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SM-5나 ICD-10의 정신장애 진단기준은 관찰가능한 증상에 근거할 때가 많고, 이는 임상가 사이의 진단일치율을 높이는 데 기여합니다. 하지만 관찰가능한 표면 증상에 비중을 두어 정신장애 진단을 내리게 되는 것의 맹점은 그 증상이 발생한 발달적/성격적 토양을 간과하기 쉽게 만든다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맹점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진단 중 하나가 적대적 반항장애와 품행장애, ADHD 등입니다. 이 진단은 아동 및 청소년이 보이는 외현적 ‘문제’ 행동에 거의 전적으로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진단의 목적은 치료를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진단 자체가 문제 행동에 맞춰져 있다 보니 그 문제 행동이 발생하는 토양은 치료 초점이 되기 어렵습니다.
아동 및 청소년이 보이는 문제 행동은 거의 열에 아홉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부모-자녀 관계 문제와 밀접한 연관을 지닙니다. 정확한 이유를 파악하기 어렵겠으나, 이들이 보이는 문제 행동은 가족 관계가 위기에 처했음을 가리키는 신호로 해석해야 합니다. 특히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정신장애가 그렇습니다.
부모-자녀 관계의 문제라고 하면 흔히 부모에게 책임을 묻기 쉽습니다. 정서적/신체적 학대나 방임처럼 말이죠. 하지만 이러한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정신과를 찾는 아동 및 청소년 환자와 그의 부모들을 면담해 보면, 부모의 정서적/신체적 학대나 방임으로 인해 문제 행동이 발생하게 되는 경우는 적습니다. 그보다는 많은 관심과 사랑을 쏟았으나 그 관심과 사랑이 환자의 기질적 특성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 한 경우가 더 많을 것 같습니다. 혹은 경제적인 어려움이 커서 부모 모두 생업에 많은 시간을 쏟아야 했고, 이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홀로 남겨지는 시간이 많았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환자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경우의 수가 있기 때문에 부모-자녀 관계 문제에서 부모에게 일방적으로 책임을 전가하기는 어렵습니다. 방치된 모두가 정신장애를 지니게 되는 것도 아니고요.
증상은 한 개인의 성격적인 대처 양식이 현재 환경에 맞지 않는 측면이 많을 때 발생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가족 전체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그 가족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애써 온 노력의 방식이 현재 상황에서 효율을 발휘하기 어려울 때 문제가 발생하기 쉽습니다. 특히 부부 간의 갈등이나 부모-자녀 관계의 문제로 불거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좀 더 시야를 넓힌다면, 개인의 내외적 행동도 결국 개인-가족-지역사회-국가로 이어지는 포괄적인 환경과의 상호작용에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고, 이는 위에서 열거한 정신장애를 특징짓는 외현적 문제 행동을 이해하는 맥락이 됩니다. 한 가족이 경험하는 어려움은 결국 지역사회, 국가적인 차원과 밀접한 관련을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저의 경험을 예로 한 번 들어볼까요. 국가의 돈을 받아 운영되는 두 기관에서 아동 및 부모 심리치료를 한 적이 있습니다. 두 기관 모두 치료비가 무료였고, 차상위나 기초수급자에게 치료 우선권이 돌아가는 그런 기관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두 기관 모두에서 다문화 가정의 아이와 부모를 치료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다문화 가정의 비율이 높아지고 있고, 이들 가정은 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 어려움에 처하게 될 가능성이 높지 않은가 생각해 보게 되는 계기가 됐습니다.
제가 치료했던 다문화가정 아동의 경우, 제 치료 경험이 그렇게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표면적인 문제행동 이면에 매우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가족 역동과 그러한 역동을 발생시키는 지역사회 및 국가적 문제가 있음을 깨닫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다문화가정의 적응을 돕는 국가적 지지체계가 미흡하고 사회문화적 편견이나 차별에 빈번하게 노출되는 가운데, 이러한 상처가 가족구성원 관계 안에서 다시금 반복됩니다. 이 때 가족 관계상의 부정적인 영향력에 가장 직접적으로 타격을 받는 것이 가족 내 취약한 구성원, 즉 아동 및 청소년입니다.
현존하는 정신장애 진단 체계에 따라 눈에 보이는 증상을 완화시키는 것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이러한 아동이나 청소년은 증상 완화 그 이상의 치료가 어려울 것입니다. 문제행동이 발생하는 맥락을 이해하여 그에 맞게 다차원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한데, 과연 그런 접근을 할 수 있는 체계가 한국에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일 수밖에 없습니다. 정신장애 진단 체계의 특성에 비추어볼 때 선진국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으나 공부한 바 없기 때문에 단언하긴 어렵네요.
인간은 한 번 어떤 개념틀에 익숙해지면 그 개념틀을 통해 현상을 바라보기 쉽습니다. 사고체계는 지각에 영향을 미칩니다. DSM-5나 ICD-10 같은 정신장애 진단 체계는 장점도 분명 존재하지만 임상가가 치료 개입의 다양한 차원을 고려할 수 없게 하는 단편성을 갖기 때문에, 부주의함이나 충동성, 기분 등 표면 증상에 대한 치료 이외의 해법을 모색해 보기 어렵게 만드는 측면이 있습니다.
적대적 반항장애나 품행장애, ADHD 등의 진단을 정신과에서 받고 약물치료가 진행 중인 상태일 수 있습니다. 앞의 두 장애와 ADHD는 공존하는 경우도 많고, ADHD 증상에 연관된 약물이 적대적 반항장애나 품행장애에 연관된 증상을 완화시킬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예. 중추신경자극제psychostimulants와 클로니딘clonidine의 결합). 하지만 증상 완화는 치료의 시작점에 가깝습니다. 비근한 예로, 디스크나 협착으로 인해 수술을 받더라도 꾸준한 재활운동이 지속되지 않으면 재발 가능성이 높습니다. 수술이 디스크나 협착에 연관된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할 수 없듯이, 약물치료를 통한 증상 완화 역시 근본적인 치료라 할 수 없습니다. 부모-자녀 관계나 그 가족이 처한 어려움에 대한 보다 다차원적인 접근을 통해 증상이 발생하는 토양의 질을 바꾸는 작업이 수반돼야 하겠죠.
임상심리학/정신병리
[정신과 임상심리전문가의 정신장애 이야기 #33] 적대적 반항장애, 품행장애, ADHD: 문제행동이 발생하는 토양을 들여다보기
반응형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