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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심리학/상담 및 심리치료

경험적으로 지지되는 상담자(empirically supported therapists)

by 오송인 2019.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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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의료에 저당잡힌 심리 서비스의 한계와 이를 반면교사 삼아 한국의 심리 서비스법(그런 게 제정된다면.)이 나아갔으면 하는 방향에 관해 생각해 본다. 잘 모르는 부분이 있음에도 거칠게 써 나갔다. 더욱이 한국 실정은 원시 시대인데 생각은 20세기까지 갔음에 유의하시길 바라며. 재미로 읽어주시길.


Lambert & Ogles(2004)는 경험적으로 지지되는 처지(empirically supported treatment, EST)를 찾으려 하기보다는 경험적으로 지지되는 상담자를 찾으려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대인과정접근, 434쪽.


인지행동치료이든 정신역동적 치료이든 간에 치료자의 이론적 지향이 중요한 게 아니라 상담자 개개인의 역량이 훨씬 중요하다는 내 개인적 생각과 일치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미국에서 EST가 대세다. 특히 회기 수 짧은 인지행동치료가 선호된다. 모르긴 몰라도 미국의 관리의료에서 그것이 보험회사에게 이득으로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10회기 이내로 치료해서 성과를 냈다는 연구를 보여줄 수 있는 연구자는 더 많은 돈줄을 쥘 수 있다. 짧은 시간에 적은 돈 투자해서 치료 성과 좋으면 좋은 거 아니냐? 라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연구에서 말하는 그 치료 성과라는 게 매우 이상적인 내담자(특히 공존하는 정신장애가 없어야 한다는 요건을 충족시켜야 하는 내담자)를 대상으로 단편적인 측정치에 근거할 때가 많고, 측정도구를 신뢰할 수 있다 하더라도 성과의 유의미함을 판가름하는 통계라는 것이 늘 해석과 이견의 여지가 있음을 고려할 때 여러모로 미심쩍어지는 게 사실이다. 임상심리학자로서 과학적 연구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만큼 그 방법론적 한계도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비판적인 시각을 늘 견지하게 된다.


아무튼 보험회사는 가시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성과에 지나치게 치중하는 이런 연구들에 기반하여 심리치료자들에게 인지행동치료로 대표되는 EST를 쓰지 않으면 보험료를 주지 않겠다고 압박한다. 이게 그간 EST가 득세할 수 있었던 주요 이유일 것이다.


한국은 아직 심리치료를 비롯한 심리 서비스가 보험의 영역에 포함돼 있지 못 한 상태라 볼 수 있다. 정신과 약물치료나 신경인지장애 평가가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영역에 있고, 얼마 전 인지행동치료가 급여화되면서 일부 심리치료 영역 또한 보험 혜택을 볼 수 있는 영역으로 편입됐다 하더라도 미국처럼 본격적으로 심리치료 영역이 보험으로 편입되지 못 한 실정이다.


잠깐 얘기를 샛길로 돌리면, 아이러니컬하게도 정신과는 인지행동치료뿐만 아니라 심리치료 자체를 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된다. 시간 대비 벌어들이는 수익의 효율이 적기 때문에, 모두가 그런 건 아니라 하더라도, 약물치료에 중점을 두기 쉽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한국에서 심리치료가 건강보험이든 민간보험이든 보험에 포함되는 범위가 확장될수록 미국의 선례를 따라 갈 확률이 높다.


이미 한국에서는, 공공기관의 심리 서비스뿐만 아니라 사설 기관의 심리 서비스도 평균 치료 회기가 짧을 수밖에 없는데, 사설 심리치료 기관이 국가로부터 돈을 지원 받는 바우처를 통하지 않고서 영업을 지속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바우처란 보건복지부나 지자체에서 일종의 이용권을 제공하여 돈을 많이 내지 않고서도 어떤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인데, 아동 심리치료 영역에서 이 바우처가 많고, 사설 심리상담 센터들은 이 바우처를 따내 보다 많은 내담자를 유치하기 위해 애쓸 수밖에 없다.


