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하루하루/서평

치료의 선물 / 어빈 얄롬

by 오송인 2019. 6. 24.
반응형

얄롬은 심리치료에서 내로라하는 저명한 인물 가운데 한 명입니다. 개인치료뿐만 아니라 집단치료에서 대인관계적 접근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철학적으로는 롤로 메이 같은 실존주의 심리치료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롤로 메이에게 3년인가 분석도 받았다고 하네요. 심리치료 경험을 재료삼아 대중적인 소설 쓰는 능력도 탁월한 사람이니 세상은 역시 빈익빈부익부 가진 사람이 더 가진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이 책 치료의 선물은, 심리치료자라면 읽진 않았더라도 책의 존재는 알 법한 그런 책입니다. 월덴지기님이 블로그상에서 강추한 것을 보고 이 책을 읽어봐야겠단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모교 전자도서관에서 공짜로 볼 수 있는 것을 확인하고 읽어봤습니다.

 

6개월 동안 대인과정접근을 읽고 난 후에 이 책을 읽으니 내용이 그닥 새롭진 않네요. 얄롬이 추구하는 상담자-내담자 관계지향적 치료의 핵심이 대인과정접근이라는 교과서(이 책은 얄롬이 쓴 책은 아닙니다)에 아주 디테일하게 응축돼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이 책이 가볍게 느껴지는 감이 있습니다. 전공서라기보다 대중서에 가까운 느낌으로, 심리상담이나 심리치료가 무엇인지 궁금한 일반인이 읽으면 오히려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담자-내담자 관계에 대한 피드백을 내담자로부터 적극적으로 얻으려 노력해야 한다는 부분들이 유용합니다. 특히 상담의 향방을 대부분 결정짓는 첫 회기부터 이런 노력을 해야 합니다.

 

"첫 번째 회기는 두 방향의 면담입니다. 먼제 제가 당신을 인터뷰 하고, 또 반대로 당신이 저에 대한 평가를 하고 저와 어떻게 작업을 해 나가고 싶으신지 의견을 내시는 거예요."

 

첫 회기가 마지막 회기가 되지 않았다면(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치료가 잘 진행되고 있는지 그렇지 못 한지에 대한 내담자의 피드백에 민감할 필요가 있죠.

 

"당신과 내가 오늘 어떤가요?"라거나 "오늘 우리 사이의 거리 정도에 대해 어떻게 느끼고 있나요?", 또는 나는 환자에게 미래를 상상해 보라고 묻기도 한다. "지금부터 30분 정도 후에 집에 돌아갈 때를 상상해 보세요. 오늘의 회기를 되돌아본다면 오늘 회기에서 당신과 나에 대해 어떻게 느낄 것 같은가요? 오늘 우리의 관계와 관련해서 말하지 않은 점이나 묻지 못했던 질문이 있나요?"

 

관계에 대한 내담자의 피드백과 관련하여, 이런 말도 나중에 상담에서 활용할 법하네요.

 

"어쩌면 당신은 내가 보지 못하는 나의 맹점을 찾는 데 도울 수 있을 겁니다."

 

라포가 형성이 되었다면 치료에서 도움이 된 게 무엇인지 물어볼 필요도 있겠죠.

 


 

상담자가 했던 사소한 말이나 행동이 내담자 변화의 기폭제가 될 때가 많다고 합니다. 치료는 정해진 매뉴얼을 따르는 과정이 될 수 없고, 상담자의 언어적 및 비언어적 메시지가 언제 어떤 식으로 내담자 변화를 촉진할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치료자로서의 내공이 쌓인다는 것은 상담자-내담자 관계 안에서 어떤 현상이 발생한 즉시 그것을 알아차려 치료적 도구로 활용하는 상담자의 민감성이 향상된다는 것 아닐까 합니다. 얄롬은 지금-여기에서의 즉시적 개입에서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던 사람 같습니다.

 

책을 읽다 보면 얄롬을 본 적이 없지만 그가 어떤 사람이었을지 시각적으로 그려지는 바가 있습니다. 천부적인 재능뿐만 아니라 권위주의적인 면이 없이 내담자나 환자와 수평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상당히 애썼던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치료 장면에서 치료자는 그가 의도하든 하지 않든 간에 이상화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상화가 어떤 내담자에게는 거치게 될 수밖에 없는 과정이라 하더라도 진정한 관계 맺음에 신비주의나 위선이 끼어들 틈은 없습니다.

