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산 게이가 쓴 [헝거]를 읽는 중이다. 남자친구라고 여겼던 이로부터 당한 10대 시절의 집단성폭력으로 인해 자신이 얼마만큼 무너지게 됐고, 성적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 폭식을 반복하며 살을 찌울 수밖에 없었던 과거에 관해 지나친 자기연민 없이 덤덤하게 얘기하고 있다.
비만한 사람을 바라보는 은근한 사회적 조소와 멸시를 어떤 식으로 경험해 왔는지, 자신의 거대한 몸을 줄일 수 없으니 심리적으로 위축시키기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데서 경험하는 온갖 감정들은 어떤 것인지가 책에 고스란히 적혀 있다. 분노, 슬픔, 자조, 수치심, 죄책감, 모멸감 등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표면적인 내용보다 그가 어떤 식으로든지 간에 스스로의 삶의 통제권을 지켜나가려고 하는 의지에 방점을 두어 읽게 된다.
문신으로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것이 내가 내 몸에 한, 내가 목청껏 동의한다고 외치는 내 선택이라는 점이다. 나는 이렇게 내 몸에 표시를 한다. 나는 이런 식으로 내 몸의 주인이 된다. - 헝거 중에서.
폭식과 그로 인한 초고도 비만이 삶에 많은 제약을 가하는 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평균 체형으로 돌아가려고 애쓰지 않는 것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몸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이다. 더 나아가 가족과 사회가 제시하는 기준(특히 여성의 몸에 관한 기준)이나 이상의 타당성에 의문을 품은 채 자율성과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나가려는 각고의 노력이라는 관점에서 이 책은 보편성을 갖는다.
헝거를 읽다가 신경석 폭식증(Bulimia Nervosa)에 관해 궁금해져서 김정욱이 쓴 [섭식장애]라는 책을 읽어 봤다. 그간 정신과에서 신경성 식욕부진증(Anorexia Nervosa, 이하 거식증)이나 신경성 폭식증 환자를 본 경험이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다. 증상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을 특징으로 하는 거식증 환자는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의 폭식 행동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아는 신경성 폭식증 환자 또한 스스로 정신건강 관련 기관을 찾기 어렵다. 많은 환자를 보았음에도 거식증이나 신경성 폭식증 진단 받은 환자를 보기 어려운 이유이다.
[진단기준]
잘 모르니 이 책을 펼친 것인데, 학부생들이 읽을 만한 입문서인지라 다소 피상적인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래도 기본 개념을 다시 잡기에는 유용하다. 우선 거식증을 진단 내리는 데 핵심적인 3요소는 1) 현저한 체중 미달, 2) 체중 증가에 대한 지나친 공포를 경험하거나 체중 증가를 막기 위한 지속적 노력을 기울이는 것, 3) 신체상에 대한 지각에서 이상이 있고, 자기개념에서 체중과 체형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거식증은 크게 두 타입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폭식/제거형(Binge-eating/purging type)이고 다른 하나는 제한형(Restricting type)이다. 전자는 저체중을 유지하기 위해 구토를 하거나 설사제 및 이뇨제 등을 남용한다. 후자는 구토나 약을 쓰진 않지만 과도한 운동 등을 통해 저체중을 유지하려 한다.
신경성 폭식증은 1) 비슷한 시간 동안에 남들 먹는 정상적인 양보다 훨씬 많은 음식을 섭취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먹는 행동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고 느낀다. 2) 폭식 후에는 과도한 운동, 구토, 설사약 등을 사용하여 체중을 조절하려고 한다. 이러한 일이 지난 3달 동안 최소 1주일에 한 번은 있어야 이 장애로 진단될 수 있다. 3) 이들도 마찬가지로 자기개념에서 체중과 체형이 차지하는 비중이 과도하지만 신체상에 대한 왜곡은 없다.
[감별 진단]
거식증과 신경성 폭식증은 반대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체중 증가에 대한 두려움과 먹는 것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는 데 대한 두려움"을 지닌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신경성 폭식증을 지닌 환자라 하더라도 폭식 후에 체중을 조절하려고 설사제 등을 사용하는 것을 상기하면 된다. 더욱이 거식증의 폭식/제거형과 신경석 폭식증을 감별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 폭식을 하고 설사제를 사용해도 체중이 심하게 미달이면 거식증, 정상이면 신경성 폭식증으로 본다.
