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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서평

당신은 당근을 싫어하는군요 저는 김치를 싫어합니다 / 임정만

by 오송인 2020.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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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사람이 낸 책입니다. 제주에 내려가 작은 프렌치 식당과 와인바를 운영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를 본 게 한 8~9년도 더 된 것 같네요. 상수동에서 제 친구와 저와 저자가 갑작스럽게 내린 여름날의 폭우를 라면 박스 같은 것으로 막아 보려 애쓰며 지하철로 달렸던 기억이 마지막입니다.


그 이후로는 본 적이 없고 연락한 적도 없으니 친구라고 보기는 그렇고 그저 '아는 사람' 정도의 네이밍이 적당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가 하던 대학 내 알바를 제가 인수인계 받았고, 제 친한 친구의 대학원 선배이기도 해서 저와 제 친구와 저자의 만남이 성사될 수 있었던 것이죠.


저자는 네이버 블로그에 제주 생활과 장사에 관한 기록을 올립니다. 이웃추가를 해놓고 틈틈이 뭐하고 사는지 들여다 봅니다. 자영업하는 사람이 다 그렇듯이 꽤나 바쁜 모양인지 몇 달에 한 번 글이 올라오는데, 양보단 질이라고 글 한 편 한 편이 참 읽는 맛이 있습니다. 소신 있고 명쾌함이 느껴지는 글을 보며 글재주가 부럽기도 했습니다.


제주에서 잘 적응하며 지내고 있구나 싶었는데 블로그에 책 냈다고 사달라는 요청(?)의 글이 올라와 있길래 샀습니다. 아는 사람이라서 혼자 반갑고 신기한 마음에 산 것도 있지만, 평소 그가 쓰는 글이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돈 주고 사도 아깝지는 않겠다는 생각으로 샀습니다.


이 책에는 저자의 장사 철학과 고민들을 비롯한 그간의 여정이 압축돼 있습니다. 특히 제주에서 '프렌치' 식당과 '내추럴 와인'바를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한 많은 고민이 녹아 있습니다. 시류를 좇지 않고 생소한 영역에 도전하며 한땀한땀 전문가로서의 역량을 키워나간다는 것은 본인의 인생 철학이 확고하지 않으면 어려운 일 아닐까 싶은데, 저자는 그 어려운 일을 실천하는 사람 같습니다.


철학이라고 해서 뭐 대단한 걸 얘기하지 않습니다.

요리사의 자세, 맛에 대한 철학, 경영의 노하우 같은 거창한 얘기가 아니고, 그저 손을 자주 씻고, 주방에서 항상 락스 냄새가 나게 하라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돌아보면 이것은 식당을 꾸려가는 전체적인 태도와 관련되어 있다. (중략) 청결함은 식당의 출발점이다. 청결함을 유지한다는 건 손님께 깨끗한 음식을 대접하겠다는 말과 같다. 손님을 대하는 자세의 출발점이다. 158쪽.


철학이 확고하지만 그 안에 고민도 많아 보입니다. 제주에서 자영업하며 5년 이상을 버티고 있지만, 임대료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쫓겨날 수도 있는 그런 상황은 식당이 위치한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도 서울과 별반 다르지 않나 봅니다.


우리의 미래,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 우리가 쌓아온 것이 그저 상황에 달려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언제든 톡 밀면 나락으로 떨어져버릴 수 있는 벼랑 끝에 서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78-9쪽.

이런 대목은 일개 소시민으로서 참 공감됩니다.


돈을 지불하면 식당의 영업 방침이나 요리하는 사람의 철학 같은 것은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때문에 힘들어하는 모습도 책에 담겨 있습니다. 심지어 돈을 내지 않으면서 그러는 사람도 있네요.;

어느 날 지나가던 사람이 이스트엔드에 들어온다. B: 저희가 내일 아침 일찍 길을 떠나야 해서 그러는데 빵을 좀 얻을 수 있어요? A: 네? B: 남는 빵이 좀 없을까요? A: 네.


제주에 있지만 서울로 다시 올라갈까 방황하는 순간들이 있나 봅니다. 아마도 이런 불쾌한 일들이 쌓이는 어떤 날일 거라 짐작해 봅니다.


블로그 들어가보니 제주도의 새로운 장소에서 가게를 재오픈하려는 것 같습니다. 맛있는 요리를 맛보는 것이 좋을 뿐만 아니라 요리를 잘하고 싶어서 식당을 냈다고 합니다.기본적인 이론과 기술을 배운 후 시행착오를 거듭한 지금은 실력이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른 상태겠죠.


이론이 아무리 빠삭해도 경험은 늘 이론을 앞선다고 생각하기에 이런 시행착오적 접근이 공감됩니다. 책으로 심리치료를 배웠고 지금은 직접 심리치료 하고 있고 앞으로 저자처럼 자영업의 길로 들어설 가능성이 높은 제게 이 책이 재밌게 읽힌 이유이기도 합니다.


덧. 요즘엔 저런 긴 제목이 트렌드인가 봅니다. 너무 트렌디해서 좀 상투적으로 느껴지네요. 저자가 직접 지은 제목은 아닐 것 같습니다. 물어보고 싶습니다. 책 내용은 참신합니다. 삶으로 자기 목소리 내는 사람의 이야기가 대개 그렇듯 말이죠. 추천합니다.


2019-06-07에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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