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에서 글의 논리적 정합성과 문체가 뛰어난 책으로 이 책이 추천돼 있다. 호기심에 읽어 봤으나 논리적인 전개가 생각보다 따라 가기 쉽지 않았다. 펭귄클래식 시리즈에서 번역된 책으로 봤다. 번역 자체는 훌륭해 보이지만, 역자도 지적하고 있듯이 밀의 문체 자체가 좀 까다로운 구석이 있다. 잠깐 정신 팔면 내용을 못 따라갈 정도로 출퇴근길에 읽기에 적합한 책은 아니다.
“비록 차이들이 세상을 더 좋게 하지는 않는다 해도, 또 그들이 보기에 어떤 차이들은 세상을 더 나쁘게 한다 해도, 차이들이 존재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는 것을 알도록..(후략)”
밀이 이 책을 쓴 목적이다. 이 책의 핵심은 내가 이해하기로 ‘차이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이다. 자유주의 사상의 선구적 저작으로 이 책이 꼽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 개인의 사상이나 행동이 타인에게 명백한 해를 가하지 않는 이상 그의 사상이나 행동을 법적으로 규제할 아무런 철학적 근거가 없음을 역설한다. 유시민이 전두환 정권하에서 이 책을 읽고 얼마나 힘과 위로를 얻었을지 공감이 된다.
하지만 ‘타인에게 명백한 해를 가하지 않는 이상’이라는 조건이 너무 추상적이라 느꼈는지 밀 또한 책의 후반부에 다양한 예를 들어 개인의 자유를 규제해야 할 때와 그렇지 말아야 할 때를 예증한다.
구체적인 수준의 예를 많이 들고 있지만 그럼에도 복잡한 현실적 문제들에 밀의 주장을 적용할 때는 난제들이 많이 발생할 것 같다. 예를 들어 노예로 스스로를 파는 것은 법적인 제한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가 단 한 번의 행동을 끝으로 미래의 어떠한 자유의 행사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논리를 자살에 대입해 보자. 자살하려는 사람을 막을 권리가 있다는 주장의 근거는 자살이 개인의 자유라는 근거 자체를 스스로 없애 버리는 행위라는 것이다. 자살할 수 있는 자유라는 말이 어폐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이와는 반대되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이런 차이가 발생할 때 자살할 자유를 외치는 사람들은 밀이 그토록 강력히 옹호하는 ‘자유’를 침해당했다고 느끼게 마련이다. 이들은 자살에 관해 “그가 그렇게 선택한 것이 그에게 바람직한 것이거나 최소한 견딜 만한 것이라는 증거”로 볼 것이다. 입장에 따라서 ‘바람직하다’고 평가하는 기준이 달라지는 것이다.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절대적인 기준을 마련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사회적 개입에는 다수의 횡포라는 혹은 소수의 압제라는 주관성이 개입할 여지가 늘 존재한다. 이에 자살할 수 있는 자유를 부정하기 위해서는 자살하려는 사람을 막기 위해 사회적 개입을 한다 하더라도, 이 개입의 정당성을 “논박하고 반증할 자유가 완벽하게 존재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판단에 대한 모든 힘과 가치는 그것이 잘못된 것일 때 올바르게 고쳐질 수 있다는 그 유일한 속성에 달려 있기 때문에, 판단을 올바르게 고치는 수단이 항상 준비되어 있을 때에만 판단에 신뢰를 둘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현명했던 사람 중 한 명인 소크라테스조차 자신의 생각의 타당성을 검토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범인은 말할 것도 없다는 내용의 말을 책 어딘가에서 본 것 같다. 실상은 맹목과 아집에 사로잡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무시하는 때가 얼마나 많은가 돌아보게 된다.
“자기 쪽 주장만 아는 사람은 그 주장에 대해 거의 모르는 것이다.”
이 책이 자유주의의 사상적인 토대가 되었다 하는데, 정치철학적인 부분은 잘 모르겠고, 실상 정부의 역할에 관한 논의 자체도 이 책의 핵심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책 말미에 짧게 쓰였을 뿐이다. 이런 부분보다, 생각의 차이를 인정하고 과학적인 가설 검증 방식을 통해 어떤 주장의 타당성을 논하는 것이 문명의 진보에 얼마나 중요한지 역설하는 책으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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