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번째인가 10번째인가 가물가물하다.
시험장 가면 익숙한 얼굴들이 많다.
결국 비슷한 시기에 수련을 마칠 분들이라 인사도 하고 어느 선생님 밑에서 공부하셨는지 시험 준비는 혼자 하시는지 논문은 뭘로 쓰셨는지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지만, 나 혼자 남자라 껄떡대는 것처럼 보이는 게 싫어서 그냥 조용히 있다가 시험 끝나면 쏜살 같이 나온다.
시험 치고 나오니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병원 앞에서 가래떡을 할머니가 맛있게 구워서 팔고 있길래 천 원에 두 개 사먹었는데
진짜 맛있었다.
좀 걸으려고 병원 순환버스를 안 탔는데 한남역에 오니 눈이 한 웅큼 어깨와 머리에 쌓여 있었다.
한남역 역사는 지상에 위치해 있는데, 선로 위로 눈 내리는 풍경이 다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주로 배달 계통의 알바를 해와서 눈 내리는 게 싫은데, 오늘은 꽤 아름답게 느껴졌다.
무급이든 유급이든 수퍼바이저 선생님 평판이 좋든 나쁘든
합격하는 데가 내 자리려니 생각하고 뼈를 묻으리.
암튼.. 오늘 시험에서 좀 특이했던 것은, 2교시에 문장완성검사를 했는데 좋아하는 영화나 드라마의 대사나 장면을 적으라, 올 한 해 감명 깊게 읽은 책이 뭔지 그 이유는 뭔지 설명하라, 즐거운 인생을 위해 어떤 것들을 하고 있는가, 축2 진단 중 자기랑 닮은 게 뭐냐, 수련생활 중 발병 많이 한다고 하는데 어떤 장애가 발병할 것 같으냐, 수련 생활에서 제일 힘들 것 같은 점이 뭐냐 등등 솔직한 답변을 요구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 문제는 채점자가 빵 터질 만한 유머를 적으라는 것이었다.
유머는 생각이 잘 안나서 아래 심슨 만화를 인용했는데
그림 없이 문장만으로 전달했으니 '이 XX는 뭐지'라고 생각하시지 않을까 걱정된다.
다 쓰고 보니 이 얘기 저 얘기 왔다 갔다 하는 게 연상의 이완 같다. ㅋㅋ
기왕 적은 거 관련 없는 얘기 몇자 더 적으면,
몇달 전에 학부 졸업하고 나서도 종종 만나는 후배가 책을 하나 선물해 줬는데
기독교 신앙서적이다.
이 책에 보면 이런 삽화가 있다.
낡고 초라해서 누구라도 거들떠 보지 않을 그런 바이올린이 경매에 나왔다.
사람들은 정말 거들떠도 보지 않고 빨리 다음 물건이 나오길 기다린다.
그런데 이 때 어떤 노신사가 그 악기를 한 번 줘보라고 한다.
그는 왕년에 바이올린을 좀 켜본 사람인지 먼지를 털어내고 세심하게 바이올린을 조율한다.
이후 그 노신사가 고물 같았던 바이올린으로 연주한 음악에 장내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감동한다. 어떤 이는 심지어 눈물마저 보인다.
자신이 낡고 초라한 바이올린 같다고 느껴질 때,
그 안에 담겨진 가능성을 알아주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뿐이고 하나님의 손길을 통해서만이 우리의 가능성이 온전히 현실화될 수 있음을 은유한 삽화다.
이 글 보면서 시발 코끝이 찡했다.
논문 잘 마무리했고, 그것만으로도 족하다고 생각했지만, 시험에 계속 떨어지니 참.. 스스로가 고물 바이올린 같다고 느꼈었나 보다.
이래저래 고난은 심령을 가난하게 만들고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만들며 다른 사람의 아픔을 더 잘 볼 수 있게 만든다는 측면에서 무익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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