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정서]
편집성 성격장애를 지녔을 것으로 추정되는 환자들을 간혹 보게 됩니다. 환자마다 다 다르지만 편집성 성격장애의 프로토타입을 가정하여 말한다면, 이들이 보이는 주요 정서는 분노입니다. 외부 환경이 언제나 내게 적대적이기에 나 또한 언제나 위협에 맞서 싸울 태세를 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분노는 생존을 가능케 하는 동력입니다. 안전과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방어 및 공격 태세를 상시 가동하여 적의 공격으로 인한 손상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생애 초기 기질 및 환경적 특성]
외부 환경에 대한 극도의 불신은 어디서 생겨난 것일까요. 주요 타인의 실제적인 학대나 방치가 있었을 수 있겠으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기질적으로 불안을 비롯한 부적 정서 수준이 높거나 자극에 대한 반응 역치가 낮거나 높은 수준의 공격성을 타고 났다면 주요 타인과의 상호작용에서 발생하는 비교적 온건한 자극마저도 투쟁-도피에 연관된 교감 신경계를 활성화하는 촉매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주양육자가 아이의 부정적 감정을 열심히 달래주려 해도 잘 달래지지 않아 불쾌한 느낌이 지속되기 쉽습니다. 주양육자 또한 높은 수준의 공격성을 지녔다면, 이런 경우 학대나 방임과 같은 반응이 야기될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주양육자의 불안 수준이 높다면 아이가 그런 기질을 타고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부모의 불안에 내재된 비합리적 신념이 대물림되는 가운데 외부 환경에 대한 불신이 강화되기 쉽습니다.
[생애 초기 대상표상의 영속화]
어떤 식으로 전개되든 간에 타인이나 세상에 대한 표상이 부정적으로 형성됩니다. 이는 적절한 수준에서 외부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호기심 및 탐색 경향을 감소시킴으로써, 긍정적 정서 경험의 기회가 적어질 뿐만 아니라 무엇이 실제로 위험하고 무엇이 실제로 위험하지 않은지를 분별할 기회가 줄어듭니다. 이는 다른 사람과 세상은 위험하다는 지각이 영속화되는 데 영향을 미칩니다.
[주요 방어기제: 분열과 투사]
사람이나 상황 모두 어느 시점에선 선일 수 있고 어느 시점에선 악일 수 있습니다. 한 시점에 선과 악이 공존하기도 합니다. ‘신호에 맞춰 횡단보도를 건너는 와중에 주머니 속 쓰레기를 무단투기하는 것이 사람이다’라고 어느 트위터리안이 적어 놓았던데 문제의 핵심을 내포하는 말이라 생각했습니다. 인간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고 대체로 두 가지가 공존할 때가 많은 존재죠. 위협적인 대상표상의 영속화는 이런 가변적이고 온건한 인식을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완전히 악하거나 완전히 선하거나.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는 인식이 이렇게 이분법적인 틀 안에 갇힘으로써 흑과 백 사이에 있는 회색지대를 볼 수 없게 됩니다. 사실 세상만사의 대부분은 이 회색지대 안에 있죠. 내 자신도 그러한데, 분열된 내 안의 악을 타인에게 투사함으로써 현실과 괴리되기 쉽습니다.
