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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공부/원서 읽기

[17주차] Neurosis and Human Growth: 10. MORBID DEPENDENCY(pp. 239-258)

by 오송인 2021. 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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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https://bit.ly/3pYExHR

 

병적 의존성을 지닌 사람과 그 파트너의 관계에 관한 예로서 베티 데이비스가 주연한 인간의 굴레를 들고 있습니다. 베티 데이비스는 1930-40년대를 풍미했던 여배우인 것으로 알고 있어요. 이 영화에서 사랑을 얻기 위해 의존성을 보이는 쪽은 남자입니다.

 


 

Self-effacing의 한 유형으로서 병적 의존성(morbid dependency)을 다루는 장입니다. 독해 실력을 떠나서 이 책은 어느 챕터도 쉬운 챕터가 없는데, 그만큼 인간의 정신 현상을 포괄적이고 역동적인 방식으로 설명하려 애쓰기 때문입니다.

병적 의존성의 역동은 어떤 역동일까요? 제가 이해하기에 인간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적절한 수준의 독립성과 자율적 선택의 의지를 포기하는 것을 특징으로 합니다. 

앞선 글에서 Self-effacing에서 effacing을 어떻게 번역하면 좋을지 고민한 결과 굴종(즉, “자신의 뜻을 굽혀 남에게 복종함”)이 원어의 의미에 가장 충실하지 않나 생각해 봤습니다. 이 챕터에서는 surrender라는 표현이 병적 의존성을 설명하기 위해 많이 동원됩니다. surrender 역시 항복이나 포기라는 수동적 의미보다는 더 적극적으로 자신을 낮춘다는 점에서 굴종/굴복이라는 의미에 가까운 것 같아요. 즉, self-effacing의 한 유형으로서 병적 의존성의 핵심은 독립/자율이 거세된 심한 굴종적 태도에 있습니다.

병적 의존성을 지닌 사람은 자신과 정반대의 특성을 지닌 누군가, 특히 자기애적이거나 더 나아가 가학적/반사회적인 성격을 지닌 누군가에게 끌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성격을 지닌 파트너라야 뿌리 깊은 자기혐오(self-hate)를 부인할 수 있습니다. 네. 병적 의존성을 지닌 사람은 스스로의 존재 자체를 진심으로 증오하는데 이를 자각하는 것은 너무도 괴로운 일이기 때문에 차라리 누군가 나를 대신 혐오해 주기를 바라는 무의식적인 동기가 작동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이런 무의식적 동기는 파트너가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려는 온갖 노력으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이런 노력이 강해질수록 파트너는 더욱 병적 의존성을 지닌 사람을 사랑하지 않게 되죠. 호나이는 이를 cat-and-mouse play라고 표현했습니다. 병적 의존성을 지닌 사람이 선택하는 파트너 역시 정도의 차이일 뿐 그 나름의 신경증적 성격을 지니고, 앞서 언급했듯이 특히 강한 자기애나 가학적 성격 특성을 갖기 때문에 병적 의존성을 지닌 사람이 열렬히 사랑을 표현하면 파트너는 이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식적이라 비꼬고 경멸하는 식으로 사랑을 무시하고 짓밟는 태도를 보일 수 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는 분노가 치미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하지만 병적 의존성을 지닌 사람의 딜레마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이 분노를 스스로에게 허락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분노를 표현하는 것은 이상화된 자기 이미지와 맞지 않고, 성스러운(saintly) 태도로 유지하는 무의식적인 도덕적 우월감과도 배치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봐도 굴종적인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다시금 파트너에게 몰두하면서 더욱 더 파트너가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고 자신을 사랑할 것이라는 헛된 희망을 품습니다. 굴종은 스스로에게 사랑으로 해석되며, 피학적인 모습이 두드러집니다.

호나이도 강조하고 있지만 병적 의존성을 지닌 사람은 피학적인 상황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상황이 자신의 양립할 수 없는 인격적 특성을 통합할 수 있게 하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이 부분은 어렴풋하게만 이해되고 명확히 다가오진 않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병적 의존성을 보이는 사람의 어떠한 피학적 행동도 피학 그 자체가 쾌락을 주기 때문에 지속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학대적, 가학/피학적 관계가 지속되는 경우 결국 병적 의존성을 지닌 사람도 그 사실을 끝까지 부인하긴 어렵습니다. 그간 부인해 오던 이 사실이 자각의 영역에 들어올수록 자기혐오도 강해집니다. 자기혐오가 강해지면 그 혐오의 주체를 예전처럼 파트너에게 전가할지, 즉 더 깊은 수렁과 자기파괴적 관계로 들어갈지 아니면 그 관계로부터 빠져 나올지 결단을 내려야 하는 진정한 자율적 선택의 순간이 옵니다. 호나이는 이를 sink or swim이라고 표현합니다. 죽거나 살거나 정도의 뜻이겠네요. 

그 관계로부터 헤엄쳐 나오는 것은 병적 의존성을 지닌 사람의 자부심에 상당한 상처가 됩니다. 내가 헌신하는 만큼 상대도 나를 좋아할 것이라는 통제감이 깨지고, 관계의 병리적 측면을 자각하는 데 따라서 자기혐오도 더 강해질 수 있습니다. 이 때 또 다시 자신을 구원해줄 누군가를 찾아 나선다면 변화는 어렵지만, 문제의 원인이 파트너가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 있었다는 것을 정직하게 들여다 볼 수 있다면 그 때 비로소 신경증적 갈등을 해결하는 실마리를 잡을 수 있습니다. 

호나이는 신경증을 지녔든 지니지 않았든 간에 어떤 중요한 성취에 대한 기대가 없이는 열정도 없다고 말합니다. 병적 의존성에도 상당한 열정이 있다는 것이죠. 다만 나를 구원해줄 누군가와의 합일이 아니라 스스로의 독립성과 자율을 유지하면서 타인과 관계 맺을 수 있다는 기대 쪽으로 열정이 작용할 수 있다면 긍정적인 예후를 기대해 볼 수 있겠고, 이것은 혼자의 힘으로는 어려우니 분석가(상담자)와의 치료적 관계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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