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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심리학/상담 및 심리치료

상담 목표: 보이는 목표와 보이지 않는 목표 사이에서

by 오송인 2020.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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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 2년차에 잘한 일은 정신분석 지향 상담자에게 1년 동안 50회기 가까이 받은 상담이다.

 

이 상담에서는 특이하게도 치료 초반에 상담자가 상담 목표에 관해 언급하는 법이 없었고 이후로도 없었다.

 

아마 목표에 관해 얘기했을 수도 있으나 당시 짤막하게 적어내려 간 기록들과 내 기억을 더듬어 봤을 때 최소한 상호 간의 합의된 상담 목표는 없었다.

 

상담 교과서에서는 상담 목표를 상담자와 내담자가 첫 회기나 두 번째 회기 정도에 '협력적'이고 '구체적'으로 설정하라고 나와 있다.

 

상담 목표는 늘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교과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상호 합의된 목표고 다른 하나는 상담자가 생각하는 '보다 근본적인' 목표다.

 

이제 와서 돌아보면 상호 합의된 목표에 대한 강조는 인지행동치료에서 유달리 강조되고 있으나 다른 이론적 지향에서는 늘 그렇지만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 경험하는 어려움 중에는 눈에 보이기 때문에 변화가 '상대적으로' 쉬운 부분이 있고 눈에 보이지 않고 오래 지속되어 변화가 어려운 부분이 있다. 

 

인지행동치료는 시간을 금같이 여기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눈에 보이는 부분에 초점을 둔다. 특히 우울이나 불안을 통해 표현되는 심리적 어려움은 행동이나 동기적인 접근 방식을 통해 20회기 안에 눈에 띄는 변화를 이루어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애착에 연관된 뿌리 깊은 성격적 경직성은 그 자아동조적인 측면 때문에 심한 사회적/직업적 손상이 있지 않고서야 가시적인 문제로 인식되기 어렵다.

 

우울과 불안처럼 눈에 보이기 쉬운 증상은 늘 성격적 토양을 통해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발현하곤 한다.

 

따라서 심리치료는 늘 증상의 기저에 자리한 성격을 다루게 마련이다. 목표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나뉘는 이유이다.

 

내 상담자가 그랬듯이 어떤 상담자들은 보이는 목표 합의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있다. 염두에 두더라도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다.

 

한 사람이 경험하는 심리적 어려움의 성격적 토양을 변화시키는 것이 목표라면 이 목표를 공유할 것인지, 공유한다면 언제 어떤 식으로 할 것인지는 많은 부분 상담자가 결정하게 되는 것일 수 있다.

 

 

 

 

내가 상담을 50회기 가까이 한 것은(한 회기에 10만 원이니 500만 원이다) 그래도 무언가 좋은 쪽으로 변화되고 있다는 믿음이 있어서였고, 이 믿음을 갖게 한 것은 내 동기 수준보다도 상담자의 역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담 받으며 늘 그만 둬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는데 표면적인 이유는 돈이었고 근본적인 이유는 아마도 상담자-내담자 관계의 질에 관한 것이었을 테다.

 

일전에도 말한 적이 있지만 정신분석 지향의 상담자여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 상담자가 하는 일은 조금 과장 보태 껌을 씹고(내게도 늘 권했다) 졸린 듯 하품을 참으려 애쓰고 내 얘기를 잘 듣고 침묵이 이어질 때 같이 침묵하는 것이었다. 껌을 씹거나 초콜릿을 먹으면서. 

 

50분 상담에 10만 원 내는데 뭐 아무것도 하는 게 없다고 느껴지고 상담 중반 이후부터는 내 부정적 감정을 자극하기도 하니 정말 여러 번 그만 둘까 고민했다. 그럼에도 어쨌든 거의 50회기 채워서 종결했다.

 

몇 년이 지난 이후에야, 즉 수련을 마치고 결혼을 하고 상담자로서 다시 상담을 재개한 이후에야 서서히 내 주요 문제가 뭐였고 그게 상담 과정 중에 어떻게 해소되는 과정에 있었는지가 그려졌다.

