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개월이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기간인데,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삶 전반을 수정해야 한다는 확신을 갖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돈만 밝히는 비윤리적인 의사도 만나고 통증으로 개고생도 하는 과정에서 저는 통증을 제 삶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통증을 부정할 수는 없고 통증을 유발하는 병이 완치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제 삶으로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환자로서 살며 균열되는 시간들을 봉합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저라는 사람이 살아온 시간을 돌아봐야 했습니다. 4개월이 제게는 끝이 보이지 않는 긴 시간이었습니다. 당시에 제가 썼거나 책을 읽고 발췌했던 대목들을 좀 가져옵니다. 출처 표시가 없는 부분은 제 글입니다.
"죽음 앞에선 돈이 많든 적든, 결혼을 했든 안 했든, 직장이 있든 없든 이런 것들 모두가 그리 중요치 않은 것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신을 찾게 된다. 예전에 알코올중독자를 위한 12단계 집단치료 세션을 할 때 리더였던 주치의가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추락하는 비행기 안에서 신을 찾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중략) 대학원 때부터 최근까지 5년 넘는 시간 동안 모든 일이 순탄하게 흘러갔고 순탄한 만큼 철저하게 무신론자적인 생활을 살아 온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다시 하나님을 찾고 있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설령 내일 죽는다 하더라도 후회가 없다고 느낄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중략) 고통을 통해 본의 아니게 자신과 조금 더 가까워지게 된 것 같다."
"그냥 오는 대로 받아들여. 버티고 서서 오는 대로 받아들여라. 다른 방법이 없어. 그것은 진실이었고 또 그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에브리맨, 필립 로스, 83쪽.
"이제 통증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필립 로스의 같은 책, 97쪽.
“통증이 너무 심하면 왜 나한테만 이런 재수없는 일이 벌어지는가 탓할 여력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통증을 피하는 것이 일상의 과제가 되고, 통증만 없앨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기꺼이 팔 기세가 된다. 이 방법 저 방법 소용이 없을 땐 에브리맨의 화자가 말하는 것처럼 버티고 서서 오는 대로 받아들이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아니, 통증을 받아들인다기보다 통증을 일으키는 부위가 내는 날카로운 소리에 불가항력적으로 모든 감각이 집중된다고 말함이 옳음이라. 모든 이유가 제거된 날카롭고 불가해하고 공포 그 자체인 소리, 즉 죽음이 느껴질 때 역설적이게도 삶이 가장 뚜렷하게 다가온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아니 죽음은 철저하게 개인적인 사건인 바 '나는 언젠가 죽는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하겠다. 중3 때 위의 1/3을 잘라내는 수술을 하고 한 달이나 신촌 세브란스에 입원해 있으면서 이 자명한 사실을 체감했고, 요즘 다시 한 번 체감하고 있다. 통증이 많이 잦아들어서 일상생활이 가능해졌지만 허리가 잘려나가는 것만 같았던 며칠 간의 통증, 버티는 것이라면 누구보다도 자신 있는 나를 얼마간 무력하게 만든 그 통증은 삶을 다시 보게 하기에 충분했다. 예기치 않게 하나의 목숨을 얻었지만, 목숨이 다하는 것도 예기치 않은 사건이다. 그 예기치 않은 미래의 사건을 통해 삶을 다시 바라보는 것이 인생에 유익할 것이라는 하이데거 선생의 통찰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든 추간판탈출증에 진심어린 감사라도 표시해야 할 판이다.”
“59세에 가수 닐 영은 말했다.'20대 때에는 나와 내 세계가 가장 중요했고, 세상만사가 내 일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이제야 내가 강물에 떠가는 한 점 이파리라는 것을 알겠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208쪽.
“만물이 소생하는 봄에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죽음을 떠올리면 일상이 소중해진다. 얼굴에 닿는 봄볕, 대중교통 안에서 책을 읽는 순간, 일하기 전에 마시는 달달한 믹스커피, 합주 녹음본을 반복해서 들어보는 것, 운동이 끝나고 뜨거운 물에 몸을 푸는 것 등등 많은 순간이 감사함으로 다가온다.”
