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격장애 감별 시 각 성격의 프로토타입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더욱이 단일 성격장애로 사례개념화할 수 있는 환자는 거의 없고 대부분 여러 성격장애의 혼합일 때가 더 많기 때문에, 각 성격의 프로토타입을 중심으로 다른 성격 특성과의 융합 과정에서 어떤 양상이 펼쳐질 수 있는지 이해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다만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 일은 각 성격장애의 프로토타입이 뭔지 이해한 상태에서 다른 성격장애와 비교해 나가며 그 프로토타입의 특성을 구체화시키는 것입니다. 결국 각각의 성격장애라는 것도 다른 성격장애와의 비교를 통해 더 확실히 이해할 수 있게 마련입니다.
DSM-5가 각 성격장애의 진단기준을 제시하고 있으나 피상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에 DSM-5 분류 중에서도 성격 파트 진단기준은 잘 참고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진단기준이 전문가 사이의 의사소통 도구이기 때문에 알고는 있어야 하고요.
제가 각각의 성격장애를 개념화하는 데 주로 보는 책은 이 블로그에서 누누이 말했지만, 정신분석적 진단과 밀론이 쓴 Disorders of Personality(3판)입니다. 후자는 영어가 꽤 어렵긴 한데 그래도 이해 못 할 수준은 아니기 때문에 일터에 한 권 두고 틈틈이 봅니다.
아래 내용은 밀론과 낸시 맥윌리엄스를 참고하여 편집성 성격과 다른 성격을 비교한 것입니다. 이 블로그에 편집성 성격장애를 키워드로 들어오시는 분이 많고, 마침 오늘 아침에 편집성 성격과 관련된 내용으로 수퍼비전을 하기도 해서 다른 성격과의 구분을 통해서 편집성 성격의 프로토타입에 대해 조금 더 부연설명해 봅니다.
사족이지만, 밀론의 성격 이론은 진화이론에 기반하고 TCI에서의 이론적 배경과도 통하는 구석이 있어서 TCI를 통해 성격을 감별할 때 아주 유용합니다.
<편집성 vs. 회피성>
밀론의 이론에서 편집성 성격은 회피성 성격과 비슷하게 위험이나 위협에 대한 극도의 민감성을 지닌다는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두 성격 모두 의심이 많고 당황스럽거나 수치스러운 상황에 맞닥뜨리는 것에 대한 공포가 크고, 스스로의 속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잘 드러내놓지 않습니다. 스스로에 대해 느끼는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수준에서의 부적절감을 공상 속에서 만회하려 할 때도 많고요.
하지만 편집성에서는 회피성에서보다 무의식적 수준에서 부정적 자기이미지를 다룰 때가 많고, 자기의 나쁜 측면을 타인에게 투사하기 쉽다는 점에서 회피성과 차이가 있습니다. 회피성은 대인 간 갈등 상황에서 말 그대로 회피적인 모습을 보이기 쉽지만, 편집성은 타인에게 자기 나쁜 측면을 투사하고, 투사적 동일시 과정에서 타인이 자신의 투사에 일치되게 행동한다고 판단할 때 상당한 분노를 표출하기 쉽습니다. 갈등에서의 대처 양상이 확연히 다르죠.
또한 편집성이나 회피성이나 다른 사람을 신뢰하기를 꺼리는 면이 있지만, 회피성이 자신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다른 사람을 통해 확증하게 되는 것이 두려워 그렇게 행동한다면, 편집성은 자기 속마음, 약한 구석을 상대에게 오픈했을 때 다른 사람이 그것을 이용해 자기를 위협할까봐 두려워서 타인을 믿기 힘들어 하는 쪽에 가깝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피성에서 외로움을 깊이 느낄 수 있는 데 반해, 편집성에서는 상대적으로 그러한 구석이 적을 수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회피성 성격을 지닌 사람은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비교적 양호하고 유머를 지녔을 가능성도 상대적으로 높고 여러모로 성격 구조가 훨씬 안정적인 데 반해서 편집성 냉담하고, 유머가 부재하고, 정서적으로 좀 flat한 상태이거나 불같이 화내는 상태를 오가는 불안정성을 보일 수 있습니다. 다만 회피성 성격에도 정도차가 있고 회피성 성격의 안 좋은 쪽 극단은 편집성 성격과 훨씬 더 많은 공통분모를 지니기 쉽습니다.
<편집성 vs. 자기애성>
편집성과 자기애성 성격은 자기상이 과대하고 부정적인 자기가 의식 수준에 들어오는 것을 견딜 수 없을 때가 많다는 점에서 공통분모를 지닙니다. 그리고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에 대해서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기 쉽고 지속된 원한을 품고 있기 쉽죠. 하지만 자기애성 성격은 다른 사람의 아부에 약한 데 반해서 편집성은 다른 사람이 아부해 오면 그 저의를 의심부터 하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집성은 동일한 가치를 공유한다고 지각된 사람과의 연대가 가능합니다(소수자를 위한 연대에서 최전선에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어느 정도의 편집성 성격을 지녔다고 보고요). 자기애성에서는 이런 연대가 가능하기 어렵죠. 자기애성 성격을 지닌 본인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 하든 간에 주변의 모든 사람이 이용이나 착취의 대상이 되기 쉽습니다.
