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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일상

정치에서의 선악: 정치적 믿음의 종교화

by 오송인 2017.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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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도덕이 공존할 수 있을까. 플라톤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본 것 같다. 철학자가 통치하면 정치체계라는 것이 이데아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본 것 같다. 국가론을 읽어보면 그 정치체계라는 것은 각자 자기 포지션에 맞게 행동하는 것을 일종의 강령으로 삼는다. 농부는 농부답게, 학자는 학자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왕은 왕 답게 처신하는 것이 이상적인 국가의 모습이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되는 것은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이다. 인간은 타인을 공감할 수 있게끔 만들어져 있다. 그게 인간이 지닌 하드웨어상의 default다. 하지만 공감 능력은 기질이나 성장배경에 따라 천차만별이 될 수밖에 없다. 때로는 이기심이나 탐욕에 눈이 멀어 다른 사람을 해치는 수준에까지 이를 수도 있다. 극단적인 경우다. 


타인을 공감할 수 있는 능력과 이기심 및 탐욕은 늘 팽팽한 긴장 관계를 이룰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지하철에서 힘들게 짐을 끌고 올라가는 노파를 보면 도와야겠단 생각이 들기 쉽고 실제로 도와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 노파가 내게 그 짐을 역에서 1km 떨어진 자기 집까지 옮겨줄 수 없겠느냐고 부탁했을 때는 얘기가 달라진다. 나는 나의 시간과 힘을 그 정도로까지 소모하고 싶지 않을 것이고, 아마도 거절할 것이다. 


자신의 처지나 상황을 고려하는 이런 마음이 타인에 대한 배려보다 커지는 것이 결국 이기심이나 탐욕으로 발전하는 데 필요한 연료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자기를 먼저 고려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이런 마음은 누구나 지닌 것이다. 심지어 부모가 자식을 자기자신보다 더 아낀다는 것도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건 모성애처럼 일종의 사회문화적 산물이지 본능은 아닌 것 같다. 


아무튼 그런 연료를 이기심이나 탐욕의 불길로 타오르게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안위를 침범하면서까지 나의 안위를 지키고자 하는 의식적 및 무의식적 노력이다. 나의 행동으로 인해 타인의 안위가 침해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식적 수준에서 알든 모르든 그 행동의 결과로 인해 타인이 피해를 보게 되었다면 그게 이기심이고 탐욕인 것이다. 극단적으로는 나치 전범들을 예로 들 수 있다. 자신은 일개 공무원이었을 뿐이고 대학살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자행되는 줄도 몰랐다 지시를 따랐을 뿐이다 라고 항변한들 죄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무지도 죄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한 예다. 


다시 플라톤으로 돌아와 보자. 플라톤이 꿈꾸던 것은 일종의 공산주의 사회다. 국가론에는 육아도 공동으로 해야 한다는 대목이 나온다. 국가의 모든 틀과 프로세스를 통치자이자 철학자인 한 명의 개인이 짜게 된다. 여기서 딜레마가 발생한다. 그 개인은 신이 아니다. 철학자이고 이데아를 볼 수 있는 인물이긴 하지만 이데아 자체는 아니다. 자기보호라는 목적에서 파생되는 이기심과 탐욕이 존재한다. 그러한 이기심과 탐욕이 국가 체제에 무의식적으로라도 반영되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당연히 없다! 플라톤의 철학과 어떻게 보면 대척점에 존재하는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국가도 결과론적으로는 같은 결함을 지닌다. 프롤레타리아가 지배하는 국가라고 해서 인간의 이기심이나 탐욕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을까. 소련을 비롯한 공산주의 국가들의 말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공산', 즉 공동으로 생산하여 공동으로 소유하고 공동으로 분배하는 그런 이상적 시스템의 추구는 언제나 서슬퍼런 독재로 변질됐고, 독재에 저항하는 쿠데타와 정권 전복 등으로 이어졌다.


서론이 좀 길었는데 여기서부터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정치는 이상을 추구하지만 정치를 하는 인간은 이상적이지 못 하다. 이기심과 탐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 개개인들이 모여 하나의 정당을 만들고, 정당과 정당이라는 욕망의 덩어리들이 다시 치열하게 경합을 벌인다. 욕망의 덩어리들은 해체되고 분열되었다가 뭉치고 그러다가 다시 분열되는 양상을 반복한다. 어떤 정당에 대한 지지라는 것은 그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의 이상적 가치관을 투사하는 것이다. 이 정당이라면 내가 지닌 가치를 어느 정도 구현해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에 투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성적불평등 해소라든지 주택 불균형 해소 등등.. 하지만 이건 말 그대로 투사일 뿐이다. 그 정당이 그런 가치들을 슬로건을 내건다 한들 실제로 그 가치가 어느 정도로 구현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정말 고결한 인물들이 그 가치를 이백프로 실현시키려 똘똘뭉친 정당이라 한들 변수가 너무나 많다. 더욱이 정당 자체가 이합집산하는 이기적이고 탐욕 어린 개개인들의 느슨한 집합체이기 때문에 가치 구현이 어느 정도로 될지, 혹은 아예 안 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고 본다. 정당의 수장도 알기 어렵다.


