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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경제학자도 피해갈 수 없는 체계적 비합리성의 함정
Follow the Anomalies | Hidden Brain
- 국내에서 넛지라는 책으로 널리 이름을 알린 리처드 탈러가 인터뷰이로 등판한 히든 브레인 에피소드입니다. 2017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행동경제학자이기도 하고요.
- 이 에피소드를 들어보면, 탈러가 주로 연구하는 분야는 의사결정 과정에서 발생하는 체계적인 편향인 것 같습니다. 말이 어렵죠.
- 2차 세계 대전 이후 경제학자들은 합리적으로 의사결정하는 인간을 경제학 이론의 대전제로 삼아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 하지만 1970년대부터 인간이 지닌 비합리적 의사결정에도 연구의 초점이 맞춰지기 시작합니다. 당시에는 마이너한 분야였고, 그 선봉에는 2002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아모스 트버스키와 대니얼 카너먼 있었다고 합니다.
- 1974년에 박사 학위를 취득한 탈러는 학회 컨퍼런스에서 만난 트버스키의 제자를 통해서 자신과 비슷한 관심 주제를 지닌 사람이 있음을 알게 되고, 학교로 돌아와서 트버스키의 논문을 찾아서 읽게 됩니다. 그 논문이 바로 불확실한 상황에서의 판단 : 어림짐작과 편향 Judgment under Uncertainty: Heuristics and Biases입니다. 1977년에서 78년에 탈러는 스탠포드에서 트버스키와 카너먼을 직접 만나게 되고 친분을 쌓았다고 합니다. 이 세 사람은 행동경제학이라는 분야의 선구자입니다.
- 행동경제학은 경제학과 심리학의 자식입니다. 인간은 늘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않으며, 비합리적이고 때로는 자신에게 해가 될 수도 있는 판단을 내립니다.
- 중요한 것은 이러한 비합리적 판단에 어떤 일관된 경향이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행동 경제학자들은 비합리적 판단이 무작위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이 아니라 어떤 이론이나 공식에 의해 예측 가능한 현상임을 입증해 왔습니다. 또한 행동경제학에서는 비합리적 판단의 경향성을 고려함으로써 보다 효과적인 정책이나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 탈러가 행동경제학의 이론을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이야기로 풀어서 설명한 책이 행동경제학 : 마음과 행동을 바꾸는 선택 설계의 힘입니다. 밀리의 서재에 있어서 잠깐 살펴보니, 합리적 판단을 내리는 인간을 가정하는 경제학의 법칙에 위배되는 일상 에피소드 모음집 같습니다.
- 이 책에 소개되는 이야기 중 일부를 히든 브레인 에피소드에서 풀어내고 있습니다.
- 그 중 한 가지 꼽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탈러가 묻습니다.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총기 사망 사건에서 살인과 자살 중 어느 쪽의 비중이 더 높을까요?” 저는 살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답은 자살입니다. 매스컴에 더 빈번하게 보도되는 것은 자살보다는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 쉬운 살인입니다. 이처럼 자살보다는 살인이 더 현저한 현상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은 어림짐작에 근거하여 살인이라는 편향된 결론으로 나아가기 쉽습니다.
- 경제학과 학과장이자 탈러의 친구인 리처드 로젯이 비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을 목도한 이야기도 흥미롭습니다. 로젯은 오래 전에 10달러 짜리 와인을 사서 지하실에 보관했고, 시세가 올라서 100달러에 그 와인을 사겠다고 하는 상인도 있었습니다. 로젯은 기념일에 그 와인을 꺼내 마시면서 100달러나 주고 이 와인을 사지는 않을 거라고 말합니다.
- 100달러에 팔 수 있는 와인을 마시는 행위에는 100달러의 기회비용이 따릅니다. 그런데 왜 100달러를 주고 이 와인을 사지는 않을 것이라 말할까요. 탈러에 따르면 100달러의 기회비용은 추상적이지만, 내 지갑에서 나가는 100달러는 구체적이고, 구체적인 만큼 더 큰 손실감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경제학자로서 로젯은 그런 자신의 태도가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도 별도리가 없다.”
남성이 지닌 우울이 세대 간에 대물림되는 방식
Terry Real: Breaking the cycle of shame, anger, and depression
- 심리치료자인 테리 리얼은 1998년에 I Don’t Want to Talk About It: Overcoming the Secret Legacy of Male Depression이라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의 어려움, 일중독, 알코올 중독, 폭력적인 행동 등을 우울증의 맥락에서 이해하고자 합니다.
- 위에 링크한 유튜브 팟캐스트 에피소드에서 테리 리얼은 어린 시절 경험한 부의 폭력을 회고하면서, 우울증이 어떻게 세대 간에 대물림될 수 있는지 설명합니다. 테리 리얼의 할아버지는 그가 운영하던 소규모 상점을 폐업하고 아내와도 관계 갈등을 경험하면서 어린 두 아들과 함께 죽으려는 시도를 합니다. 다행히 테리 리얼의 아버지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평생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에 시달렸고, 자신의 둘째 아들인 테리 리얼을 신체적으로 학대했던 것 같습니다.
