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슬프게 하는 것도 나고, 나를 화나게 하는 것도 나라는 것이 인지치료의 기본 입장입니다. 상황은 언제나 중립적인 자극이며, 그 중립적인 자극을 해석하는 내 생각으로 인해 다양한 색깔과 깊이를 지닌 감정이 야기된다는 것이죠.
어제 좀 화가 나는 일이 있었는데, 필링굿에서 데이빗 번스 박사가 말하는 화를 유발하는 인지 왜곡의 유형을 읽으면서 제 인지 왜곡을 더듬어 볼 기회를 가졌습니다. 화가 좀 누그러지더군요.
분노를 증폭시키는 데 영향을 미치는 인지 왜곡으로서 번스 박사는 1. Labelling 2. Mind Reading 3. Magnification 4.당위적 사고 등을 꼽습니다.
라벨링은 일전에도 말한 바 있지만 인간을 추상적 단어에 가둬버리는 행위입니다. 나는 루저야, 나는 겁쟁이야, 나는 소심해 등등 주로 부정적인 단어로 자신을 규정짓게 되면 우울해지기 십상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도 라벨링하기 쉽죠. 제 딸이 잘 시간인데 침대에서 엄마와 잠에 들지 못 하고, 침대에서 내려와 불이 켜진 제 방으로 올 때가 가끔 있습니다. 그럼 전 두 가지 마음이 들죠. '아.. 공부해야 되는데.. 왜 안 잔담.. 성가시다'라는 마음이 들고(성가신 아이로 라벨링), 한 편으로는 '햐.. 많이 컸네 자기 발로 침대에서 내려와서 여기까지 걸어오다니..(대견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로 라벨링)'라는 마음이 듭니다. 그 날의 체력 방전도가 얼마만큼이냐에 따라서 생각의 무게가 첫 번째 경우에 더 실리기도 하고 두 번째 경우에 더 실리기도 합니다. 첫 번째 경우라면 짜증이 나겠죠. 빨리 공부 끝마치고 자고 싶은데 시간이 딜레이 되니 짜증이 납니다. 두 번째 경우라면 행동이 벌써 달라지죠. 딸을 안고 볼에 뽀뽀를 해줍니다.
제 딸을 예로 들었지만 직장에서의 예를 한 번 들어볼까요. 직장 상사는 대개 좋은 이미지를 지니기가 어렵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ㅎ 제 전 직장 상사가 그랬는데, 전 그를 분노유발자이자 악으로 규정하곤 했습니다. 이런 분열된 마음에는 역사가 있게 마련입니다. 하루 아침에 한 사람이 악으로 라벨링되진 않죠.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나를 화나게 만든 상대방의 의도에서 선함은 1도 찾아볼 수 없다며 모 아니면 도의 이분법적 사고를 전개하는 것은 그 생각을 하는 이의 스트레스 게이지가 심하게 올라간 상태임을 가리키는 가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상식적인 얘기지만, 마음에 여유가 없으면 생각도 극단으로 빠지죠. 이런 생각이 지속되면 편집증적인 양상으로 발전하기 쉽습니다.
어떤 사람이 너무 X같고 XX 같아도(X는 여러분의 취향에 맡깁니다 ㅎ) 세상만사 선과 악이 공존한다고 보는 게 보다 더 객관적인 사고일 수 있겠죠. 상대방 행동의 숨은 뜻을 다소 화가 좀 가라앉은 뒤 돌아보니 그 행동에 날 염려하는 마음이 담겨 있을 수도 있겠다 싶어지는 때도 분명 있습니다. 돌아보면 비판을 위한 비판이었다기보다 상황을 보다 좋은 쪽으로 개선하기 위함이었다고 볼 여지가 분명 있을 때조차, 분노의 화마에 휩싸여 있을 당시에는 상대가 나를 엿먹이려고 이런 식으로 구는 거 아닌가 심정적인 확신을 갖게 될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상대방의 의도를 제멋대로, 그리고 악의적인 방식으로 재단하는 것을 Mind Reading이라고 합니다. 우리말로는 독심술이죠. 인간은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습니다. 누군가와는 보다 더 악한 방식으로 누군가와는 보다 더 선한 방식으로 관계 맺을 따름이겠죠. 악한 방식으로 관계 맺고 있을 때조차 그 사람 행동의 동기에 1의 선함도 없다고 가정하는 것은 불합리합니다.
