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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일상

2011.01.08 00:00

by 오송인 2016.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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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직시하는 것은 하이데거 같은 사람에게는 삶에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하나의 놀랄 만한 사건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고통과 슬픔의 근원적인 이유를 보지 않을까 싶다(최소한 그것을 보려 하기라도 한다면 말이다). 죽음을 떠올리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일 수 없고, 어떤 교수님 말마따나 대부분의 종교가 내세의 극락을 상정하는 이유도 죽음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범인의 경지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비단 실제로 죽는 것뿐만 아니라, 좀 더 포괄적인 의미에서 친밀한 대상의 상실이나 가까운 사람들의 거절은 그 자체가 '나'라는 존재를 작은 죽음들에로 몰아 간다.

그렇다면 모든 의미를 소멸시키고 모든 가능한 것들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리는 죽음 앞에 선 인간이 대체 어떻게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질 법도 하다. 이런 질문에 대답한 철학자들이 이 사람뿐만은 아닐 테지만, 레비나스는 "자기 중심적인 존재 의미 부여에서 필연적으로 야기되는 죽음에 대한 불안은 타자를 위한 선행을 통하여 사라지고 만다"라고 말하고 있다.(타인의 얼굴, 강영안, 38쪽.) 

인용해 온 문장에 내포된 레비나스의 생각은 상식적인 수준에서 내가 이해하고 있는 불교적인 전통에 맞닿아 있는 것이기도 하다. 저 문장을 잘 보면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자기 중심적인 존재 의미 부여다. '나'라는 존재가 없다면 죽음이라 한들 두려울 이유가 없다. 너도 아니고 네 부모님도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 죽는다고 생각하니 불안한 것이다. 이런 삶의 근원적인 불안(혹은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레비나스가 제시하는 해법은 선행을 통해 관심의 초점을 나 자신으로부터 타인에게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타인도 죽는다. 나와 마찬가지로 소멸할 운명에 처한 타인에 대한 헌신은 나의 불안을 감소시킬 수 없다는 게 레비나스의 진단이다.

이런 흐름에서 그가 주목하는 것은 자식이다. 자식은 '타자가 된 나'다. 자식을 통해 부모가 되는 경험은 삶에 확고불변의 의미를 부여한다. "나는 아버지가 됨을 통해 나의 이기주의, 나에게로의 영원한 회귀에서 해방된다."(같은책, 158쪽.) 결혼을 하고 부모가 되는 경험은 상징적인 수준에서 예수님의 부활과 동일한 경험이며, 성경 어느 구절에서처럼 옛 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이 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핵가족 사회에 더해 학벌 사회 라는 특성이 첨가되는 한국적 특수성 속에서 다른 사람들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내 자식만 잘 되면 된다는 부모의 왜곡된 사랑이 문제시 될 소지가 있으나, 현실적으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타인에 대한 높은 수준의 헌신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최소한 제 자식에게 행하는 헌신을 통해서나마 인간이 자기중심적인 속성에서 벗어나 삶의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고 보는 레비나스 생각이 꽤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하려던 얘기에서 좀 벗어난 감이 있는데, 어쨌든 이 사람이 자기 철학을 통해 일관되게 주장하는 건 타인(대표적으로 성경에서의 과부와 아이들처럼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의 얼굴을 외면하지 말고 그들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책을 읽다가 '나에계로의 영원한 회귀에서 해방된다'는 구절이 아름다워서 몇자 적는다는 게 길어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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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1학기 끝나고 겨울 방학 무렵에 쓴 글인데 얼마나 깔끔하게 잊혀졌는지 다른 사람이 쓴 글 같다. 하지만 지금 하고 있는 생각들을 이 때도 하고 있었던 것을 보면 내가 쓴 글이 맞긴 맞나 보다. 기억은 소실되는 게 아니라 어딘가에 파묻혀 있는데 단지 인출이 어려울 뿐인 것이라는 주장을 떠올리게 되는 대목. 시간도 많은데 레비나스를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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