- 이러한 유년기는 테리 리얼이 심리치료자의 길을 걷게 된 하나의 동기가 됩니다. 자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버지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 알아야 했다고 말합니다. 과거에 관해 일체 언급하지 않던 아버지는 심리치료자가 된 테리 리얼에게 앞서 언급한 트라우마를 이야기합니다. 이는 [I Don’t Want to Talk About It]의 모티프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 가부장제 안에서 남성은 성취를 이루어야 하고 강인함을 증명해야 하는 압력을 받게 됩니다. 약한 것은 죄악시되고, 자기비판에 수반되는 수치심을 경험하더라도 곧 과대성이나 병적인 자기애로 명명될 수 있는 방어기제가 작동하면서 무의식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약함과 수치심을 전가해 버립니다. 혹은 섹스 중독, 알코올 중독, 폭력과 같은 방식으로 내면의 부정적 감정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이는 일시적으로 기분 좋은 느낌을 갖게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대인관계의 큰 어려움을 야기합니다.
- 테리 리얼에 따르면 수치심과 같은 감정은 내현적 우울(Covert Depression)에, 과대성이나 병적 자기애, 알코올 중독, 폭력 등은 외현적 우울(Overt Depression)에 연관됩니다. 가부장제의 사회문화적 압력을 받는 남성은 여성에 비해 외현적 우울을 경험하기 쉽습니다. 외현적 우울은 비록 그것이 대인관계 어려움으로 이어진다 하더라도, 자율성을 유지하며 외부 세계를 통제한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외현적 우울은 부적응적인 방식으로 표출되는 우울이지만, 최소한 내가 약하지 않다는 느낌을 유지할 수 있게 돕는 기능적 특성을 지닙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현적 우울을 지닌 남성은 아내나 자식과의 관계계에서 친밀감을 경험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언어적/신체적 폭력을 사용하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특히, 남성 가장의 실직과 가정 내 폭력이 발생할 가능성은 대체로 높은 관련이 있습니다. 테리 리얼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알코올 중독에 취약한 성격 특성을 지녔다면 그 가능성은 더 높아질 것입니다. 부의 과대성이나 폭력에 노출된 자녀는 외현화된 우울을 대물림 받아 다시 자녀에게 대물림하는 악순환이 초래되기도 쉽습니다.
- 이 악순환을 어떻게 끊어야 할까요. 테리 리얼은 가부장제가 제시하는 고정된 성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특히 수치심의 경험을 비롯하여 자신이 취약하다고 느끼는 순간에, 이런 느낌에 맞서 싸우기보다 있는 그대로 감정을 수용할 필요가 있음을 말합니다.
- 일례로, 관계 갈등이 발생할 때마다 배우자에게 소리치고 화내면서 자신의 의존적인 면을 부인해 왔던 남성 내담자에게 테리 리얼이 말합니다. “내가 배우자에게 화가 난다는 건 내가 의존적이라는 뜻이고, 나 자신이 의존적이라는 사실을 싫어하거나 믿지 못한다는 뜻이고, 이는 내가 의존적이라는 사실에 무력감을 느낀다는 뜻이죠.”
- 내가 약할 때 약하다고 인정할 수 있는 능력이 관계 회복의 첫 걸음입니다. 우울한 기분이든 실직으로 인한 스트레스이든 난관을 극복하지 못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이든 간에 애써 억압하고 부인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경험하고 주변에 도움을 구하는 것이 관계 회복의 시작입니다.
- 테리 리얼은 수십 년 동안의 치료 경험을 녹여 Relational Life Therapy라는 심리치료 프레임을 만들었습니다. 관계의 힘이 어느 한쪽에 너무 치우쳐 있을 때 힘이 약한 쪽에 무게를 실어 관계의 균형을 맞추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뿐만 아니라 한 개인의 내면에서 수치심과 자기애가 힘의 균형을 이루지 못할 때 치료자는 내담자와 함께 힘이 약한 쪽에 더 힘을 싣고자 노력하게 됩니다.
- 특히 외현적 우울을 경험하는 남성 내담자가 수치심을 비롯하여 그간 억눌러 온 내적 경험을 수용하고, 방어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그 경험을 가까운 사람과 공유할 수 있다면, 조화로운 관계가 가능하며 우울의 대물림을 막는 것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 분노 조절의 어려움이나 술 문제 등으로 인해 가족 구성원과의 관계에서 반복적으로 어려움을 경험해 온 남성이라면 [I Don’t Want to Talk About It]의 번역서인 남자가 정말 하고 싶은 말에서 객관적 자기 이해의 실마리를 얻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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