한 정당에 대한 맹목적인 지지를 하기보다 그 정당이 내걸었던 구체적인 공약들과 공약의 시행 여부를 검토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이다. 문재인과 노무현이 훌륭한 인물이긴 하지만 열린우리당이 훌륭한가?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열린우리당이나 새누리당이나 도찐개찐이다. 회의론을 펴자는 게 아니다. 새누리당이라 하더라도 그 당에 소속된 의원들 중에는 분명 사회 양극화 해소에 기여하는 공약을 내거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남경필 경기도지사가 그렇다. 이 사람이 친미사대주의 + 아들 교육 하나 제대로 못 시키는 그런 무능한 아버지 이미지로 낙인이 찍혀 있다 한들 경기도에서 이 사람이 주도하여 진행되고 있는 사업들을 보면 심지어 정의당보다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사업도 있어 보인다. (예를 들어 내년 1월부터 시행되는 청년 복지 정책들.) 어떤 정당에 대한 평가는 이런 사업들에 기반하여 구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여전히 이미지 정치가 먹힌다. 아마 향후 십 년 정도는(혹은 이십 년 정도는) 더 그럴 것 같다. 


심리학적으로 얘기하면 이건 무언가? 인간이 무리를 이루어서 내집단이 아닌 외집단을 배척하고 그럼으로써 자기 집단의 결속을 다진다는 것은 널리 증명된 사회심리학적 이론이고, 김정은이나 트럼프가 하고 있는 짓의 핵심이기도 하다. 인지심리학적으로 한 번 살펴볼까? 니 편 내 편, 내집단 외집단 나누는 것은 인지적인 구두쇠 경향과도 관계가 있다. 인간의 작업기억(컴퓨터로 치자면 램)은 사람마다 용량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성능의 한계가 있고 너무 많은 정보가 유입되면 과부하가 걸리기 때문에 인생의 많은 선택이나 판단에서 기존에 지니고 있던 도식이란 걸 따른다. 도식은 살아오면서 형성된 일종의 함수패턴이다. a를 넣으면 b가 나오는 함수가 살아오면서 대체로 도움이 되었다면 설령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이 함수공식을 따르게 돼 있다. 뇌에 과부하가 걸리지 않게 도식을 사용하는 것이고, 이게 인지적 구두쇠 경향이다. 인지적 구두쇠 경향을 내집단 외집단과 연관지어 보면, 매번 적군인지 아군인지 판단하는 것이 상당한 스트레스일 수 있기 때문에 암호를 부여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곰이라고 외쳤을 때 호랑이라고 답해야지 사자라고 답하면 총 맞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노무현이 최고고 문재인이 최고다라고 외쳤을 때 그렇다고 답해야지 아니다라고 답하면 적이 된다(예를 들어 노사모 등). 박정희와 박근혜가 최고다라고 외쳤을 때 그렇다고 답해야지 아니다라고 답하면 적이 된다(예를 들어 어버이연합 등).


외부 세계는 늘 부유하고 불확정적이다. 인간은 이러한 불확정적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려 한다. 즉 우리가 받아들이는 세상은 실제 세상 '그 자체'라기보다 뇌에서 한 번 필터링된 구조화되고 얼마간은 확정적인 세상이다. 쉽게 말해 우리는 늘 선입견을 가지고 세상을 본다. 그럴 수밖에 없다. 안 그러면 우리는 생존에 필요한 예측을 할 수도 없고 대혼돈에 빠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심리적 기능에는 늘 장단이 존재한다. 선입견이 과도해지면 아우슈비츠 대학살 같은 것이 발생하는 것이다. 유대인은 싸그리 말살해야 하는 존재다. 이 얼마나 무서운 선입견인가.


정당에 대한 지지에 있어서도 늘 지나친 선입견을 경계해야 한다고 본다. 새누리당이 전두환이나 이명박, 박근혜 같은 나라를 말아먹고 국민을 적으로 몰아붙인 미친 대통령을 배출했다 하더라도 새누리당은 악이고 더불어민주당(혹은 정의당)은 선이다 라는 도식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나치에 대한 맹목적 충성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정치에서는 선도 없고 악도 없다. 나는 가톨릭 신자고 철학적으로는 절대론자지만 정치에서만큼은 철저한 상대주의다. 기회주의자라고 비난 받아도 좋지만 정치에서는 나의 이기심이나 탐욕에 기반하여 움직이고 투표할 것이다. 현재 내가 노동자계급이기 때문에 이 계급의 이익을 지키려는 정치인이 많은 정당에 투표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무주택자이고 사교육이 뭔지도 모르고 자라온 사람이기 때문에 다주택자에 대한 과세율을 올리자는 주장을 하거나 교육에서의 평등을 사수하려는 정치인이 많은 정당에 투표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부르주아계급에 속하고 다주택자라면 상황은 어떻게 될까? 그건 나도 장담할 수 없다. 현재의 가치관과 선택을 유지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럴 것 같다. 세금을 충실히 납부하고 교육 기회의 평등을 위해서도 노력할 것 같다 어떤 식으로든. 하지만 장담할 수 없다. 말은 늘 행동 앞에선 작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많은 경험을 통해 배웠기 때문이다. 


선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결국 다른 사람에 대해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 것이며 자신의 행동에 대해 섣불리 예측하지 않는 것이다. 세상이 늘 선과 악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며, '나에겐 개XX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성실한 아빠일 수도 있다', '내가 지금은 이런 생각을 견지하고 있으나 나중에는 아닐 수도 있다..' 다른 가능성을 늘 염두에 두는 개방적 사고가 필요하다. 가치관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회의주의에 빠지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변화할 수 있음', '다른 가능성 있음'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인지적 유연성이고 일상적인 말로 표현하면 겸손이다. 신은 절대적이나 인간은 유한하고 늘 변화 중에 있다. so 매사 가능성을 열어두고 겸손할 필요가 있다. (심리평가보고서 쓸 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이다. ㅎ)


덧. 괜히 단톡방에서 정치 얘기로 잉여력 자랑하던 어느 날 작성한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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