을 들어보더라도 상담 목표와 전략 부분을 보면 어디서 카피 앤 페이스트 한 것 같은 뻔한 말들의 잔치가 벌어지는 광경을 목도할 때가 많다. 상담 목표와 전략이 그 내담자에게 정말 특화돼 있다고 여겨지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드물다. '인간이 경험하는 심리적 어려움이 그만큼 보편성을 갖는다는 얘기일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렇다 한들 상담자로서의 나는 보편적인 문제가 아닌 내 앞에 앉아 있는 내담자의 개별적 상황과 어려움에 초점을 둘 수밖에 없다.
인지행동치료의 사례개념화나 상담 목표 설정은 정신분석이나 인간중심상담, 대상관계 이론 등등에 치료적 지향을 둘 때보다는 명쾌한 언어이다. 뭔가 아귀가 딱딱 맞아 떨어지고 상담 목표에 얼마나 도달했는지 수치화하는 것을 중시하니 나처럼 직접 보고 직접 만져봐야 믿는 도마 같은 부류의 사람에게는 딱이다.
하지만 대학원에서 인지행동치료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배웠어도 사실 한국의 심리학과 대학원에서의 교육이라는 것이 상담이나 심리치료 실제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경우가 많지 않은가 싶다(누군가의 눈에는 과도한 일반화로 보일 수도 있다). 나는 지도교수님을 여러모로 존경하지만 아카데믹한 공간에 오래 있다 보면 당연히 상담 및 심리치료에 대한 감이 떨어지게 마련이라고 생각한다.(비슷한 이유로 방송 출연 자주 하는 사람도 신뢰하지 않는다.) 지도교수가 대학원 교육에서 포커스를 맞추는 것은 임상 실제가 아니라 연구를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같은 맥락에서, 인지행동치료를 어떻게 하는지 배웠다기보다 인지행동치료에 관한 연구를 정말 질리도록 봤다.
상담을 실제로 어떻게 하는지 어떤 식으로 회기를 전개하는 것인지 배우기 위해서 수퍼비전을 받고 있다. 아직 상담 수퍼바이저를 한 명밖에 두지 않아서 다른 수퍼바이저를 더 만나 보고(특히 인지행동치료 지향의 남성 상담자) 상담의 경험치도 쌓아 나가면서 시행착오를 거쳐야 할 부분인 것 같지만, 아주 기본적인 부분에서조차 막히는 것을 보면서 갈 길이 정말 멀었음을 실감한다. 심리평가 결과가 나오고 사례개념화가 돼도, 그 다음에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교과서에 실려 있지 않다. 실려 있다 하더라도 상담의 과정을 온몸으로 수없이 부딪힌 다음에 그 텍스트를 읽어야 텍스트에 생명력이 부여될 것이다.(춤과 비슷하다. 춤을 텍스트로 배우는 사람은 없다. 춤을 추다가 그 춤에 관한 깊이를 더하고 싶어 책을 읽어볼 순 있겠지만.)
상담심리전문가들이 50분 수퍼비전하는 데 최소 7만 원 이상을 받는다. 버는 돈에 비해 수퍼비전에 들어가는 비용이 더 크고 상담심리전문가가 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은 한 번쯤은 다단계에 빠진 것 같은 느낌도 받게 마련이다. 그런데 먼저 상담심리전문가가 된 사람들도 다들 자기 나름의 수많은 시행착오와 좌절과 무력감을 경험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 노하우를 전수 받는 대가로 50분에 저 정도 돈을 내는 것이 별로 비싸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헬스장 개인 PT도 1회기에 5만 원 이상은 하니까.
수퍼비전을 받다 보면 목표를 어떻게 세우고 목표 성취를 하기 위한 전략을 어떻게 설정하는 것이 좋은지에 대한 감이 생길 것이라고 믿는다. 이런 믿음에는 자서전적인 선례가 있다. 실제 재직기간을 고려하면 만 4년 정도의 기간 동안 족히 1000명은 넘는 정신과 환자들을 심리평가한 지금은 심리평가의 효용에 대한 의심을 전혀 하지 않는다. 심리평가는 분명 심리치료에 도움이 된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생겨난 것이지, 처음부터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심리평가가 유용하다는 개인적 믿음이 생기기까지는 꽤 많은 내적 갈등과 공부와 시간이 필요했다.
상담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한다. 역설적이게도 난 정신과에서의 수련 3년을 마친 직후에도 심리치료의 효용과 효과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이었다. 심리치료가 정말 효용이 있어? 근거에 기반한 치료(evidence-based therapy)라면서 무선화된 통제 시행(Randomized Controlled Trial) 강조하는데, 임상 현장에서의 실제 치료가 그 evidence들(=논문들)처럼 잘 통제되는 경우가 드물다면 그걸 evidence라고 볼 수 있을까? 치료 받고 좋아졌다고 한들 그게 정말 치료자의 역량 때문일까? 치료자가 파악하지 못 한 다른 외부 변수들 때문에 좋아졌을 가능성이 더 크지 않을까? 그래 좋다. 상담자 역량이 치료가 성공하는 데 있어 주요 변수였다 하더라도 그 치료 성과가 과연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첫 직장에서의 경험으로 인해 심리치료가 효과가 있다는 믿음은 생겼지만, 아직 흔들리는 믿음이다. 조기종결된 내담자까지 포함해서 올해 7~8사례를 진행했는데 이 중에서 뭔가 '좋아졌다', '나아졌다'고 생각할 수 있을 만한 내담자가 없다. 내담자에게 직접 물어봐도 '똑같아요', '오기 귀찮아요' 정도의 답을 듣는다(청소년들 위주로 상담하는데 애들이 솔직하다. ㅎ). 임상심리전문가가 되기 위해 수련 받던 3년 동안 만났던 10명 정도의 내담자 중에도 없었다. 이게 설령 상담자로서의 자기비판적 태도라든지 긍정적 아웃컴에 대해서는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며 평가절하하는 경향에 연관되는 것일 수 있다 하더라도, 어찌 됐든 간에 나와 관계 맺은 내담자가 변화되고 성장하는 모습을 한 번이라도 객관적 및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심리평가자에서 심리치료자로서 확고하게 발돋움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래서 이 다음에 뭘 어떻게 할 건데?’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거듭 던지면서, 불명확하고 모호한 상황에서 인내력을 발휘해야 하는 것인지 모른다. 무엇을 할 것인가? 일단 상담 장면에서 계속 엉덩이 붙이고 잘 버텨라. 조급한 마음 잘 달래고. 스스로에게 조언을 해본다.
- Skeleton Cupboard는 임상심리전문가인 타냐 바이런의 책 [소녀는 왜 다섯 살 난 동생을 죽였을까?]의 원제목입니다. 감추고 싶은 자신의 치부를 상징하는데, 이 책에서 타냐 바이런이 초보 심리치료자로서 경험했던 어려움들을 픽션 형태로 풀어놓은 것과 관련 있습니다. 심리치료자로서의 자신의 실수라든지 어려움에 관한 자서전에 가깝죠. 앞으로 스팀잇에서 Skeleton Cupboard를 종종 사용할 예정인데, 저와 같은 초보 상담자들에게 뭔가 조금이라도 위로가 됐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스팀잇에 동시 게재된 글입니다.
url: https://steemit.com/kr-psychology/@slowdive14/the-skeleton-cupbo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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