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잇에서 글이 올라왔을 때 눈여겨 보는 작가 중 한 분이 불이님입니다. 직접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유용하고 친절한 조언 덕에 영어 공부의 시행착오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됩니다. 양질의 글을 공짜로 보고 있다는 데 대한 미안함이 있었는데 작년에 영어 공부 방법에 관한 불이님 책이 출판됐습니다. 아쉽게도 전자책 형식으로만 출간이 돼 못 사보고 있다가 이북리더기를 득템하여 이번에 책을 구매했습니다.
영어 논문을 보고 영어로 된 심리학 교과서를 보는 석사 입학 이후부터 영어는 늘 제 삶의 걸림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어 공부에 대한 필요를 절실히 느끼지 못 해서 영어 공부를 할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습니다. 논문은 어려운 영어가 아니기 때문에 그 형식에 익숙해지기만 하면 되는 문제였고 수업을 위한 교과서 번역은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어떻게 꾸역꾸역 해나갔습니다. 같이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민폐 끼치지 않기 위해 피땀 흘려가며 번역했는데 그럼에도 스스로 느끼기에 '발번역'일 때가 많았습니다. 학부 때 그 흔한 토익 공부 한 번 해본 적이 없기에 영어 실력이 선후배 및 동기들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짐을 느끼고 있었고(텝스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2010년경에 봤을 때 500점대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대학원 생활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이 번역 작업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왜 영어공부에 대한 절실함이 없었는지는 지금 생각해 봐도 미스테리입니다.
오히려 전문가 자격 취득을 위한 병원 트레이닝 이후 필드로 나와서 영어공부의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빠르게 업데이트되는 학문적 성과를 따라가지 못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직업적으로 정체돼 있다는 느낌이 싫었습니다.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으려면 원서 공부를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글 교과서 읽을 것도 수두룩했고 한글 교과서 스터디를 현재 두 집단 진행하고 있기도 하지만, 그래도 내가 직접 저자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는 열망이 어느 순간부터 커진 것 같네요.
불이님 책에서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주장 중 하나가 영어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독해, 리딩, 리스닝, 스피킹 모두를 잘하는 것이라기보다 어느 하나라도 잘하는 것에 가깝다 입니다.
각자의 목표와 기준에 맞춰 영어를 공부하면 되는 것이고, 그 기준에 도달했다면 그 사람은 영어를 잘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가 뭘 잘하고 싶은지 안다면 그 쪽에서부터 접근하는 게 좋다는 것으로 이해했고, 제가 영어 공부를 하는 방식에도 부합합니다. 저도 영어로 말 잘하고 싶지만, 우선은 독해라도 잘하고 싶은 마음이 크고 그래서 원서 독해 위주로 영어를 공부합니다. 처음에는 리스닝도 잘하고 싶은 마음에 몇 개월에 걸쳐서 꾸준히 리스닝을 해왔으나 둘째 탄생 이후 리스닝까지 하기에는 무리가 있어서 현재 독해만 진행 중입니다.
뭐가 됐건 자신이 꾸준히 영어를 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그 '무엇'을 찾아야 한다.
심리학 관련 원서를 현재 두 권 읽었습니다. 한 권은 700페이지에 가까웠고 다른 한 권은 300페이지쯤 됩니다. 두 책을 완독할 수 있었던 것은 심리학만큼 제게 재미있는 학문은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직업적으로 이런 독서가 필수적이기도 합니다. 환자나 내담자 보는 안목을 키우려면 두말 할 것도 없이 직접적인 경험만큼이나 이런 간접적 경험이 중요하며, 재미와 필요라는 두 요소가 꾸준함의 바탕이 된다고 봅니다. 필요만 있고 재미는 1도 없었다면 꾸준함은 가능하지 않다고 보는데 저자도 책 곳곳에서 재미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재미가 있다 하더라도 필요가 없으면 이 역시 꾸준함을 지속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필요는 다른 말로 하면 동기입니다. 동기는 저처럼 직업적인 이유가 될 수도 있겠지만 저자의 말에 따르면 사소한 것이어도 좋습니다.
그건 아주 사소한 것이어도 좋다. 남들이 볼 때는 이상한 이유여도 상관없다. 미드를 좋아해서 그 촬영 장소를 꼭 가보고 싶다거나,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을 감상하고 싶다거나, 센트럴 파크에서 여유롭게 산책하고 싶다는 것도 좋다. 자신이 좋아하는 NBA 농구나 MLB 야구를 현지로 여행 가서 보고 싶을 수도 있다. (중략) 자신만의 신나는 동기부여가 있으면 좋다.
꾸준히 하다 보면 눈이 열리고, 귀가 트이고, 영어가 방언처럼 터져나오는 그런 날이 오겠죠? 저는 온다고 확신하는데 1~2년 가지고는 어림도 없고 최소 5년에서 길게는 10년까지도 보고 있습니다.
불이님도 처음부터 영어를 잘하진 않았을 테죠. 영어를 잘하고 싶다는 열망으로 이것저것 실험해보고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지난한 과정을 거쳐 지금의 단계에 올랐을 거라 여겨집니다. 책에 그런 에피소드가 종종 나오는데, 이를 통해 언어 공부에서 인내와 성실이 얼마나 큰 미덕인지 배우게 됩니다.
갑자기 놀란 상황에서도 일본어로, 그러니까 외국어로 감탄사를 내뱉을 수 있지는 않을까? 난 그걸 실험해보고 싶었다. 뭔가 실수했을 때 난 "엄마야." 혹은 "어머."라고 매우 여성스럽게 말했었는데, 이때 영어로 Oops라고 말해보면 어떨까 싶었던 거다. 처음엔 Oops라는 말이 아직 입에 배지 않아서 "엄마야."라고 외친 후 2초 정도 있다가 다시 "Oops."라고 했다. 그러던 것이 점점 연습을 하니, 나중에는 뭔가 실수를 하기만 하면 나도 모르게 "Oops!"라고 말을 하게 됐다. (중략) 나는 이때 영어란 습관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영어 공부를 잘하고 싶다는 열망에서 이런 실험까지 해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짤막한 에피소드지만 배우는 바가 많습니다.
책을 덮고 나니 재미 + 필요 + 실험 및 시행착오 + 실력이 눈에 띄게 향상되지 않는 상태를 견디는 인내 +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 및 피드백의 조합이 영어 실력 향상으로 이어지는 것이구나 싶어집니다. 저도 불이님처럼 영어 공부 꾸준히 해서 영어로 라면 끓여 먹을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네요.
하지만 포기하지 말자. 겉으로 표시는 안 날 수도 있지만 여러분은 자신의 영어 냄비에 계속 불을 지피고 있는 상황이니까. 그 불을 꺼뜨리지 말고, 매일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공부하자. 언젠가는 분명 그 영어 냄비가 끓어 넘칠 것이다. 그러면 그때는 계란 하나 탁! 깨서 넣고, 라면 맛있게 끓여 드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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