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샤에서 '아무것도 안 보여요'라고 수검자가 말할 때, 그것이 방어적인 태도를 시사하지 않는다면 상상하는 능력의 문제가 있다고 가정해야 합니다.
상상하는 능력은 인간이 지닌 고유의 능력일지 모릅니다. 과거나 미래를 떠올려서 그것을 통해 현재 자신의 정체성을 구체화하는 데 일조하는 능력이기도 하죠. 자기(self)에 관한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를 머릿 속에 그려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상상은 계획하기와 같은 고차적인 인지 능력, 즉 실행기능(executive function)에도 연관됩니다. 추구하고자 하는 목표를 떠올리며 이를 달성하기 위한 계획을 짜기 위해서는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이나 벌어질 일을 머릿 속에서 시뮬레이션해 보는 과정이 필수적입니다.
우리가 세우는 목표는 보통 보상과 관련이 깊습니다. 물질적으로든 관계적으로든 보상이 없다면 목표를 세운다 한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어렵고, 그런 목표는 선택지에서 제외되기 쉽습니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목표를 달성했을 때 얻을 수 있는 보상에 대한 예측이 없다면 우리 행동은 발생하지 않을 겁니다. 이런 점에서 목표와 보상에 대한 상상은 동기부여에도 매우 중요합니다.
상상은 다른 사람의 감정 및 사고를 파악하는 데도 필요합니다. 내 경험과 상대방이 처한 상황 등을 머릿 속에 그려보는 가운데 상대방이 지금 어떤 감정과 생각을 경험할지 추론할 수 있습니다. 이를 가리키는 많은 심리학 용어가 있고 그 중 하나가 정신화(mentalization)입니다. 정신화는 역지사지라 해도 되고 공감이라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상상의 부재가 다른 사람에 대한 비공감적 태도를 촉진하며 지속적인 대인관계 어려움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상에서 충분히 예상할 수 있듯이,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의 부족이나 결핍은 정신장애 전반에 공통적으로 나타납니다. 특히 조현병이나 치매가 그렇습니다. PTSD처럼 너무 생생하고 참혹한 기억으로 인해 고통 받게 되는 경우에도 외상적 기억 이외의 다른 상상이 들어설 여지가 없습니다. PTSD를 지닌 사람들은 미래로 시선을 돌리기 어렵습니다.
첫 문단에서 언급했듯이 상상력의 결핍이 로샤 카드에서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반응에서 주요하게 고려해야 할 점입니다. 방어적이지 않은 수검 태도일 때의 이러한 반응은 수검자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을 뿐만 아니라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가 제대로 기능하고 있지 못 하다는 하나의 증거일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가능성을 다른 검사 결과, (개인력, 가족력 등을 포함하는) 인터뷰, 보호자 면담 등의 맥락에서 따져볼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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