(실질적으로는 아무 의미없는 실적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표면상으로는) 더 많은 사람에게 기회가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바우처 이용의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해, 예를 들어 20회기의 심리치료가 필요한 사람도 10회기를 마지막으로 치료를 종결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관리의료가 심리 서비스 영역에서 EST를 강조하며 발생하는 문제와 비슷하며, 심리 서비스가 국내 의료 보험이나 민간 보험에 편입되는 비중이 커질수록 내담자가 정말 치료되었는지에 관심을 두기보다 어떻게 하면 보험료를 덜 줄지를 고심할 수밖에 없는(좀 더 고상하게 표현하면, 보다 효율적으로 자원을 분배할지를 고심할 수밖에 없는) 재정 관리자들의 입김에 심리치료를 비롯한 심리 서비스가 좌지우지 되기 쉬울 것이다.



수술은 의사에게 받는 것인데 심리치료는 누구에게 받는 것인가? 라고 묻는다면 이에 대해 속 시원한 답을 듣기는 어려울 것이다. 심리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주체가 누구인지에 관한 법안이 마련돼 있지 않고 그래서 2~3주짜리 단기 워크샵 듣고 자격 취득한 아무개도 심리 서비스 제공의 주체는 자신이라며 여러 마케팅 수단을 공격적으로 활용하여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려 한다. 이런 상황에서 관리의료와 심리 서비스, EST라는 주제를 통해 한국에서의 심리치료 보험 적용과 심리치료의 향방을 예측해 본다는 게 쓸데없어 보이는 일 같기도 하지만, 언젠가는 국가가 licenced psychotherapist의 자격을 법제화하여 이들에게만 보험을 적용하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심리 서비스에 대한 필요가 날로 증가하는 상황에서 이를 방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심리 서비스에 대한 국가적 인식이 후진국임을 고려할 때 아주 요원해 보이긴 하지만.


그런 날이 온다면 최소한 EST가 아니라 저 위에 인용해 놓은 연구자들의 말처럼 '경험적으로 지지되는 상담자'에게 보험을 적용해 줄 필요가 있다.


아툴 가완디가 쓴 [어떻게 일할 것인가]에 보면 이 비슷한 내용이 있다. 특정 질환을 잘 치료하는 순으로 의료기관을 서열화하여 잘 치료하는 기관에 나랏돈을 더 줘야 하지만 의료기관들의 반발이 거세 진척이 더디다. 그럼에도 그 서열에 관한 리스트가 존재한다는 요지의 내용이었던 것 같다. 어떤 심리치료자의 심리치료 성과를 측정할 수 있는 일반화된 지표를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한가? 라는 물음을 던져볼 수 있겠다. 나부터가 당장 반감이 드는 게 사실이다. 그 서열화된 자료에서 야매 심리치료자 타도를 외치던 바로 내가 하위 15%에 속하지는 않을까 두려운 것이다. ㅎㅎ


경험적으로 지지되는 심리치료가 있다면 경험적으로 지지되는 상담자(empirically supported therapists)의 기준을 정립하는 일이 뭐 불가능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마음 한편에 든다. 이 기준 또한 돈의 논리에 좌우되기 쉬운 EST의 한계를 고스란히 재현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심리치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 요건을 국가적으로 법제화하고, 이 기준을 충족시킨 licenced psychotherapist의 치료 성과를 돈의 논리가 아닌 치료자-내담자 관계의 질에 근거하여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할 수 있다면, 내담자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공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그런 기준을 마련할 수만 있다면 설령 내가 심리치료자로서의 성과에서 하위 15%에 든다 하더라도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그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애쓰게 될 것 같다, 직업을 바꾸지 않는 이상. ㅎ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처럼 야매 상담자에 의해 내담자가 착취 당할 가능성이 적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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