저자인 아서 프랭크는 암이라는 시한폭탄을 안은 채 살아갑니다. 저는 디스크라는 시한폭탄을 안고 살아갑니다. 시한폭탄이라는 표현을 저자도 쓰는 것을 보면서 공감이 많이 됐습니다. 저 또한 예전부터 내 몸에 디스크라는 시한폭탄이 있다고 다른 사람에게 말해 왔기 때문입니다. 언제 어떻게 이 시한폭탄이 터질지 알 수 없습니다. 세수하려고 세면대에 몸을 굽히다가 폭탄이 터질 수도 있고, 양치하다가 헛구역질하는 과정에서 터질 수도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 허리가 뻐근하면 디스크가 또 도지려나 긴장하게 됩니다. 요 며칠 허리가 뻐근해서 글을 쓰는 지금도 사실 긴정하고 있습니다. 허리가 뻐근하면 하루 종일 기분이 좋지 않죠. 허리 디스크로 인한 통증이 언제라도 터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것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늘 마음의 준비를 하며 하루하루 충실하게 그리고 가급적이면 재미있게 살고자 합니다. 위궤양처럼 완치되는 병은 아니었기에, 허리 디스크로 인해 삶을 대하는 태도가 많은 부분 달라졌습니다.
허리디스크는 대학원 입학 이후 자격 취득과 성공에만 매달렸던 제 삶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습니다. 임상심리전문가와 정신보건임상심리사 1급 자격을 취득한 직후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 어쩌면 축복이었을 수도 있겠다 싶어집니다. 아니었다면 계속 그런 식의 삶의 태도를 유지했을 것이고 취약하고 불완전하고 결핍이 있고 우연성이 존재하는 스스로의 삶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럭저럭 잘 굴러간다고 여겼던 자기 자신과 삶이 예기치 못한 일로 얼마나 쉽사리 붕괴될 수 있는지를 경험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취약성이나 결점 등에 대해 인정하게끔 만들고 더 잘 수용할 수 있게 하는 것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물론 저는 아직도 성취지향적으로 사는 면이 있고 제 자신의 취약성이나 다른 사람의 취약성을 직면하여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다만 성취를 향해 달려나갈 때라도 항상 그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면 가장 중요한 가치로 제 아내와 아이와 가족이 남죠. 내 욕심 채우자고 다른 사람 마음에 스크래치를 낸 것은 아닌지 나만큼이나 상대방이 얼마나 감정적으로 힘들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또한 내일 당장 죽는다고 할 때 이제까지 가족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고 가족과 함께 재미있게 살았으니 후회가 덜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있는지 종종 점검해 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삶의 본질에 더 다가가는 길이며 자기나 타인을 행복하게 만드는 길임을 깨닫고, 스스로의 취약성과 폭력성을 인정하는 인간이 되고자 나름의 방식으로 애쓰고 있습니다. 애쓰는 것과 실제로 그렇게 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긴 하지만요. 최소한 지향은 그런 방향을 향하고 있고, 허리 디스크로 인해 몸뿐만 아니라 삶 전체가 망가졌다고 느꼈던 4개월의 시간은 이런 방향 전환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방금 전 삶 전체가 망가졌다고 표현했는데, 성취와 인정에만 지나치게 몰두하는 허황된 삶이 망가진 것이라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습니다. 허황된 삶이 무너지니 세상이 그 자체로 이미 아름답다는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유독 봄볕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꽃 사진을 많이 찍었네요. 평소에 별 관심을 두지 않던 사소한 것들이 뜻 깊고 아름다운 무엇으로 다가왔습니다.
"두려울 수밖에 없겠지만 두려움에 차서 인생을 보낸다면 바보 같은 일일 거라고, 미래의 너는 고통받고 많은 것을 잃게 되겠지만 고통과 상실은 삶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아픈 몸을 살다, p. 17
"심각하게 아픈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경험하는 모든 것을 인정해주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이들은 자신을 위해서 이야기해야 할 뿐만 아니라 아직 아프지 않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이야기해야 한다. 질병은 어떻게 더 또렷한 정신을 가지고 어떻게 더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는지 우리 모두에게 가르쳐줄 수 있기 때문이다. 질병은 삶을 위협하지만 살아갈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보여주기도 한다. (중략) 이 책의 과제는 (중략) 질병을 축하할 수 있는 말들을 찾는 것이다." 같은 책, p. 32
질환은 정말 어느날 갑자기 찾아옵니다. 특히 모든 게 잘 굴러가고 있고 모든 게 최상의 상태라고 느낄 때 찾아오는 경향도 있어 보이죠. 이 질환을 환대할 수는 없습니다. 일상의 아름다움을 경험하게 됐던 디스크 통증의 날들에도 아름다움은 '이런 통증이 일 년 내내 지속된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의 고통을 대전제로 깔고 있었습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찬미는 고통의 의미를 찾는 과정에서 사후적으로 발견해낸 것입니다. 고통에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일상을 더 아름답게 느낄 수 있게 된 것은 축복이 아닐까. 뭐 이런 식으로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고 부조화를 조화롭게 만들고자 시도하게 된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런 시도는 언젠가 내가 다시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는 경우가 많다고 봅니다. 저도 그랬구요. 이렇게 끔찍한 고통을 겪다가 홀로 죽는다면 일상의 이 아름다움들이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다! 허리디스크 당시의 끔찍한 고통이 1년 내내 지속됐다면 고통의 의미는커녕 죽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울증 약을 먹어야 했을지도 모르고요.
