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달 반만에 다시 덕유산을 찾았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라 다섯 명의 일행이 있었다.
후지락 같이 갔던 친구 두 명과 내 친구 두 명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서로 처음 봤고 어쩌다 보니 이번 여행까지 추진하게 됐다.
내 친구 두 명 중 한 명의 여자친구까지 해서 총 여섯 명이라는 인원이 된 것인데, 출발 전부터 부담이 조금 있었다.
혼자 가는 거야 아무 문제가 없지만 이 정도의 인원을 1박 2일 동안 안전하게 하산길까지 인도할 수 있을까 걱정이 많이 됐다.
지리산에 비해 덕유산이 아무리 만만해도 겨울산은 늘 위험이 산재해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지난 토요일에 남부터미널에서 7시 40분에 출발.
일행 중 한 명이 4분 차이로 차를 못 타서 9시 차를 타고 오기도 했다.
무주 리조트에 11시 20분쯤 도착했는데 곤돌라 탑승 대기 시간이 3~4시간이라는 말에 멘붕에 빠졌으나 하늘이 도왔는지 곤돌라 왕복 탑승권 여섯 장을 가진 아저씨 한 분이 다가와서 표 필요하지 않냐고 물어보더라.
당연히 그 표가 필요했고 그 표가 없으면 다시 집에 가야 하는 상황인지라 제대로 된 티켓이 맞나 사기 아닌가 1초 정도 의심하다가 일행과 상의 끝에 그 표를 사기로 결정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어떻게 우리 일행 수와 같은 여섯 장의 티켓을 구할 수 있었는지 놀랍기만 하다.
구입한 티켓의 대기번호는 한 시간 정도 기다리면 탈 수 있는 순번이어서 기다리는 동안 푸드코트에서 핫도그로 간단하게 점심을 해결하고, 7시 40분 차를 놓친 일행이 합류하기를 기다렸다.
대기번호가 넘어가면 곤돌라를 탈 수 없기 때문에 차 놓친 일행이 곤돌라 타기 전까지 와주기를 기도했는데 다행히 시간 맞춰 와서 여섯 명 모두 곤돌라 타고 설천봉까지 오를 수 있었다.
설천봉에서 아이젠 등을 끼우고 출발하려니 1시였다. 산은 해가 지면 정말 위험하기 때문에 이 때부터 다시 걱정 시작. 이 많은 인원을 데리고 무사히 대피소까지 갈 수 있을까 불안하고 마음이 급했다.
하지만 지난 번과 마찬가지로 향적봉까지 가는데 사람이 정말 많았다. 거북이 걸음이었다.
곤돌라 타고 올라와서 향적봉 구경하고 다시 곤돌라 타고 내려가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중에는 등산 스틱을 수평으로 들고 가는 무개념 아줌마도 있었고 좁은 길을 막고 사진 찍는 데 열중인 사람도 있었다.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인간이 있음을 실감하며 향적봉까지 올랐고, 여기서부터 속도를 내려고 했으나 바위와 계단을 눈이 가득 덮고 있는 데다가 살얼음 낀 곳도 있어서 길이 상당히 미끄럽고 위험했다.
아니나 다를까 일행 중 한 명(이하 N으로 지칭)이 엉덩방아를 찧고 한참 미끄러졌다.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이 때부터 N에게는 덕유산의 시련이 이어지게 된다.
눈 덮힌 덕유산은 상상했던 것만큼 절경이었고 에베레스트 안 부러웠다.
하지만 N의 체력이 매우 좋지 않아서 N의 남자친구(이하 L)와 나는 그 절경을 구경할 틈이 없었다.
동엽령에 도착했을 때 이미 시간이 많이 지체 돼 하산하자고 주장했으나 다들 대피소까지 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해서 그 의견대로 했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선택을 잘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겨울 야간 산행은 목숨을 건 미친 짓이니 해 지기 전에 지체 없이 하산하는 게 맞다. 산에서는 해도 빨리 진다.
