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기대가 너무 컸는지 감흥이 반감된 면이 없지 않습니다. 주석 빼고 총 652쪽인데 분량이 상당하여 처음과 같은 리듬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는 것도 개인적인 이 책의 단점입니다.
그럼에도 12개의 장 중에 특히 마음 가는 챕터 위주로 설명해 보자면, 문학적인 텍스트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1장에서 슬픔과 우울을 상징과 비유를 통해 깊이 있게 그려내는 저자의 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울증 환자를 많이 보지만 1장과 2장을 통해 그간 제가 알던 우울과 환자 개개인이 경험하는 우울 사이에 얼마나 큰 간극이 있던 것인지 반성적으로 돌아보게 됩니다. 개인의 내적 경험은 교과서나 검사 지표를 통해 추론할 수 있는 범위를 역시나 넘어가기 때문에 환자를 이해한다고 생각했을 때 환자를 이해하지 못했을 가능성을 다시금 염두에 둘 필요를 남긴 장입니다.
특히 2장에 나타난 중증 우울에 관한 저자의 경험이, 이런 말을 해도 좋을지 모르겠으나, 빛을 발합니다. 우울증은 진흙탕에 머리를 박은 채 1시간이나 엎드려 있게 만들 수 있고, 길을 가다가 대장 조절이 안 돼 변을 지리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은 제 상상 너머의 일이었고요. 저자가 스스로 경험한 두 번의 중증 우울 삽화에 관해 얘기해 줘서 앞서 언급했듯이 우울을 조금 더 깊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2장에서 많은 문장들에 형광펜을 그었으나 저는 그 중에서도 우울이 과거의 상실에 대한 반응이고 불안이 미래의 상실에 대한 반응이라는 점에서 우울과 불안은 이란성쌍둥이란 대목이 좋았습니다. 늘 둘이 함께 간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비유로 표현하니 너무 와닿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이 책의 절정은 7장 자살, 8장 역사, 9장 가난입니다.
7장 자살은 생각할 여지를 많이 남깁니다. 특히 자살에 관한 태도를 생각해 보는 데 솔로몬의 글이 앞으로 좋은 참조점이 될 것 같아요. 어머니의 자살을 저자와 가족이 함께 준비한 에피소드가 실려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경험한다는 게 어떤 것일지 이 글만으로는 상상이 잘 안 되지만 그러한 작가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합리적 자살도 있다는 주장을 수용하게 됩니다. 무엇이 합리적인가에 대한 기준에는 이견이 있을 수밖에 없겠으나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유지하는 한 수단으로서 자살을 생각해 보는 것이 자살을 무조건 터부시하는 것보다는 현실적이지 않나 싶어요. 만약 제가 실제 그런 상황에 연관된다면 자살하고자 하는 사람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상담자로서나 한 개인으로서나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터부시되는 주제를 용기있게 잘 풀어냈어요.
8장은 말 그대로 우울의 역사를 방대한 자료를 통해 풀어냅니다. 다른 어디서 본 것보다 더 상세히 기술돼 있어서 우울의 역사도 돌고 도는 것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현대인이 우울을 개념화하는 프레임도 결국 역사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에 과거의 아이디어가 낯설지 않습니다. 가령 우울증을 도덕의 문제로 평가하는 중세시대의 인식이나 우울증을 인간을 고결하게 하고 영감을 얻게 하는 증상으로 미화하는 르네상스의 인식, 더 거슬러 올라가서는 신체적인 문제로만 보는 히포크라테스의 인식, 신체의 문제일 뿐 아니라 정신의 문제로도 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 모두가 우울증에 대한 현대인의 사고에 영향을 미쳤음을 알게 됩니다. 20세기 와서 프로이트와 아브라함이 우울증에 대한 정신분석적 설명을 내놓는데 저자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이를 적용하는 부분이 짧지만 와닿네요.