이런 경우는 어떨까? 거식증의 폭식/제거형으로 진단 받은 적이 있으나 현재 부분 관해 상태에서 정상 체중을 유지하는 중이다. 이 환자를 본 임상가가 환자가 이전에 거식증 진단 받은 것을 모르고(즉 체중 미달이었던 적이 있었음을 모르고) 폭식 및 설사제 사용에 관해서만 안다면 신경성 폭식증으로 진단내릴 가능성이 높다.
두 장애를 변별하는 데 핵심 요소는 체중이 심각하게 미달인지 여부보다 증상에 대해 자아동조적으로 느끼는지 자아이질적으로 느끼는지의 차이 같다. 이를 치료와 관련시켜 보면, 거식증은 자아동조적이라 치료가 어렵고 신경성 폭식증은 자아이질적이라 거식증에 비해서는 치료가 수월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하지만 두 장애 모두 자율성이나 정체성과 같은 자기개념에서의 발달 문제로 볼 수 있고, 이는 신경성 폭식증 환자라 하더라도 신경증 수준의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일반적인 치료 방식과는 다른 접근을 요구하는 것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
[정신분석적 이해]
치료와 관련하여, [섭식장애]에 거식증 및 신경성 폭식증에 관한 정신분석적 입장과 인지행동적 입장에 관한 설명이 실려 있는데 별 정보가가 없다. 예를 들어 정신분석적 입장을 살펴보면,
매스터슨(Masterson, 1977)은 거식증 환자는 자기표상과 대상표상이 왜곡되어 있고, 분리-개별화에서 어려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말은 자기 자신과 대상, 즉 다른 사람을 일관되게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기 어렵고, 어머니로부터 심리적으로 독립해서 자기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는 의미다. 36쪽.
이런 설명은 굳이 거식증 환자가 아니라도 통용될 수 있는 것이라(특히 경계선 성격장애에 해당) 장애 특정적 원인에 대한 설명이라고 보긴 어렵다. 정신분석적인 설명이 늘 맞닥뜨리는 일반적인 한계일 수 있다.
반면 거식증이라는 표면적인 증상이 환자가 경험하는 내적 갈등의 표현이라는 식의 정신역동적 설명은 설득력이 있다. 왜곡된 신념, 자동적 사고 등을 파악하여 사고 및 행동을 수정하려 하는 인지행동치료의 성급한 접근 방식보다는 환자의 내적 경험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자기보호로서의 증상]
유전이나 사회문화적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하더라도 헝거에서 록산 게이가 그랬듯이 거식이나 폭식은 심리적인 이유가 존재한다. 그것이 내 안에서 수치심을 밀어내는 투사적 과정이든(거식)든 음식이라는 중간대상을 통해 위로가 되는 외부 대상을 내면화(폭식)하는 과정이든 그저 수치심이나 모멸감 등과 같은 부적 정서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갈망이든 간에 기본적으로 거식이나 폭식은 자기를 심리적으로 보호하려는 방어 노력으로 보는 것이 환자 치료에 도움이 된다. [섭식장애]에서 쓸 만한 것이 있다면 이런 관점을 소개한 부분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거식증의 원인을 언급할 때 공통적으로 가정되는 것은 거식증이 심리적으로 자기 자신을 버텨 주는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음식을 섭취하게 되면 자신이 임신이 될지도 모른다는 환상이 있어서 갈등이 되든지, 무의식적으로 나쁜 의미가 있는 음식을 섭취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이 있든지, 또는 절망적으로 자신의 자율성을 주장하기 위해 음식을 거부하든지 간에, 거식증 환자는 이런 어려운 상황을 해결하고 자신을 버텨 내기 위해서 위험한 다이어트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78쪽.
[치료 접근]
그 방식이 아무리 자기파괴적으로 보일지라도, 심리적인 어려움을 조절하여 자신을 보호하고 건강하게 살아가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거식이나 폭식을 바라볼 때 치료가 시작될 수 있지 않을까.
