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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심리학/심리평가

진단을 하는 이유

by 오송인 2019. 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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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적 진단의 1장 내용을 제 말로 풀어 요약해 보았습니다.

 

1. 치료 계획 수립
진단은 1차적으로 치료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서 내려집니다. 우울증 환자와 조울증 환자에 대한 치료 개입은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울증 환자라 하더라도 정신병적 증상이 수반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에 대한 치료 개입이 달라지겠죠.

 

2. 예후 파악
죄책감을 심하게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는 죄를 지었고 죽어야 마땅하다고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한편에는 죄책감을 느끼지만 사건에 비해 과도한 죄책감을 경험하고 있다는 데 대한 일말의 인식을 지닌 사람이 있습니다. 두 사람은 예후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증상을 '자아동질적'으로 경험하는 사람과 '자아이질적'으로 경험하는 사람은 예후의 차이가 납니다. 전자는 보다 길고 집중적인 치료 개입이 요구되기 쉽습니다.

 

3. 치료자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기 위해
치료자의 관점에서 진단을 내리고 이것을 환자에게 설명하는 것은 자신이 환자에게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설명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PTSD 환자를 별로 본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PTSD 치료에 대해 특별히 배운 바 없는 치료자라면 진단이 PTSD로 나왔을 때 이 치료자를 PTSD 전문가에게 의뢰하는 것이 윤리적입니다. 정신병 환자를 본 일이 없는 상담자가 정신병 환자를 치료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치료자의 윤리를 저버리는 행위죠. 진단에 비추어 볼 때 가족치료가 필요한 환자인데, 가족치료 수퍼비전을 받은 경험이 없는 사람이 가족치료를 진행하는 것도 치료 윤리에 어긋납니다.

 

4. 공감의 전달
ADHD 아동을 정말 많이 봤습니다. 부모들이 어떤 고통을 경험하는지에 대해서도 생생하게 들은바 있고, 센터에 엄마와 아이가 같이 내방하는 경우 상호작용 과정에서 부모가 어떤 어려움을 경험하는지 직접 눈으로 볼 때도 많죠.(ex. 아이가 엄마를 심하게 때린다거나 욕한다거나..) ADHD를 지닌 아동의 부모들에게 제일 필요한 게 뭘까요? ADHD 증상이 얼마나 아이와 엄마를 힘들게 하는지 공감 받는 것입니다. ADHD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정신장애도 비슷합니다. 조현병을 지닌 환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강박장애를 지닌 환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마는 진단을 통해서 환자가 경험하는 삶의 무게가 어느 정도일지 대략적으로 가늠할 수 있죠. 이런 이해는 동정이나 연민이 아닌 환자의 입장에서 환자를 이해해 보려는 노력인 공감으로 이어질 수 있고, 환자가 이해 받고 있다고 느낄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5. 치료 중단(drop-out)을 방지: 1 및 4와도 관련.
진단은 DSM 같은 기술적 체계를 통해서 이루어지지만, DSM만으로 진단하는 것이라면 의미가 없습니다. 즉 심리적 역동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진단 가설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울감을 지닌 내담자를 만났다고 치면, 이런 우울감이 자기애적인 상처로 인한 수치심에 수반되는 것인지 아니면 죄책감이나 자신이 나쁘다는 느낌에 기인하는 것인지 파악해야 합니다. 전자와 후자에 대한 치료자의 개입 의도는 다를 수밖에 없고, 심리적 역동에 따른 적절한 치료 개입은 환자에게 공감적으로 느껴지며 치료 중단 비율을 낮출 것입니다.

