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dgment is so deeply rooted in the human mind that the practice of mindful awareness itself is subject to self-criticism.
Mindfulness and Psychotherapy, 62쪽.
마음챙김 명상을 날마다 5분 정도 하고 있습니다. 네 달째 접어들었습니다. 한 달에 절반 정도 하고 절반은 건너 뛰고 있습니다. 5분 짬내는 게 쉽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을 제 와이프도 압니다. 그래서 면박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4살, 2살된 제 아이들과 싸울 때 그렇죠. 마음챙김을 그렇게 하는 데 애들하고는 왜 그 모양이냐면서 면박+놀림을 당하고 있습니다. Crazy(더 격한 용어로 표현합니다;) 마음챙김 그만 하라고 말이죠.
와이프가 저를 놀리면서 배꼽잡으며 뒤로 넘어갈 때마다 명상 루틴에 약간 회의감이 밀려옵니다. 제 자신이 좀 못나 보이기도 하고요. 위에 인용한 문장처럼 자기비판적으로 됩니다. 마음챙김한다면서 왜 애들 앞에서는 후회되는 행동을 할 때가 많을까. 3달이나 했는데 소용이 없네. 그만 둘까. 하고 말이죠.
그럼에도 저는 이 모든 상황을 수용하면서 꿋꿋이 마음챙김 명상을 하려 합니다. 미처 해결되지 못 한 원가족과의 숙제가 양육이라는 상황에서 더 활성화가 잘 되는 것 같고요. 마음챙김을 통해 이 활성화를 더 잘 알아차리고 있다고 믿으며 이제 자극에 오토매틱하게 반응하지 않는 단계로 넘어가 보려 합니다. 잘 될 지 아직 알 수 없지만, 마음챙김 명상을 꾸준히 하다 보면 잘 될 거라 믿으면서 말이죠.
아시다시피 이건 심리치료자로서의 역량 강화 훈련이기도 합니다. 심리치료 자체가 내담자나 환자를 재양육하는 과정이 될 때가 많으니까요.; 더욱이 역전이나 저항의 폭풍에 직면하여 치료자로서 자기의심과 자기비판이 깊어질 때, 그 때야말로 자기수용하는 태도가 절실해질 수 있습니다. 애들 키우면서 이런 능력을 훈련한다는 심정이에요.
어쨌거나 누구나 부모되기가 처음일 수밖에 없고 정해진 답도 없으니 복잡한 과제 앞에서 압도되기 쉬운 것 같아요. 세상의 모든 초보 부모님들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응원합니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쏟되 그가 변화하는 것은 나의 통제를 벗어나니,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는 맥락에서 T. S. 엘리엇의 다음 시 구절이 위로가 됩니다.
Teach us to care and not to care
Teach us to sit still
마음 쓰고 마음 쓰지 않도록 가르쳐 주시라
가만히 앉아 있도록 가르쳐 주시라
번역은 여기에서 가져왔어요. 나중에 상담소 차리면 이 시를 걸어놓고 매번 리마인드 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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