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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심리학/정신병리

경계선 성격장애와 양극성 장애의 관련성: 종단연구 결과

by 오송인 2019.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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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심리평가에서 경계선 성격장애 진단을 내렸는데, 주치의는 양극성 장애에 더 가깝다고 결론 내린 환자가 기억납니다. 이 분이 또렷하게 기억나는 건 심한 자해가 주기적으로 반복되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강한 진단적 확신이 주치의의 진단적 이견 제시로 흔들리는 경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종합심리평가를 통한 초진 환자에 대한 진단 자체가 가설일 수밖에 없습니다. 주기적인 외래 Follow Up을 통해 가설이 맞는지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한데, 검사 사인이 너무 명확하게 경계선 성격장애를 시사하고 있어서 내가 잠시 ‘가설로서의 진단’을 망각했구나 깨닫는 ‘아하! 경험’이 됐습니다. 주치의의 이견 때문에 내 생각이 맞았나 다시금 되돌아보는 경우가 때때로 있습니다. 하지만 진단에 대한 과도한 확신 때문에 주치의 이견이 놀랍게 느껴지는 경우는 흔치 않아서 기억에 또렷이 남았나 봅니다.  

 


 

본론으로 들어가면, DSM-4와 5에 실린 경계선 성격장애를 개념화하는 데 주요한 공헌을 한 정신과 의사가 제가 지금 소개할 논문의 저자인 John G. Gunderson입니다. 경계선 성격장애를 공부하려면 이 분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이 분이 2006년에 미국 정신의학 주요 저널 중 하나에 출판한 논문이 흥미로워서 소개해 봅니다. 경계선 성격장애와 양극성 장애의 관련성에 관한 논문입니다. 

 

앞서 언급한 환자의 경우, 경계선 성격장애와 양극성 장애 감별에 너무 초점 맞춘 사고 틀로 인해 ‘가설로서의 진단’뿐만 아니라 두 장애가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잠시 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 논문은 다른 성격장애보다 경계선 성격장애와 양극성 장애가 공존할 가능성이 높음을 알려줍니다. 하지만 ‘양극성 장애 스펙트럼’에서 경계선 성격장애를 볼 만한 결정적 증거는 없기 때문에 별개의 진단적 실체로 다루는 것이 적절하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합니다.  

 


 

경계선 성격장애와 양극성 장애는 감정의 불안정성, 극단적인 충동성, 우울증 등의 요소를 공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감별진단이 필요한 별개의 정신장애죠. 일반적으로 조증 삽화나 기분 고양 상태의 지속, 명확한 스트레스 요인이 없는 기분 불안정 상태가 나타나면 경계선 성격장애보다는 양극성 장애를 우선적으로 고려합니다. 반대로 우울이나 짜증/화가 자기파괴적인 양상으로 나타나고 특히 대인관계 스트레스에 처해 의도적이고 반복적으로 자살시도나 자해를 하는 경향이 나타나면 양극성 장애보다 경계선 성격장애를 우선적으로 고려합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수면 양상, 기분 상태 변화가 지속되는 시간, 자해 빈도, 대인관계 양상, 트라우마 히스토리 등에서 차이를 보일 수 있습니다

 

별개의 정신장애지만 양극성 장애의 ‘스펙트럼’상에서 경계선 성격장애를 재개념화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있을 정도로 두 장애는 밀접한 관련성을 지닙니다. 

 

Gunderson은 정확히 어떤 관계 양상인지 살펴보기 위해 경계선 성격장애를 지닌 196명의 환자와 경계선 성격장애 이외의 다른 성격장애를 지닌 환자 433명을 4년 동안 추적 관찰했습니다. 

 

연구의 주요 결과를 살펴보면 1. 기저선 측정에서 경계선 성격장애 환자가 양극성 I형 및 II형 장애 또한 지닌 비율이 19.4%였던 데 반해 기타 성격장애에서의 비율은 7.9%로 나타났고, 이러한 차이가 통계적으로 유의미했습니다. 2. 양극성 장애를 지니지 않았던 경계선 성격장애 환자 중 4년의 추적 기간 동안 양극성 I형 및 II형 장애 진단을 받게 되는 경우가 7.9%였던 데 반해 기타 성격장애에서의 비율은 3.1%로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차이가 나타났습니다. 3. 4년의 추적 기간 동안 경계선 성격장애 환자군에서 양극성 장애 여부에 따른 경계선 성격장애 관해(remission, 회복) 비율상의 유의미한 차이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전반적인 기능 수준, 입원 횟수 등에서도 차이가 없었습니다. 4. 기타 성격장애에서 양극성 장애 I형 혹은 II형 장애 여부에 따라 4년 추적 기간 동안 경계선 성격장애 진단을 받게 되는 비율이 유의미한 차이를 보이는지 분석한 결과, 양극성 장애를 지닌 경우 향후 경계선 성격장애 발생 비율이 23%였던 데 반해 양극성 장애를 지니지 않은 경우 향후 경계선 성격장애 발생 비율이 10%로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하지 않았습니다(p=0.07). 

 

결과를 요약하면, 다른 성격장애에서보다 경계선 성격장애 환자에서 양극성 장애가 공존할 가능성이 높고, 양극성 장애를 지니지 않은 다른 성격장애에서보다 양극성 장애를 지니지 않은 경계선 성격장애 환자에서 향후 양극성 장애 발생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양극성 장애 여부에 따라서 향후 경계선 성격장애 발생 가능성에 차이가 생기는 것은 아니며, 경계선 성격장애에서 양극성 장애가 수반되는지 여부에 따라 경계선 성격장애 관해 양상이 달라지는 것도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Gunderson은 경계선 성격장애와 양극성 장애가 관련성이 있으나 양극성 장애 스펙트럼상에서 경계선 성격장애를 논할 만큼 그 관련성이 강하지 않다(only a small association)는 것을 주장합니다. 

 


 

두 장애를 연속선상에서 논의할 것이 아니라 별개의 진단으로 보되 경계선 성격장애와 양극성 장애의 공존 가능성을 늘 타진하며 어느 한 쪽을 간과하는 일이 없는지 주의를 기울이라는 것이 이 논문의 임상적 함의입니다. 특히 양극성 장애를 지닌 환자가 경계선 성격장애 또한 지녔을 때 후자를 간과하게 되는 경우, 환자가 약물치료에 과도한 기대를 품을 수 있고, 이로 인해 기대 이하의 약물치료 효과가 나타났을 때 절망감에 사로잡힐 여지가 있습니다. 또한 경계선 성격장애 치료에서 주요하게 사용되는 효과적인 심리사회적 개입을 놓칠 수 있으니 임상가는 늘 유의해야 하겠습니다.  

 

ref)

Gunderson, J. G., Weinberg, I., Daversa, M. T., Kueppenbender, K. D., Zanarini, M. C., Shea, M. T., … Dyck, I. (2006). Descriptive and Longitudinal Observations on the Relationship of Borderline Personality Disorder and Bipolar Disorder. American Journal of Psychiatry, 163(7), 1173–1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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