고통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말은 어쩌면 오랜 기간 고통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의 말일지 모릅니다. 이런 식의 진부한 이야기는 많이 있습니다. 저자는 '고통이 계속된다면 그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질문에 대해 자신만의 경험을 들려줌으로써 진부한 이야기 틀을 벗어납니다. 저자는 죽음을 늘 내포하고 있는 삶과 지금 여기서 경험하는 심각한 통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겪는 질병 경험을 이야기하고(저자가 이 책을 쓴 중요한 동기이기도 합니다), 중병을 앓고 있는 다른 사람과 만나 질병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내 가족이나 중병을 지닌 다른 사람에게 질병 경험을 이야기하고 아픔을 나누는 것과 홀로 중병을 경험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는데, 고통의 의미를 굳이 발명해 내려 하지 않게 된다는 것 아닐까 합니다.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내 경험을 공유하고 중병을 경험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고통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것이 고통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된다고 저자는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상호작용은, 마치 질환을 제거하듯 질병 경험을 내 삶에서 치워버리려 하지 않게 할 것입니다. 실제로 아서 프랭크에게는 지지적이고 온정적인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 아내 캐시와 지인들이 있었습니다. 친구와 장모가 자신이 암을 경험했던 것과 비슷한 시기에 암을 경험하다가 죽는 것을 보기도 하죠. 책에 자세히 나와 있진 않지만 장모와 많은 얘기를 나누지 않았을까 추측해 보게 됩니다. 질병을 함께 겪어나가는 이런 주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죽는다는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고, 삶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는 말을 죽음이라는 실존적인 수준에서 받아들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설령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얘기를 듣는다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내 삶은 그 자체로서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죠. 회복이 질환의 당연한 수순이 아니듯이 건강이 삶의 default가 아니라는 것을, 저자는 자신은 운이 좋아서 살아남은 것일 수 있고 언제든 다시 암이 재발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우리의 의지로 태어난 것이 아니듯이 질환도 죽음도 우리의 의지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에서 저자의 마음에 진정한 조화가 깃드는 듯합니다. 암으로 인해 경험하는 통증이 싸워야 하는 혹은 제거해야 하는 혹은 삶을 조각내는 무엇이 아니라 삶에서 필연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삶의 일부임을 가까이 알고 지내던 사람들의 잇단 죽음을 통해 그야말로 온몸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인식의 전환을 통해 자기 삶의 서사 안에 모순되는 것들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질병으로 인한 괴로움이 너무 심각해서 다른 사람과 얘기할 수도 없는 수준이라면 그 땐 어찌 해야 할까요. 저자는 심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질병과 홀로 남게 되는 순간에 뭘 더 할 수 있는지에 관해 묻습니다.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낸 적은 없다고 합니다. 다만 답이 자신을 찾아 왔다고 말합니다. 저자는 성경에서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했던 이야기를 인용하며, 이 이야기를 자신이 경험하는 질병에 관한 신화로 삼습니다.
“아프다는 것은 길고 긴 밤 내내 다친 채로 씨름하는 것이며, 해가 뜰 때까지 지지 않는다면 축복을 받는 것이다. 야곱의 이야기를 거쳐서 질병은 모험이 됐다.” p. 130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영화에서 나치 수용소에 감금된 귀도가 어린 아들 조슈아에게 ‘이건 게임이야’라고 말하는 장면이 야곱의 이야기에 오버랩됩니다. 수용소에서 벌어지는 고통스러운 일들을 ‘게임’으로 치환함으로써 아들이 수용소 생활에 적응할 수 있게 돕는다는 내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귀도가 제시한 게임이라는 메타포를 통해 아들은 그 상황의 부조리함을 ‘받아들일 수 있고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변형시킬 수 있게 되었고, 이는 저자가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 질병과 함께 홀로 남게 된 상황에서조차 삶을 그 자체로 수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은 것과 정확히 동일한 과정인 것 같습니다.