동엽령에서 조금 더 가서 여자 둘에 지각한 남자 일행까지 셋을 먼저 대피소로 보냈다. 남자 일행에게 랜턴이 있었고 셋은 체력이 괜찮았기 때문에 쉬지 말고 쭉 가라고 했다. 안 쉬고 가면 해 떨어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나와 N과 L에게는 랜턴이 두 개 있었고 이미 야간 산행을 마음 먹은 상태였다. N은 네 걸음 걷고 한 번 쉴 정도로 컨디션 난조였고 L이 N 뒤에서 N을 밀고 가다시피 했다. N의 가방은 내가 짊어진 상태였다.
삿갓재 대피소를 2.5km 남겨 둔 지점인 무룡산에서 해가 완전히 졌고, 이 때부터 밤 산길을 걸었다. 다행히 눈 때문에 칠흑 같이 어두운 정도는 아니었고 랜턴 없이도 어느 정도 시야 확보가 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발 잘못 딛어서 경사 심한 측면 비탈로 구를 수 있는 위험이 항상 있었기 때문에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다만 전화도 터지고 인터넷도 되는 상황은 큰 심리적 위안이 됐다.
삿갓재 대피소를 1.5km 정도 남겨둔 상황에서 대피소에 전화해서 늦는다고 말했고, 먼저 간 일행 셋이 도착했는지 물어보았는데 도착하지 않았다고 해서 또 걱정 시작.
도착할 때가 됐는데 왜 도착을 안 했을까 싶어 바로 전화를 했는데 방금 전까지만 해도 터지던 전화가 이상하게 안 터졌다. 그래서 카톡을 남겨 놓았는데 15분 정도 뒤에 대피소 도착했다고 연락이 와서 안심했다.
우리도 7시 40분경 대피소에 도착했고 긴장이 풀리니 피곤이 몰려 왔다. 지난 가을에 4시간 30분도 안 걸렸던 거린데 무려 6시간 50분이 걸렸다.
9시 소등이라 취사실에서 준비해 온 전투식략을 놓고 다 같이 저녁을 먹었다.
산에서 먹는 건 뭐든 맛있는데 이 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 같이 소주와 맥주로 입가심도 했다.
밥 먹고 자려고 누웠는데 예상했던 대로 코골이 합창이 시작됐고 잠 못 이루다가 밖에 나가서 밤하늘 별을 한참 동안 봤다. 가을에 왔을 때보다 별이 훨씬 많아 보였다. 아름답고 또 아름다웠다. 우주 속의 먼지와도 같은 존재인데도 마치 우주의 중심인 양 에고센트릭하게 살고 있지 않나 생각해 보게 되더라.ㅎ
다시 들어와서 자려는데 오늘 제일 고생한 L도 잠 못 이루고 뒤척여서 자정에 밖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다음 날엔 남덕유산 넘어서 영덕사로 내려가는 힘든 코스를 버리고 4km밖에 안 되는 황점마을로 하산했다. 남덕유산 정상 풍경이 향적봉보다 훨씬 더 아름답기 때문에 그 쪽으로 가고 싶었지만 N이 매우 지쳐 보였고 나 또한 주변 풍경 볼 새도 없이 힘들게 하산하는 것보단 여유롭게 하산하는 편이 낫다고 여겨졌다.
하산 길에는 사진도 많이 찍었고 서상터미널 근처에서 먹은 어탕과 막걸리 및 맥주도 꿀맛이었다.
거나하게 취해서 서울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두 시간 정도 잤다.
이번 여행의 묘미는 덕유산 풍경이었다기보다 같이 간 사람들이었다.
N 덕분에 야간 산행도 하고 평생 잊지 못할 에피소드로 남을 것 같다. ㅎㅎ
내년쯤 자전거 세계 여행을 하게 된다면 안상은님처럼 각국의 사람들과 어울리는 시간을 여행의 주안점으로 두게 될 것 같다. 풍경은 사실 풍경일 뿐이다. 이번에 확실히 느꼈다.
땀 흘리는 표정이 N, 웃는 표정이 L, 제일 오른쪽이 나. 무언가 모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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