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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심리학/정신병리

자연스러운 인간 경험으로서 PTSD 증상을 이해하기

by 오송인 2019. 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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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증상이든 간에 그것이 역기능적으로 보이는 만큼이나 기능적인 특성을 지닙니다. 역기능을 초래하고 있는 증상이라 하더라도 증상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정신병리적 지식을 토대로 하여 변화의 시작점으로 삼을 수 있으며, 단순히 증상을 완화시키는 것을 넘어서서 증상에 함의된 기능적인 특성을 현실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은 PTSD 증상이 갖는 기능적인 특성에 대해 공부해 보고자 합니다.

 

DSM-5에 근거할 때 PTSD는 크게 재경험/회피/기분 및 인지 상태의 부정적 변화/과각성이라는 네 가지 범주에 해당하는 증상들의 집합입니다.

 

재경험은 외상과 관련된 기억이 불수의적으로 머릿속에 끊임없이 떠오른다거나 외상과 관련된 악몽을 반복하여 꾼다거나 과거 외상 경험이 지금 여기서 오감을 통해 생생하게 재현되는 등의 증상을 말합니다.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무던히 애쓰는 존재입니다. 예를 들어, 그 자체로는 얼굴과 무관한 자동차 후미등을 보면서도 사람의 얼굴과 눈을 시각화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내외부 자극을 이해할 수 있는 보다 친숙한 언어로 재해석하여 받아들이는 경향을 지닙니다. 이런 경향으로 인해 간혹 상황에 대한 오지각과 오해석이 발생하기도 하지만, 이는 인지적인 과부하를 줄여주고 보다 주의를 요하는 자극에 인지 자원을 할당할 수 있게 하는 긍정적 특성입니다.

 

재경험 증상 또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재경험은 외상 경험으로 인해 분절되고 파편화된 자기의 통합성을 유지하려는 시도입니다. 외상 경험을 통해 자기 정체성에 손상을 입고 다른 사람에 대한 온건한 시각을 유지하는 것이 어렵게 된 상황에서 재경험 증상은 외상 경험을 보다 통합되고 일관성 있는 자기이해의 틀 안에 위치시키려 하는 의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회피는 외상 경험에 연관되거나 연관될 여지가 있는 내재적 요소(기억, 생각, 느낌) 및 외재적 요소(ex. 사람, 장소, 활동)로부터의 회피입니다. 예를 들어, 어렸을 때 수염이 덥수룩한 의붓아버지에게 심하게 구타당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덥수룩한 수염 자체가 혐오 자극이 될 수 있습니다. 이와 유사한 자극 자체도 회피의 대상이 될 수 있겠죠. 제가 심리평가했던 환자 중 한 분은 전신에 심한 화상을 입은 이후에 라이터 불씨에도 소스라치게 놀라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고통스러운 경험이 예상될 때, 그러한 경험이 실제로 발생할 가능성이 낮든 높든 이로부터 회피(혹은 도주)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보다 중요하게 이는 자기보호의 과정일 뿐만 아니라 타인을 보호하기 위함이기도 한데, 그러한 자극에 직면하였을 때 마비가 아닌 투쟁(fight) 반응을 보이게 된다면 이로 인해 타인이 위험에 처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회피로 인해 삶이 상당히 위축될 수 있기 때문에 회피해야 하는 상황과 그렇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잘 분별할 수 있는 치료적인 도움을 받는 것이 필요하겠죠.

 

기분 및 인지 상태의 부정적 변화에서 인지적인 변화는 다음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 자기가 쓸모없는 사람이라 여기거나 아무도 믿을 수 없고 세상은 위험한 곳이라는 부정적인 신념이 우세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 신념과 타인 및 세상에 대한 신념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이 나쁘고 자신이 열등한 인간이라 이 모든 악재와 고통이 초래된다고 믿는 것에는 통제감이 수반됩니다. 내가 나쁘니 나를 고치면 상황이 개선될 수 있다고 믿는다는 점에서 우울이 매우 심한 사람이 지닌 신념과 통하는 바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나 외부 환경은 내가 어떻게 해 볼 수 없지만 최소한 나 자신은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 매우 기능적인 측면이 있으나, 스스로에 대한 비합리적 신념으로 인해서 실제로 나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기 어렵게 된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기분에서의 부정적 변화는 외상 경험에 연관된 감정, 예를 들어 공포, 분노, 죄책감, 수치심이 지속된다는 것입니다. 감정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러한 감정이 상황에 관계없이 지속된다면 상황 판단에 문제가 생기겠죠. 주지하다시피 감정은 내가 어디로 가야할지 알려주는 이정표 같은 역할을 하니까요. 다만 재경험이 PTSD 증후군의 한 요소임을 기억할 때 재경험이 지속되는 한 그에 수반되는 부정적 감정 또한 지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이 안전하지 못 하고, 내가 사소한 좌절 상황에도 대처하기 어려울 만큼 부서져 있고, 미래가 가망 없다고 느끼는 사람이 부정적인 정서 상태를 경험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자연스러운 인간 경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증상을 근본적으로 개선하려면 약물치료뿐만 아니라 자기, 세상, 미래에 대한 온건한 신념을 확보할 수 있게 돕는 심리치료가 필수적입니다.

 

과각성은 말 그대로 주변을 과도하게 경계하는 태도가 지속되는 것입니다. 늘 주변의 위협 인자를 살피고 투쟁/도주 준비를 하고(이로 인해 짜증이나 화가 많아집니다) 별것 아닌 자극에도 화들짝 놀라고 잠도 잘 못 자고 주의집중의 어려움 때문에 일이나 학업에서 제 기능을 하기 어렵게 된 상태입니다. 제가 알기로 PTSD에 대한 이해는 80년대 무렵에 참전군인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깊어졌습니다. 그 전에는 PTSD란 진단이 존재하지 않았고, 참전군인이 경험하는 증상을 설명할 길이 없었죠. 재경험, 회피, 기분 및 인지 상태의 부정적 변화뿐만 아니라 과각성은 참전군인(특히 베트남전)이 보였던 증상입니다. 언제 적의 총탄이 빗발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과각성 상태는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긍정적 측면이 있습니다. 적의 총탄이 아니더라도 유년기에 지속된 신체적/정서적 학대나 성폭력, 그밖의 다양한 외상 경험이 적의 총탄과 정확히 같은 역할을 하며 PTSD를 지닌 사람의 과각성 상태를 야기할 수 있습니다. 압도적 외상 경험에 직면할 가능성이 있다고 할 때 과각성 상태를 유지해야 그러한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낮출 수 있을 테니까요.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PTSD 증상은 외상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할 가능성이 있는 자연스러운 인간 경험의 일부입니다. 또한 통합된 정체감 및 다른 사람과 상호호혜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안전하게 살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증상의 역기능적 특성에 초점을 맞춘 약물치료는 PTSD의 근본 치료가 될 수 없습니다. 증상의 기능적 특성을 상황에 맞게 분별하여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심리치료가 병행되는 것이 바람직하며, 상술하였듯이 치료자와의 안전한 관계 경험 속에서 자기, 세상, 미래에 대한 온건한 신념을 재형성해 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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