유신론자와 무신론자 모두 고통에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하게 마련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든 질환으로 인해 균열된 삶에 일관성을 부여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일 수 있죠. 저자가 새로운 점은, 앞서도 말했듯이 ‘고통에도 의미가 있다, 삶에서 보다 중요한 무엇무엇을 얻게(혹은 깨닫게) 하기 위한 도구라는 점에서 그렇다’와 같은 진부한 틀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이야기는 축복으로 끝나지만 저자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 상태에서 이 이야기를 인용한다고 여겼습니다. 질환으로 인해 죽을 수 있으나 그렇다 한들 인생의 끝에는 누구나 죽음이 있게 마련이고, 죽음이 삶의 근본 조건이라면 그 상황을 받아들여 하루하루를 더 충실히 살 수 있게 도울 어떤 서사가 필요한데, 그 서사로서 야곱의 이야기가 저자에게 찾아온 것이죠.
‘지지 않는다면 축복을 받는다’에서 포인트는 ‘지지 않는다면’ 같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질환과의 싸움에서 지면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치료를 잘 받되 질환을 싸워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지는 말고 몸의 지혜를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마라톤을 좋아하는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몸은 어떻게 달릴지 이미 알고 있다. 연습해야 하는 것은 몸이 이미 알고 있는 대로 달리도록 놔두는 일이다.” p.137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되 거시적으로 보면 삶은 우리 통제 바깥에 있으니 흘러가는 대로 놔두라 말로도 들리네요. 그렇게 하면 축복을 받는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 축복이 최소한 ‘살아남는 것’과 다른 말이라면, 축복을 받느냐 안 받느냐는 전혀 중요치 않다는 점에서, 고통을 어떤 고귀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들과는 차이가 있죠. 그냥 그렇게 자신만의 신화를 갖게 되는 것이 삶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질환과 함께 살아감에 있어 실질적 도움이 된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암이나 종양과 싸울 수 없다. 할 수 있는 일은 몸의 의지를 믿고 의학에서 최대한 많은 도움을 받는 것이 전부다. 우리는 수년 동안의 의식적인 행동을 통해 몸의 의지를 형성하지만 결국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나는 우리가 건강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차 있다고 여전히 믿지만, 분명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병이 났다고 죄책감을 느낄 만큼, 아니면 건강하다고 자랑스러워할 만큼 나는 전능하지 않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벌어지는 일을 받아들이고 어떻게 살아갈지 계속 모색하는 것뿐이다.” p.141
성숙한 사회라고 할 만한 것이 있다면 타인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는 사회일 것입니다. 저자의 말처럼 아픈 사람들은 자신의 질병 경험을 이야기할 의무가 있고 사회는 아픈 사람들이 경험하는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말하지 않고 경청하지 않는다면 생산성과 효율만을 최고로 여기며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지 않는 태도가 질병을 지닌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지금처럼 반복될 것이고, 그런 태도에 더욱 익숙해질 것입니다. 병원 장면에서 심리평가를 하고 있지만 저는 아픈 사람들의 얘기를 얼마나 경청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저 또한 누군가에게는 5분 면담하고 약 처방해주는 일부 정신과 의사와 별반 다르지 않게 비춰졌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자신의 취약성을 그리고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얼마나 마음 속 깊이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은 타인의 아픔에 얼마나 귀 기울일 수 있느냐와 직결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여전히 나 잘난 맛에 살고 있고,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이 실감이 되지 않습니다. 여전히 성취지향적이고 성취 과정에서 가까운 사람(특히 아내)에게 상처를 줄 때가 있습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삶과 죽음을 있는 그 자체로 받아들이게 되는 날이 언젠가 올 것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죽으니까요. 그 날은 저만의 신화를 발견하는 날이기도 할까요? 중병을 경험하지 않고서도 취약성이나 죽음을 받아들이고, 타인의 고통에 더 민감하고 타인의 질병 경험을 더 경청할 수 있는 자세를 갖게 되기를 바라지만, 인간이기 때문에 지니는 태생적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다만 저자가 그랬던 것처럼 몹시 고통스러운 어느 날 제게도 신화가 찾아오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저의 고쳐쓰기는 여기까지입니다. 긴 글 읽어주신 분이 있다면 정말 감사합니다.
2018년 04월 06일 최종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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