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프롬이 여러 시기에 걸쳐 발표한 저술을 한데 엮은 책입니다. 그래서 내용의 일관성이 좀 부족하지만 한 가지 일관된 것이 있다면 현대인의 무기력에 대한 에리히 프롬의 임상적 해석입니다.
저자는 사회적 기대나 요구에 과도하게 스스로를 맞추다 보니 진짜 자기를 경험할 틈이 없게 돼 버렸고 가짜 자기를 진짜 자기처럼 믿고 살아감으로써 무기력을 핵심으로 하는 많은 정신적 부작용이 초래된다고 봅니다. 이런 내용은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이죠? 여기 실린 글들이 대략 45~80년 전에 쓰인 것들이니 에리히 프롬이 원조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증상 신경증이든 성격 신경증이든 신경증이 발생하는 기제에 관해서 에리히 프롬과 동시대를 살았던 카렌 호나이나 해리 스택 설리반도 비슷한 얘기를 한바 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자연스러운 내적 경험, 즉 진짜 자기를 억압하거나 부인할 수밖에 없게 되고, 이러한 대처 양식이 공고해지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증상이 나타난다는 것이죠. 아시다시피 훗날 칼 로저스도 같은 얘기를 하고요.
자기가 억압된 자리를 꿰차고 들어오는 것이 가짜 자기(false self)입니다. 에리히 프롬이 살았던 1900년대 초반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이 가짜 자기는 ‘현대인’의 삶을 여러모로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특히 자신의 시장가치를 입증하지 못할수록 생존을 위협받게 되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팔릴 수 있을 만한 상품으로 자신을 포장해야 하는 점이 그렇습니다.
“현대인은 자기 자신과 어떤 관게에 있을까? 나는 이 관계는 마케팅 지향이라 불렀다. 이런 방식으로라면 인간은 자신을 시장에 성공적으로 배치된 사물로 느낀다. 스스로를 행위의 장본인, 인간의 힘을 가진 자로 느끼지 못한다. 그의 목표는 시장에서 이윤을 남기고 자신을 판매하는 것이다. 그의 자존감은 사랑하고 생각하는 개별 인간으로서의 자기 활동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역할에서 나온다.”
인간은 그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에게 이로운 노동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의미있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터넷을 통한 연결성이 강해지는 만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직접적인 만남은 점점 희소해지고(설상가상 팬데믹까지..) 인간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상대를 인격을 가진 존재로 대하기보다 마치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계처럼 대하기 쉬운 분위기가 강해지는 것은 아닌지 우려되는 부분이 있고, 저자도 이 비슷한 말을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구체적인 사람에게서 추상을 본다. 그가 자신과 우리에게서 추상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 이상을 보고 싶은 마음은 없다.”
연결성이 강해질수록 역설적이게도 단절이 심해질 수 있는 분위기 같습니다. 편의점에서 물건 계산할 때 점원의 눈을 본 적이 있는지, 택배나 음식을 배달해 주는 분에게 고맙다고 말한 적이 있는지 돌아보면 잘 기억이 안 납니다. 단순히 비대면 상황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고요.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사물화하기 쉬운 분위기에서는 개성이란 것을 갖기 어렵습니다. 개성이란 것도 결국 인간관계 안에서 형성이 되는 것인데 그 관계 자체가 단절되면 다른 사람과 나를 구분지음으로써 가능해지는 나의 개성이나 정체성 자체가 성립이 어렵지 않을까요. 많은 사람이 퍼스널 브랜딩을 강조하는 것 역시 내 정체성을 입증할 무언가를 절박하게 찾아 헤맬 수밖에 없는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 같아 마냥 좋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퍼스널 브랜딩을 통해 자신을 더 잘 ‘팔고자’ 하는 목적을 둔다면 “타인의 기대에 부응할 때에만 자신을 확신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퍼스널 브랜딩이 지향하는 바, 즉 내가 누구이고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깨닫는 것과는 정확히 반대로 간다고 볼 수 있겠죠.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자기를 팔기 위한 퍼스널 브랜딩은 “최면에 걸린 사람의 행동보다 비자발적”인 행위입니다.
종합해 보면, 진짜 자기를 잃어버린 데 따른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사회적 기대나 요구에 무비판적으로 스스로를 끼워 맞추는 데서 무기력이 발생한다고 봅니다. 상품으로서의 자기를 강조하는 것이 그 절정이고요. 이를 해소하기 위한 처방을 마지막 장에 제시합니다. 감탄하고, 집중하고, 상황이나 타인이 기대하는 감정이 아닌 나 자신의 감정을 경험하고, “회피하지 않고 양극성에서 나오는 긴장과 갈등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안전을 포기할 용기, 타인과 달라지겠다는 용기, 고립을 참고 견디겠다는 용기”를 지니라고 말합니다.
에리히 프롬의 임상적 해석은, 사회 현상을 다루는 것이니 어쩔 수 없이 매우 추상적입니다. 그만큼 처방도 추상적입니다. 저자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감은 잡을 수 있지만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건가?’의 심정이 강하게 듭니다. 산만하게 부유하는 생각에 휘둘리지 말고 집중하는 것, 스스로의 감정을 경험하는 것, 갈등을 부인하거나 회피하지 않는 것 다 좋은 말입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별로 와닿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어디까지가 사회의 기대에 부합하고자 하는 나의 거짓 자기이고 어디까지가 내 진짜 자기인지 분별하는 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사회적으로 잘 적응한 내 모습이 거짓 자기이고 때로는 신경증적 증상을 유발한다 하더라도 저는 그것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그렇게까지 된 데는 저마다의 합리적인 이유가 있을 테죠. 그래서 저는 거짓 자기를 참 자기로 대체하라는 식의 추상적인 주문보다는 지금 내 거짓 자기 혹은 마음갑옷이 어느 정도로 역기능적이고 그것을 해소하기 위한 구체적인 문제해결 전략에는 무엇이 있는 확인하여 그 때 그 때 반복적으로 수정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미봉책이라면 미봉책이겠지만, 거짓 자기를 내려놓는다는 것은 외상 후 성장을 경험하는 수준의 대변동에 맞닥뜨리지 않는 이상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가능하지 않은 일로 보이고, 이 책이 쓰인 지 최소 70년 정도 지난 지금은 사회가 너무 복잡해져서 더 이상 진짜 자기 거짓 자기라는 도식을 유지하는 것이 어렵게 됐다고 봐요.
심리치료에서건 일상에서건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거짓인가 하는 질문은 의미가 없고, 한 사람의 정체성, 즉 자기서사가 어떤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지가 더 중요한 것 아닐까요. 자기서사에서 참/거짓 구분은 무의미한 것 같다는 생각이 이 책을 읽으며 조금 불편한 마음이 들었던 이유 같아요. 11월에 읽기 시작했는데 너무 안 읽혀서 이제서야 다 읽은 이유이기도 하고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