심리학 전공자라면 집에 한 권은 있을 역동정신의학의 저자 가바드(Gabbard)의 치료 제언이 내담자의 주관적 경험 세계를 존중하고 환자-치료자 관계의 질을 강조하는 정신역동적 치료의 기본을 잘 보여주는 것 같아서 옮겨 본다.
가바드는 치료자들이 주의해야 할 치료 지침을 다음과 같이 4가지로 제시하였다. 첫째, 증상도 하나의 타협책이고 기능을 지니므로, 증상 변화를 위해 과도한 개입은 피한다는 것이다. 둘째, 치료 초기 해석을 보류하는 것이 좋다. 환자가 해석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셋째, 치료자의 역전이를 주의 깊게 살펴본다. 치료자는 환자의 부모와 비슷한 정서적 경험을 할 수 있고, 이를 환자를 이해하는 데 활용할 수 있다. 넷째, 환자의 몸에 대한 왜곡된 지각과 신념을 탐색한다. 그리고 환자의 잘못된 신념을 비판하거나 환자에게 변화를 강요하지 않고 환자 스스로 자신을 관찰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137-138쪽.
인지행동치료가 다른 치료들에 비해 신경성 폭식증에 효과가 좋은 것으로 검증돼 왔다. 인지행동치료가 치료효과를 내기 위해서도 굳건한 치료 동맹이 필요하며, 이러한 치료 동맹은 환자가 치료자로부터 이해받고 있다고 느낄 때만 형성 가능한 것이다. 인지행동적 치료 초점이 강조된다 하더라도 가바드가 제시한 치료 제언은 여전히 유용할 수밖에 없다.
신경성 폭식증에 대한 페어번의 인지행동치료 모델(1985)은 다음과 같은 3단계로 구분된다.
첫째, 환자가 자신의 섭식에 대한 통제력을 다시 얻고, 규칙적인 식사 패턴을 세우도록 돕는다. 주로 행동적 기법과 교육적 기법을 사용한다. 둘째, 좀 더 넓은 관점에서 다이어트와 폭식을 일으키는 요인에 대해 도전하는 절차를 도입한다. 또 문제가 되는 사고 방식을 인지재구성 절차를 써서 수정한다. 셋째, 나아진 것을 공고히 하고, 변화가 미래에도 유지되리라는 확신을 심어 준다. 이 단계에서 재발 예방 절차가 사용된다. 173쪽.
거식증에 대한 인지행동치료의 효과는 아직 명확하지 않은 것 같다. 다만 거식증을 지닌 청소년에 대해서는 가족치료가 우선적으로 권고된다(Couturier et al. 2013).
성인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아동청소년이 경험하는 심리적 어려움은 가족 역동에 연관되기 쉽다. 부부 사이의 갈등의 골이 깊은 데다 자녀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한다든지, 부모-자녀의 기질이 맞지 않는데 자녀의 기질에 대한 수용이 잘 안 된다든지 하는 문제들. 문제의 형태는 가족마다 다르겠지만 가족 전체의 증상이 아동이나 청소년에게 집중적으로 나타날 때가 많고, 여성 청소년에서 드물지만 거식증과 같은 형태로 증상이 발현할 때가 있어 보인다. 가족 내 어떤 역동으로 인해 여성 청소년의 개별화 및 자아정체감 발달의 어려움이 생기고, 먹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신체적인 성숙을 저해하는 방식으로 심리적 성장에서의 어려움이 표현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영국의 임상심리학자인 타냐 바이런이 쓴 [소녀는 왜 다섯 살 난 동생을 죽였을까?]라는 책에서 몰리의 사례가 그렇다. 궁금하신 분은 읽어보시길.
ref)
- 섭식장애 / 김정욱
- 쉽게 배우는 DSM-5: 임상가를 위한 진단지침 / James Morrison
- Couturier J, Kimber M, Szatmari P: Efficacy of family based treatment for adolescents with eating disorders: a systematic review and meta-analysis. Int J Eat Disord 46(1):3–11,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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