또한 자기애성은 주변 사람들이 자신의 요구에 부응하고 그로 인해 상황이 더 나아질 것으로 기대하기 쉬운 반면, 편집성 성격을 지닌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은연 중에 좌절시키고 언제라도 공격 받을 수 있다는 예상을 하기 쉽습니다. 다만, 자기애성 성격에서 어떤 자기애적 상처로 인해 부정적 자기상이 활성화되는 시기에는 다른 사람들의 의도적으로 자신의 성취나 성공을 저해하고 있다며 편집증적인 양상을 보일 수 있습니다.
<편집성 vs. 반사회성>
두 성격 모두 대인관계를 제로섬 게임으로 보는 데 능하죠. 이기거나 지거나, 선이거나 악이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이런 생각이라면 세금 꼬박꼬박 내 온 자국 내 이민자들이라 하더라도 경기부양을 위한 현금 지급에서 배제시켜버리겠죠. 도널드 트럼프처럼. 이분법적인 세계관을 통해서 세상을 보고, 이 게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자율성을 적극 활용한다는 점에서 두 성격은 공통분모를 지닙니다.
다만 자율성을 지키기 위해 사회적인 기대나 규범 등을 무시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쉬운 것은 반사회성 성격에 더 가깝고,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이 명백한 피해를 입더라도 내 알 바 아니라는 식으로 일관할 수 있는 것 또한 반사회성 성격 특성에 가깝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편집성은 사회적 기대나 규범을 대놓고 무시하진 않습니다. 무시하고자 할 때도 명분이(특히 도덕적 명분) 있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편집성 성격은 자율성을 강조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피해를 입는 것에 대한 최소한의 죄책감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반사회성 성격의 핵심적 방어기제인 전능통제가 나 이외의 모든 사람에게 무차별적으로 적용되지 않습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가치를 공유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심지어 자율보다 타인의 기대나 요구에 부합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편집성 vs. 강박성>
오늘 수퍼비전한 사례와 연관이 있는데요. 두 성격 모두 합리성을 가치 있게 여기고 일관되게 자기통제 노력을 기울입니다. 겉으로 보여지는 행동과 감정 모두에서 그렇죠.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이기 어렵고요. 자연스레 유머도 부족합니다. 자기나 타인의 행위 평가에서 합리성이나 도덕적 정당성이 어느 만큼 있느냐를 따지기 좋아하는 것도 비슷하고, 방어적으로 디테일에 몰두하는 것도 비슷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두 성격 모두 매우 완고하고 융통성 없는 고지식한 모습으로 비춰지기 쉽습니다.
다만 이런 완고함? 고지식함이 나타나는 발달적 배경이 전혀 다릅니다. 두 성격 모두 성장 과정에서, 예상되는 위협을 피하고자 민감한 센서를 발달시키게 마련이지만 편집성의 발달 과정에서 이 위협 혹은 처벌은 예측이 가능하지 않았고 일관성이 없었다고 지각되기 쉽습니다. 반대로 강박성에서는 위협이나 처벌의 일관성이 있을 가능성이 높은데요. 예를 들어, 무언가 주요타인이 지닌 매우 높은(!) 기대 수준을 충족시키지 못 했을 때만 처벌이 주어졌다면, 이 기대 수준을 내사한 아이는 자라서 매우 엄격하고 혹독한 초자아를 통해 스스로를 다그칠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것밖에 못 하는 거야?! 더 열심히 하라고! 이렇게 되는 거죠. 결과적으로 강박성은 경직된 방식으로 룰에 집착하거나 완벽주의적인 태도를 지속하거나 일중독 등을 통해서 초자아의 요구를 만족시키려 하기 쉽습니다.(어느 정도 제 얘기 같기도 하고요. ;;) 개인 내적 수준에서의 초자아뿐만 아니라 사회적 기대나 요구, 규칙이라는 사회적 초자아(?)에 대한 순응도도 높을 수밖에 없죠.
하지만 수행 수준 등과는 전혀 관련이 없고 예측 가능하지도 않은 처벌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은 편집성의 경우, 권위에 대한 반감이 엄청날 수 있고(그래서 학생운동, 소수자 운동 등에서 선두에 설 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기능적인 성격 자원이 될 수도 있죠.), 모든 권위를 공격의 원천으로 지각하면서 자율성을 지키려는 끝없는 의식적/무의식적 투쟁을 벌이게 됩니다.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세계관은 개인 내적으로도 적용되죠. 즉, 용납되기 어렵고 죄책감이나 수치심을 자극할 수 있는 자기의 측면들이 모두 투사를 통해 외부 특성으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속으로는 분개하더라도 최소한 겉으로는 순응적인 태도를 보이기 쉬운 강박성과 달리 다른 사람의 사소한 말이나 행동도 본인 기대에 맞게 부정적이고 위협적으로 해석하여 발끈하기 쉬워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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