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심리적 특성이든 기능적인 측면도 있고 역기능적인 측면도 있다. 기능/역기능을 판가름하는 건 그 사람이 어떤 생활 환경 안에서 누구와 관계 맺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똑같은 특성이라도 맥락에 따라 기능적으로 작용하기도 하고 역기능적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수많은 예가 떠오르는데, 로샤에서 FD는 자신을 내성하는 능력과 연관된다. 자신을 내성할 수 있다?! 얼핏 들으면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내성이 지나치면 좋지 않은 경우가 있다. 자신의 부정적인 측면을 계속 내성하는 것은 역기능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것을 반추라고 한다. 내성이 지나치지 않더라도 좋지 않은 경우가 있다. MMPI에서 L 척도가 높은 사람의 경우를 보자. 그런 사람이 대인관계 갈등 상황에서 내성 능력을 발휘하면 어떻게 될까? 문제의 원인이 자기한테 있다고 판단하기보다 다른 놈에게 있다고 확증하는 편향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심리평가라는 것은 그 특성이 맥락에 따라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지, 잘 기능하고 있다면 어떻게 잘 기능하는지 혹은 역기능을 초래하고 있다면 어떻게 역기능을 초래하고 있는지 짚어줘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 어떤 심리적 특성이 어떻게 역기능을 초래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설명할 수 있지만 어떻게 기능적으로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에서는 한없이 부족함을 느끼고 있다. 이건 사실 그 심리적 특성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것과 동의어에 가깝다.. ㅜ
전문가 자격 취득 직후에는 심리평가 그만 하고 심리치료나 상담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이젠 그렇지 않다. 다른 것을 잘하기 전에 최소한 이 평가 영역에서 효능감을 갖는 게 중요하다. 베이스캠프가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산에 오르면 죽는다. 정상까지 가는 루트를 찾는다 하더라도 베이스캠프를 튼튼하게 지어가면서 조금씩 활동 범위를 확장해 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대학원 때 심리평가를 가르쳐주던 임상심리전문가 선생님이 읽어볼 만한 책을 추천해 주면서 그 책 목록 끝에 '겸손하게 정진하자'라고 써놓았던 것이 어렴풋하게 기억난다. 내 눈에는 평가와 치료 영역 모두에서 '타고났다'고 생각했던 선생님이 써놓은 말이라 더 기억에 박힌 것 같다. 지금 내게 딱 필요한 말이 아닐 수 없다. 데드라인이 코앞이라 시간 없는데 이렇게 또 삼천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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