여기서 조금 더 복잡해지는 것은 행동의 동기라는 것이 의식적인 부분보다 무의식적인 부분이 더 많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첫 눈에 반해 결혼까지 했다고 할 때는 그 사람에게 반한 여러가지 포인트나 이유를 설명할 수 있겠지만, 무엇이 정말 나와 그 사람의 불꽃을 튀게 만든 것인지 인간이 얼마나 알 수 있을까요? 절반 정도 알 수 있다고 해도 많이 아는 것 아닐까 싶어지네요. 인간은 자기 행동의 동기조차 정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그 설명이란 것도 대개 검증해 봐야 하는 가설일 뿐이죠. 하물며 다른 사람의 동기에 대한 가설을 마치 진실인양 믿는 것은 어떨까요. 제가 누군가에게 행여 X같이 행동한 것처럼 비춰질 때조차 저는 제 와이프의 믿음직한 남편입니다. 저는 이 생각을 XX처럼 보이는 누군가에게도 적용하며 마음을 다스릴 때가 많습니다.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화를 돋우는 세 번째 인지적 왜곡의 형태는 Magnificaion(달리 말해 파국화)와 당위적 사고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건강 관리하려고 항상 술도 안 먹고 운동까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러니 절대 큰 병에 걸리는 일은 없을 거야.'라고 믿는 사람이 있다고 할 때, 이 사람에게 닥치는 건강상의 문제는 재난이 되기 쉽습니다. 자신의 건강에 대해 확신했던 만큼 사소한 질병에도 과도한 걱정이 수반되면서 심리적 안정에 타격을 받기 쉽다는 것이죠. 이 사람의 일차적 반응은 분노일 수 있습니다. 몸이 아픈 상황을 부정할 수만 있다면야 그렇게 하겠지만 그럴 수 없으니 분노로서 반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하지만 죽을 병이 아닌 이상(저는 죽을 병이라 하더라도..라고 말하고 싶지만 일단.) 살 방도가 있게 마련입니다. '나는 ~해야만 해', '너는 ~해야만 해'라는 당위적 사고가 많을수록 이런 방도를 탐색하는 데 에너지를 쏟기보다 왜 나는(혹은 너는) 이 따위인 거야!!!라며 분노하기 쉽습니다. 몇 시간 혹은 며칠 혹은 몇 달 동안 분노에 사로잡혀 자기 삶을 진정 잃어버릴 수도 있죠.
죽을 병이 아닌 이상(다시 한 번, 죽을 병이라도,라고 말하고 싶지만 섣불리 말할 수 없는 영역이네요) 이러한 당위적 사고에는 자신이 지금 심각한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직관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내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일이 아니라면 분노가 사로잡힐 이유도 없습니다. 이 부분은 번스 박사가 얘기하지 않았던 부분인데요.
문제가 아무리 심각하다 한들 대처 방법이 어딘가에 있거나, 없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그 문제가 일상에 미치는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을 다들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분노의 화마가 자신을 덮고 있을 때는 시야가 좁아져서 이런 인식을 갖기 어렵죠. 즉 그 문제가 내 삶에 매우 심각한 혹은 파국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만 같고, 그렇기 때문에 더 큰 화를 냄으로써 외부 환경에 맥없이 휘둘리는 약해진 자기를 잠시 잊으려 하는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화를 내는 동안에는 내가 잠시 취약해진 상태라는 것을 보지 않아도 되거든요. 연인끼리의 다툼에서도 상대방이 떠나갈 것이 두려운 사람이 더 성내기 마련인 것과 같은 이치죠. 더 약한 사람이 더 화내게 돼 있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왠만한 일에는 크게 동요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고 보는데, 그만큼 인생 데이터베이스가 구축되면서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내게 있고, 그 능력이 없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 아닐까 합니다. 삶의 풍파에 유연해지는 만큼 파국화를 덜 하게 됩니다.
유연해진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자신의 취약성을 인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 노력이나 내 대처 방식을 통해 달성하거나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 있지만, 내 노력이나 대처에도 불구하고 내가 병에 걸릴 수도 있고, 연봉이 오르기는커녕 삭감될 수도 있고, 내가 사랑하던 사람이 때이르게 죽을 수도 있고(이상 모두 제 경험입니다), 내 인생이 우발적이고 환경적인 변수에 의해 쉽게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는 것이죠. 이런 경험들이 쌓이면서 당위적인 사고가 얼마나 부질 없는 것인지도 깨닫게 됩니다. 삶은 예측 가능한 만큼 예측 불가능하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배우게 되면 '~해야만 한다'라는 가정도 내려놓기가 쉽습니다. 사족이지만 여성이 남성보다 대체로 성격적인 유연함이 있죠. 이는 사회 구조를 떠나서 생물학적으로 보더라도 여성은 월경을 통해서 몸이 약해지는 경험을 애초에 하기 때문에, 일찍부터 자신의 취약성을 인정하고 들어가게 되는 면이 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제 얘기가 아니라 낸시 맥윌리엄스라는 유명한 미국의 심리치료자 얘기입니다. 저도 동의하고요.)
인지적 오류에 대한 인지행동치료자들의 탐구에는 철학적인 면이 있습니다. 세상은 인지적 구두쇠로서의 우리가 보고 있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무엇보다 선악, 사랑과 증오, 이것이기도 하고 저것이기도 한 많은 가능성들의 집합체입니다. 인간이 바로 그러하듯이 말입니다. 분노라는 감정은 정당하지만, 분노를 야기하는 생각이 과연 진실에 가까운지는 철학적인 태도로 들여다 볼 문제라는 것이 인지행동치료의 행간에 숨은 요지인 것 같습니다.
ref)
필링굿 원서 7장. Feeling Angry? What's Your IQ?
스팀잇에 동시 게재된 글입니다.
url: https://steemit.com/kr-psychology/@slowdive14/ushy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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