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대금업 하는 노파 하나를 죽이면 만인이 행복하다. 이성을 신봉하고 공리주의로 무장된 라스콜니코바가 도끼로 노파의 정수리를 찍어 버린 표면적인 이유는 이런 것이었다. 1800년대는 계몽주의가 지배하던 시대니 이해할 법도 하다. 이성이 신으로부터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기 시작한 이후로 가치의 기준점은 '보다 많은 사람의 행복'으로 전환됐는데, 이 행복이란 것은 아무리 아름답게 포장하려 해도 결국 개인의 쾌/불쾌에 따른 것으로서 홉스식의 약육강식 논리를 토대로 했고, 보다 많은 사람의 행복이 아니라 저마다의 욕망과 쾌락이 최우선인 그런 행복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딴 얘기지만 이게 자본주의의 논리라고 생각한다). 철저하게 이성적이었던 라스콜니코바가 살인을 하게 되는 과정을 나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했는데, 만인의 행복이라는 대의명분이 있었지만, 그 자신의 욕망과 쾌락을 노파에게 저당 잡힌 상황에서 수치심을 느끼며 공격성을 표출한 것이라고밖에 달리 생각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다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로서, 라스콜니코바는 어머니와 여동생이 자기만 바라보는 상황과 여동생의 자기희생적인 태도에 진저리를 쳤을 것 같다. 가족이 자신에게 의지함으로 인해 자율성이 침해 당한다고 생각하니 빡이 치는 건 당연지사. 게다가 라스콜니코바의 어머니는 그녀 자신이 나르시시스트이고 아들을 너무 이상화한다. "나는 네가 하는 일은 뭐든 다 아름다운 일이라고 확신한다!" 이에 대한 아들의 짜증섞인 대답. "그렇게 확신하지 마세요." (...) "나한테 무슨 권리가 있었겠어요." 아무튼 물심양면 지원해주는 가족에게 화를 대놓고 표현하기는 어려운 노릇이고, 아니 그 전에 분노를 억압해서 자신에게 그런 마음이 있다는 것 자체를 몰랐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가족을 향한 큰 분노가 노파에게 전치돼 노파를 살해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어려운 형편에도 대학에서 공부는 하고 있지만, 생계에 무관심한 자신이 밉고 가족에 대한 죄책감도 들고 했을 것 같은데, 그렇다고 일을 하자니 엄두는 안 나고(이 부분에서 친구인 라주미힌과 크게 대조적이다). 지금까지 읽은 바로는 주인공 녀석, 자율성과 독립성을 좇지만 책임감은 그닥 없는 머리만 산 의존적인 녀석인 것 같다. 더욱이 제 앞가림도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한테 잘도 돈을 퍼준다. 한편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주기는커녕 아들에게 과도한 찬사를 보내며 아들이 내적인 공허감과 수치심을 갖게 한 어머니가 라스콜니코바의 이러한 성격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 같다. 라스콜니코바는 노파를 죽이는 상징적인 행동을 통해서 어머니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려 애를 써보지만, 스스로의 행동 지침이나 기준이 부재하고 자신을 신뢰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상황이 개선될 가망이 보이지 않는다. 1000페이지남짓인 소설의 중반부에 들어섰는데, 라스콜니코바가 어떤 행로를 밟게 될 지 궁금하다. 얼핏 본 스포일러에 따르면 '소피야 세묘노브나 마르멜라도바'(이름이 다 이 따위로 어렵다;)라는 여자 만나고 중심을 잡아 나가는 것 같긴 한데.. 궁금하다.
2013.07.12
덧: 낸시 맥윌리엄스의 정신분석적 진단 12장을 읽고 있는데, 라스콜니코바는 편집증적인 요소, 의존적 요소, 자기애적 요소, 우울성 성격 요소 등을 두루 갖춘 피학성 성격으로 가장 잘 개념화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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