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평균 수명이 4000주 정도 된다고 합니다. 80세 정도까지 산다고 가정했을 때 말이죠. 정말 말도 안 되게 그 중 반을 살았습니다. 반씩이나 살았다고 생각하니 요즘에는 상념에 빠져들 때가 많습니다. 지금 인생이 잘 흘러가고 있는지, 미래는 어떠할지 등에 관해서 더 자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아마 10대이든 20대이든 30대이든 50대이든 나이에 관계 없이 이런 생각을 하게 마련일 테지만, 청년 시기를 떠나 보내고 중년으로 진입하게 되는 '불혹'의 나이라는 상징성이 상념에 무게감을 더하는 것 같기도 하네요.
프리랜서로 일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직업적 불안정성을 더 직접적으로 체감합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일할 수 있을까, 체력이 늘 지금처럼 버텨주지는 못할 텐데 라며 약간 비관적인 느낌에 사로잡히는 때도 종종 있습니다. 80세에 죽는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최소한 30년은 더 일해야 할 텐데, 이제라도 뭔가 다른 일을 찾아 봐야 하는 걸까, 배운 게 도둑질인데 지금 하는 일 말고 다른 일이 뭐가 있을까 등등 별 생각을 다합니다. 시간도 기회도 체력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 썩 달갑지 않습니다.
위안이 되는 부분이 있다면, 선택지가 좁아지는 만큼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에 더 초점을 맞추기 쉽다는 것입니다. 일 년 동안 이런저런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라 할 만한 게 있다면, 여지껏 내 삶을 내가 통제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 때로는 그냥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태도가 제 안에 더 뿌리 깊게 자리잡은 느낌입니다.
아마 많은 인생 선배들이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 같기 때문에 이런 글을 쓰는 게 좀 잉여스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남들이 다 해봤다고 해서 개인적 경험의 의미가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있어서 굳이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일기장에 가야 할 것 같은 글이지만, 브런치에 매주 한 편의 글을 올려야 하는데 지난 주에 못 올린 것도 있고요.
프리랜서로 일하기 시작한 게 딱 1년 전입니다. 지난 일 년 내내 거짓말 약간 보태 주말 밤낮 없이 일에 치여 살다가 며칠 전에 여섯 살인 딸 생일 기념으로 조촐하게 1박 2일 서울 투어를 했습니다.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 멀리 가기는 어렵고 남대문에 호텔을 잡고 애니메이션 센터도 가고 남산 케이블카도 탔습니다. 덕수궁 돌담길도 가고 화창한 초여름 하늘 아래 시청 앞에서 가족 사진도 찍었습니다. 싱글일 때 종종 걷던 서울 거리를 가족과 함께 걸으니 기분이 묘했습니다.
그 와중에 갑툭튀 자의식이 고개를 들어 문득 이런 좋은 날이 남은 인생에 몇 번이나 더 찾아올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영어공부도 좋고 커리어에서의 경험이 쌓이는 것도 좋지만 언제나 미래를 위해 현재가 희생되는 느낌입니다. 늘 초점이 미래에 가 있던 습관이 이렇게 자의식과 함께 불쑥 찾아와 즐거운 경험을 온전히 즐기는 것 또한 방해했구나 생각하니 씁쓸한 느낌도 듭니다.
성취하고자 하는 무언가를 향해 통제감을 갖고 분투하는 것은 그만큼 삶에 대한 애착을 지녔다는 말의 다름이 아닙니다. 하지만 너무 지나친 애착에는 형벌이 수반되는 것 같습니다. 현재를 살지 못하는 형벌이죠. 불혹이라는 상징적 나이는 어떻게 보면 이 형벌에서 탈출할 수 있게 돕는 기회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자의반 타의반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면서 취약한 그대로의 모습도 괜찮다고 인정할 수 있게 돕는 나이가 불혹 같습니다. 이 도움을 거부하고 고집스럽게 삶에 대한 지나친 애착을 유지하고자 할 때 외도나, 번아웃, 우울, 중독 같은 다양한 방식으로 증상이 발생하는 것이겠고요.
얼마나 나이를 더 먹으면 취약성과 안전하지 않은 상태가 인간의 디폴트임을 온마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미래를 예측하여 통제하려는 욕구를 내려놓고, 지금 이 순간 가족과 함께 하는 경험에 온전히 몰두할 수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살아 생전에 그런 날이 올까요? 그 날이 오면 비로소 철들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죽어서야 가능할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면 기운 빠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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