 

그 상담자는 목표 설정뿐만 아니라 거의 아무것도 안 하는데다 가끔 나를 긁으며 화만 돋운다 생각했는데 사실 돌아보니 내 핵심감정으로까지 들어와서 내 성격의 경직된 부분을 많이도 변화시켰음을 알게 됐다.

 

 

 

 

이 때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일반화하기 어려울 수 있겠지만, 기능상의 문제가 뚜렷하지 않지만 성격적인 경직성이 있을 땐 대부분 자각 바깥의 영역이라 교과서에 나오듯 목표를 설정한다는 게 별로 의미가 없어지는 것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 

 

상담자 이론적 지향이나 상담 숙련도, 내담자 동기 수준, 경제적/시간적 여력 등에 따라 상호 합의된 목표를 안 잡기도 하는 것일까 생각해 보게 된다.

 

내담자가 경제적 시간적 여력이 없을 땐 특히나 더, 짧은 회기 수 안에 상담자가 가진 모든 역량을 '보여주고' 무언가 변화될 수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 동기 수준까지 낮다면 더더 그렇다. 안 그러면 상담에 안 올 것이다. 

 

사례개념화에 근거한 합의된 상담 목표는 상담자의 전문성을 보여주고 변화를 이끌어 내고 상담자-내담자 사이의 신뢰를 다지기에 좋은 수단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상담이 거듭되면 사례개념화도 거듭 수정되고 목표는 성격이라고 하는 보다 근본적인 지점에 다다르는데, 이 목표 설정에 내담자를 마냥 끌어들이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

 

변화가 필요한 성격적 특성이 내담자에게 근본적 불안을 야기하고 이 불안을 어떻게든 직면하지 않으려고 다양한 대처 전략을 구사하는 게 사람 마음의 작동 원리임을 고려할 때, 상담자가 내담자를 끌어들여 바로 본론 혹은 핵심으로 들어가는 것은 반치료적이기도 하다.

 

상담자-내담자 간의 신뢰가 충분히 형성됐고 내담자가 여러모로 준비가 되었다고 판단이 될 때 비로소 보이지 않는 목표에 관해 허심탄회하게 얘기할 수 있다.

 

내 상담자가 상담 중반부 이후에도 보이지 않는 목표를 얘기하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상담자가 생각하기에 아직 라포 형성이 잘 되지 않았다고 느꼈기 때문일 수 있다. 혹은 애초에 무의식의 심연을 다루는 데 목표 같은 것은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고 보았을 수도 있겠다

 


 

이유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수련 3년차에 수련수첩 정리하고 사례발표 준비한답시고 종결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좀 흐지부지 상담을 끝낸 감이 있다.

 

조금 더 상담을 계속 했더라면 진짜 내 참모습을 그 상담자에게 보였을 수 있겠고, 그러면 난 더 많이 변화됐을 것이라 확신한다.

 

아쉬운 부분이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 둘의 아빠로서 고군분투하는 요즘 그 상담자가 많이 생각난다. 배우자와의 관계 때문이 아니라 육아에서 내 본모습을 직시하는 것이 상당히 좌절스럽고 실망스럽고 괴로울 때가 있기 때문이다. 

 


 

다음에 또 상담을 할 날이 올지 모르겠으나 내 안에는 인식은 하고 있으나 해결하지 못 한 숙제가 있고, 내가 상담에 별로 자질이 없다고 느낄 때가 많지만 그럼에도 상담자로서의 공부와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은 풀지 못 한 이 숙제와도 관련이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제프리 코틀러가 얘기했듯이 상담자가 되기 위한 무의식적 동기 중 하나는 '자기구원'이다.

 

모든 상담자는 나이가 많든 적든 자기 문제를 지닌다. 문제가 없다, 나는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상담자는 상담을 하면 안 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내 숙제 때문에 내담자에게 해가 되는 일이 없도록 늘 수퍼비전을 받으면서 목표를 어느 수준으로 개방하여 상호 협의해야 하는지 늘 고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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