[자기상]
분열과 투사 방어기제는 ‘타인은 강하고 나는 약한 존재’, 혹은 ‘타인은 악하고 나는 선한 존재’라는 느낌으로 반복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체감하는 양상은 다를 수 있습니다. 즉, 편집증적 성격장애를 지닌 사람은 매우 확신에 가득 차 있고 자신의 결점을 인정하려 하지 않으며, 때로는 과대하거나 오만하고 독선적/통제적이기도 한 냉담한 사람으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자신을 결점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강하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인정하더라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사람만이 가능한 행동입니다. 편집성 성격장애를 지닌 사람은 자기애성 성격장애나 반사회성 성격장애를 지닌 사람만큼이나 자신의 취약성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는데, 자기애성이나 반사회성과 달리 자신의 강함을 내세우며 타인을 조종하거나 착취하지는 않는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특히 편집성 성격장애를 지닌 사람이 표면적으로 강함을 내세우는 것은 자신의 취약성이 노출되었을 때 타인의 박해를 받게 되는 최악의 상황에 맞대응하기 위한 예방적 조치이지 반사회성에서처럼 전능통제의 맥락에서 선제공격하기 위함은 아닙니다(물론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대인관계 양상]
성격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타인/세상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가 없기 때문에 늘 대인관계의 거리나 관계 방식을 조절하여 안전을 확보하고자 합니다. 예측과 통제를 통한 안전 및 자율성 확보가 이들의 대인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이슈로 작용합니다. 안전과 자율성을 확보할 수 없게 되는 것이 이들에게 재앙이기 때문에, 스스로가 통제할 수 있을 만큼 사회적 관계의 폭을 좁히고 정서적 관여의 깊이가 얕아지게 됩니다. 더욱이 그 좁은 관계 안에서도 투사가 활발하게 일어나다 보니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기만하거나 위협한다고 지각하는 데 따른 성마름이나 격분 상태에 처하기 쉽습니다.
숨어 있는 위협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연약한 감정을 불안전하게 느끼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능력이 심각하게 저해됩니다. 사랑하기 위해선 거절당할 위험을 무릅써야 합니다. 사랑하는 대상에게 선택 및 결정권을 넘김으로써 수동적이고 불확실한 위치에 머물러야 하는 순간도 많습니다. 끊어진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자신의 잘못이나 결점을 인정하며 사과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이 모든 게 편집성 성격장애를 지닌 사람에게는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편집성 성격장애를 지닌 사람 또한 타인과의 깊고 따뜻한 관계를 원합니다. 성격장애에 관한 글을 쓸 때 제가 자주 인용하는 낸시 맥윌리엄스의 말을 들어볼까요.
“이들은 깊은 애착을 형성할 수 있고 오래도록 충성할 수 있다. 아동기의 양육자와의 관계에서 아무리 박해당한 경험 혹은 부적절한 경험을 했더라도, 분명히 이들의 어린 시절에는 보살핌을 받는다는 느낌이 보존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가용성과 일관성이 있었다.” - 정신분석적 진단 1판, 306쪽.
[역전이]
편집성 성격장애를 지닌 사람을 만났을 때 느끼는 감정은 위협감입니다. 말 한마디 잘못 했다가는 뭔가 ‘재앙적인 일’이 야기될 것만 같아서 말을 아끼고 되고 신중하게 됩니다. 방어적이 되는 것이죠. 다른 환자들에게서는 느끼지 못 하는 감정이 바로 이 위협감이라 감별진단을 위한 가설을 세우는 데 활용합니다. 편집성 성격장애를 지닌 사람을 만났을 때 임상가가 느끼는 보편적 감정이기도 합니다. 제가 느끼는 감정은 아마도 편집성 성격장애를 지닌 사람이 느끼는 감정을 투사적으로 동일시한 결과일 수 있습니다. 감정의 많은 지분이 제게 있다기보다 환자에게 있다는 것이죠.
또 다른 역전이로서 상황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설명을 전달하고 싶은 마음을 들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환자가 보이는 반응이 상황에 부합하는 자연스러운 측면과 그렇지 못 한 측면으로 구분될 때, 자연스럽지 못 한 측면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제시하고픈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전략은 100%로 실패하며 치료자 또한 ‘공범’으로 몰려 공격의 대상이 되기 쉽습니다. 생존을 위해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돼 온 화석 같은 비합리적 신념을 논박한다는 것은 상당히 반치료적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편집성 성격장애를 지닌 사람과 어떻게 치료적인 관계를 맺어 나가야 하는 것일까요? 저의 치료적 역량이 부족하니 이 글은 여기서 매듭을 짓도록 하겠습니다. 너무 갑툭튀 매듭이죠.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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