 

얄롬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나 가치관 등을 내담자에게 시의적절하게 오픈함으로써 내담자가 역시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다른 인간과 관계맺음을 잘해나갈 수 있는 초석을 마련합니다. 가끔은 사생활이나 자신의 성적 취향까지도 오픈해야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이런 것을 오픈하는 게 내담자에게 도움이 된다고 여겨진다면('이러한 자기개방이 최선인가?') 오픈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합니다. 내담자에게 솔직한 자기개방을 요구하면서 상담자 자신은 스스로를 상담자라는 타이틀 안에 감추려 한다면 이러한 관계에서 치료적 진전을 기대하기란 어렵다는 것이 얄롬의 중요한 관점입니다. "만일 진정으로 남들이 알지 않기를 바라는 일이 있다면, 치료에서 그 일을 이야기하지 마라"고 이야기하고 있으나 이런 걱정 때문에 지나치게 조심스럽게 내담자를 대할 필요도 없음을 강조합니다.

 

자신은 불투명하게 있으면서 어떻게 다른 이와 진정한 만남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상담자도 불완전한 인간일뿐이지만 자기가 매인 사슬은 풀 수 없어도 다른 사람이 매인 사슬은 풀 수 있습니다. 이것은 뒤집어 생각해 보면 환자로부터 상담자가 도움 받을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상담의 초점이 상담자로 넘어오는 것은 지양해야 하지만, 사별과 같은 삶의 어려움에 처했을 때 얄롬이 어떻게 내담자로부터 인간적인 위로를 받았는지에 관한 이야기에는 상담자-내담자 관계를 보는 얄롬의 수평적 관점이 잘 녹아 있습니다.

 

영향력 있는 미국의 정신분석 치료자인 Harry Stack Sullivan이 심리치료란 근심의 정도 차이만 있는 두 사람이 개인적인 문제를 함께 논의하는 것이라고 설명한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치료자가 환자보다 더 근심이 심해졌을 경우 두 사람의 역할은 바뀌게 된다.

 

주지하다시피 일방적으로 도움을 주기만 하는 관계에서 도움 받는 사람은 자신의 힘을 경험하기 어렵고 스스로에 대해 긍정적으로 느끼기도 어렵습니다. 상담자는 이런 힘의 불균형이 발생하고 있지 않은지 늘 안테나를 세우고 있어야 함을 느낍니다.

 

끝으로 내담자의 일상생활이 어떤 모습일지 구체적으로 파악하려는 모습에서 내담자에 대한 얄롬의 극진한 관심이 느껴졌습니다.

 

병원에 심리평가 받으러 온 환자와의 첫 인터뷰에서 주요한 삶의 어려움과 그 어려움의 지속 기간, 어려움에 어떻게 대처하려 했는지 등 반드시 물어봐야 하는 질문 목록 같은 게 있습니다. 잠은 잘 자는지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는지, 실제로 자살시도 한 적이 있는지, 했다면 어떻게 했었는지 등등 이 목록이 꽤나 길어서 처음 이걸 배우는 임상가는 면담에서 뭐부터 물어봐야 할지 몰라 압도되기 쉽습니다.

 

나중에는 길고 긴 질문의 목록 중에 앞에 앉은 환자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만 추려 물어보게 됩니다. 더 경험이 많아지면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과정에서 알아야 할 것들을 알게 되는 단계에 이르는데 저는 아직 그런 수준은 못 되는 것 같네요.

 

이런 인터뷰는 사실 증상을 파악하고 진단이 무엇인지 분류하기 위한 것에 가깝기 때문에 상담 장면에서는 유용성이 떨어집니다. 그보다는 내담자가 일어나서부터 잠에 들기까지 무엇을 하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등이 훨씬 중요하죠.

 

"당신의 전형적인 하루 생활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해주세요"

 

이 질문이 세밀하게 잘 다루어져서 내담자의 일상을 구체적으로 시각화할 수 있다면 진단을 위한 인터뷰에서는 알기 어려운 내담자의 진면모가 드러날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얄롬은 내담자의 집에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는데, 어지간한 관심이 아니고서는 힘든 일이 아닐까 합니다. 내담자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될 수 있게 상담자-내담자 관계를 통해 함께 모색하는 것이 상담자의 일이라지만 이 정도의 관심을 보이기는 여러모로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담자의 일상생활에 대한 상담자의 관심은 내담자에 대한 이해도 증가뿐만 아니라 신뢰 관계 구축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상담자가 신경써야 할 부분입니다.

 


 

전공자나 종사자를 위한 세부적인 조언도 조언이지만 저는 얄롬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됐다는 데 이 책의 의미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결국에는 관계가 중요하고 그 관계에 참여하는 상담자로서의 태도가 상당히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천부적인 재능이야 제가 배울 수 없는 부분이지만, 내담자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수평적이고 진실한 관계를 맺으려 노력해 온 얄롬의 태도를 배웁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