 

병리적 자기애는 뿌리 깊은 열등감과 부적절감에서 자라납니다. 자기가 못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입증하거나 타인에게 인정받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런 인정을 받기는커녕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했다고 느끼며 수치심을 경험하는 사람에게 '자신에게 너무 가혹하고 비판적인 태도가 우울을 심화시키고 있다'고 말한다면 전혀 공감이 안 되겠죠. 이 사람이 잘난 사람임을 인정해주고 망신을 준 사람이 못난 사람이라고 지지적인 태도로 접근을 하는 게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죄책감이 심하고 자기가 늘 나쁘다고 느끼는 환자에게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이미 그 자체로 충분히 훌륭해요'라고 말하는 것만큼 비공감적인 태도가 없을 것입니다. 이건 동정이나 연민에 가까운 태도지 치료자로서의 태도는 아닌 것입니다.

 


 

진단을 내릴 때 사람들이 가장 우려하는 부분 중 하나는 낙인 효과입니다. 이 진단을 받음으로 인해 사회적인 낙인이 찍히게 되는 것은 아닌지 염려할 수밖에 없죠. 하지만 낸시 맥윌리엄스의 말처럼 진단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진단으로 인해 낙인 찍히기 쉽다고 해서 진단이 주는 앞서의 이로움을 포기할 순 없지 않겠습니까. 진단의 이점이 훨씬 더 많고, 낙인 효과 같은 side effect는 정신장애에 대한 사회적 인식 개선을 통해 줄여나가는 것이 바람직해 보입니다.

 

또한 진단은 영구불변의 무엇이 아니라 잠정적 가설입니다. 이 사람이 정신병인지 신경증인지 큰 틀에서야 비교적 쉽게 확인이 가능한 경우가 많고, 이런 진단적 큰 틀은 치료가 지속되더라도 비교적 유지되는 경우가 많습니다.(물론 신경증인 줄 알았는데 정신병이었던 경우도 제 경험에선 없지 않아요.) 하지만 이 사람이 정신병적 증상이 수반되는 강박장애인지, 아니면 조현병 환자인지 헷갈릴 때처럼 감별이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다. 환자를 지속적으로 follow-up하며 상태 추이를 확인할 수 있는 경우가 아닐수록 감별이 어렵죠. 저 같은 경우에는 만성 환자가 아닌 이상, 심리평가서 말미에 진단적 인상을 제시할 때 R/O 라는 수식을 다는 경우가 많습니다(정신과에서 심리평가서는 보통 평가를 의뢰한 정신과 전문의가 보게 됩니다.). rule-out 즉 다른 가능성이 있을지 모르니 그 가능성을 배제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Major Depressive Disorder

R/O Bipolar Disorder

평가 결과 주요우울장애 같지만 양극성장애 가능성도 있으니 이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있어야 주요우울장애에 해당한다는 의미입니다. 배제할 수 없다면 양극성장애인 것이고요.

 

이런 식의 진단에는 확정 진단(최종 확진)이 아니라 가설로서의 진단이라는 의미가 내포돼 있습니다. R/O이 붙어 있는 경우가 아니라 하더라도 심리평가서의 진단은 늘 가설에 가까운 무엇임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가설이다 보니 추가 정보나 반증 정보가 들어오면 그에 맞춰 가설을 수정해야 하겠지요. 진단과 치료는 따로 가는 게 아니라 늘 함께 갑니다. 환자가 오면 진단 가설을 수립하고 그에 맞춰 치료를 하고, 치료 과정에서 나타나는 상태의 추이를 비롯하여 새롭게 나타나는 정보들을 바탕으로 초기 진단 가설을 유지하거나 수정합니다. 수정된 가설은 다시 치료에 반영되죠.

 

다소 어렵게 돌아왔는데, 진단을 왜 하는가? 쉽게 말하면 결국 치료를 잘 하기 위함이죠. 환자 개개인의 증상 및 심리적 역동에 맞춰서 적절한 치료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환자의 증상을 가라앉히는 동시에 환자의 심리적 역동을 보다 기능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킴으로써 환자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진단합니다.

 


 

2018년 7월에 스팀잇에 썼던 글입니다. 진단은 필요하지만 일단 진단을 내린 후 치료가 잘 진행되고 있다면 진단은 잊고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는 게 더 중요하겠죠. 심리치료는 진단을 내려놓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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