9장은 가난과 우울의 상관을 다룹니다. 심리치료가 가장 필요한 계층이 사실 돈 때문에 치료에서 배제되는 것이 현실이고, 그나마 정신건강복지센터나 청소년상담복지센터 등에서 그런 계층에 대한 개입을 하고 있지만 재정적으로 열악하다 보니 사람이 정신적/육체적으로 갈려나가는 시스템으로 변질되기 쉬운 것 같습니다. 미국은 연구나 프로그램 등을 통해서 그런 계층의 정신적 어려움을 발굴하고 치료하기도 하나? 싶은 부분들이 이번 장에 실려 있고, 여기 소개된 실제 환자들 인터뷰 보면 이렇게까지 드라마틱하게 변화할 수 있다는 게 좀 믿겨지지 않기도 합니다. 저자가 이런 '불신'이 들 수 있다고 미리 설명하지만요. 너무 열악한 환경에서 반복적인 외상을 경험하게 되는 경우 일단 치료 변화가 시작되기만 하면 영화보다 더 극적인 변화가 나타나기도 하나 봅니다.
저자에 따르면 우울과 가난 둘 중 어느 것이라도 개입 포인트가 될 수 있고, 조금 더 접근이 용이하단 점에서 우울 치료가 좋은 시작점이 될 수 있어 보입니다. 다만 이번 장의 어떤 사례에도 나와 있듯이 의지가 있어도 여러 이유로 의료체계 접근이 어려운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이 있고, 이런 사람들에게 찾아가는 의료/심리 서비스가 필요할 테지만, 아직 거기까지 가기에는 좀 멀어 보이기도 하네요. 아이를 대여섯 키우는 한부모 가족의 엄마가 많은 노력을 쏟아 부어 병원 갈 시간을 확보하지만 교통수단과 날씨 때문에 결국 가지 못하는 장면에서 큰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10장에서는 탈원화 문제에 관한 논의가 심도 있게 이루어집니다. 탈원화의 문제점에 관해서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되고, 정신건강서비스에 예산을 따내기 위해서는 도덕적/인권적 호소만으로는 실효성을 갖기 어렵다는 대목도 평소 생각해 보지 않았던 부분이라 더 눈에 들어옵니다. 사람들은 장기적으로 생각하기보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에 결정한 판단을 내리기 쉽고 이런 부분을 간과한 주장은 영향력을 미치기 어려울 수도 있겠어요. 그리고 우울장애와 그 치료법에 대한 정의 역시 정치를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고, 현재 범주적 진단 체계와 약물치료 방식이 우세하지만 연속적/다면적 차원에서 개인의 특이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이 책이 일조한다는 생각도 듭니다. 4장 <또 다른 접근>에서 다양한 치료 양식을 다루고 있기도 합니다.
책장을 덮으면서 제가 우울증을 지닌 환자라면 이 책 읽고 '그래도 살아보자'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 우울이 녹아든 개인 삶의 면면들과 절망/회복이 역사, 정치, 문화, 성, 인종 등 다양한 측면에서 폭넓게 논의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읽더라도 자신의 경험을 보편화하고 생의 의지를 다잡을 수 있게 만드는 포인트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살아있아도 산 게 아닌 걸 경험한 사람이나 죽음 직전까지 가본 사람이 삶의 의미에 대해 논하면서 '겨우 숨만 쉴 수 있다 하더라도 삶을 지속하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라'고 말할 때는 울림이 다른 것 같아요.
한낮의 우울은 작년 9월부터 12월까지 심리학 및 심리치료 고전 강독 오픈챗 모임을 통해 읽은 여섯 번째 책입니다. 혹시 궁금하신 분을 위해 이 모임에서 읽은 책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이번 달부터는 아들러가 직접 쓴 책을 연달아 두 권 읽습니다. 현재 저 포함해서 7명이 함께 읽고 있습니다. 당분간은 추가 모집이 없을 예정이지만, 추가 모집이 있게 되면 블로그에 공지합니다.
분열된 자기
해리 스택 설리반의 정신치료 기술
애착: 인간 애착행동에 대한 과학적 탐구
자살하려는 마음
자아와 방어기제
한낮의 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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