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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일상

아픈 몸을 산다는 것에 대하여 1

by 오송인 2018. 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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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몸을 산다는 것에 대하여

 

아픈 몸을 살다는 저자인 아서 프랭크가 심장질환과 암을 진단 받으며 경험하게 된 삶의 변화를 담고 있습니다. 단순히 에세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라는 더 큰 맥락 안에서 중병을 지닌 환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을 고르게 된 이유는 저 또한 그런 중병을 경험한 적이 두 번 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병은 비교적 과거형으로 남았지만 두 번째 병은 여전히 현재진행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픈 몸을 살다라는 제목을 보자마자 이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고 얼마 안 가 이 책을 읽게 됐습니다. 책을 다 읽은 직후 드는 생각은, 이 책은 저자의 경험일 뿐만 아니라 저의 경험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그만큼 저자의 경험을 읽는 것에서 이질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중병을 앓았던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병을 앓는 과정에서 한 번쯤 경험해 보았을 많은 이야기들이 이 안에 있습니다. 위로가 됐고 내가 경험한 질병을 어떻게 내 삶에 통합시켜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세우는 데 있어 좋은 참조점이 되고 있습니다. 저자의 경험과 저의 경험이 동일한 서사를 공유하는 측면이 있다고 보기 때문에 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저자가 말하는 "고쳐쓰기"를 지금부터 해보려 합니다.

 

"손으로 편지를 만지듯이, 접고 또 접어서 답장을 보내듯이, 내가 쓰는 이 글에 다른 사람들의 손길이 닿길 바란다. 아픈 사람들이 이 글에 응답하길 바란다. 여기서 응답이란 다른 이가 쓴 이야기 안에서 자신의 경험을 발견하는 것이다. 나는 내 이야기를 할 뿐이지만, 독자들은 내 이야기에 자기 삶을 더할 수 있으며 각자의 상황에 맞게 내 글을 고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고쳐쓰기'가 모여 우리 사이의 대화가 된다." p. 11-12

 

첫 번째 중병은 중학교 3학년 때 나타났습니다. 어느 날부터 밥만 먹으면 토하는 증상이 나타났고 나중엔 물만 먹어도 토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서울 소재 대학병원에 갔더니 위궤양이 심해져서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어릴 때여서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의사의 말을 어머니가 요약해서 제게 알려주었던 것 같습니다. 의사가 한 말의 요지는 약으로 치료가 가능할 수 있으나 확신하기 어렵고, 치료가 된다 하더라도 너무 오랜 시간이 소요될 수 있기 때문에 일상에 지장이 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저희 가족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고 수술 날짜를 잡게 됩니다. 지금이야 의학 기술이 발달해서 복부를 절개하지 않더라도 수술이 가능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당시 의사가 말하는 수술이란 말 그대로 배를 족히 한뼘 정도 가르는 대수술임을 알았기에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아니 당시에는 사실 두려움조차도 느끼지 못 했을 수 있겠습니다. 밥을 제대로 먹지 못 한 채 수액 등에 의지하는 날이 많아지다 보면 정신의 초점마저도 흐릿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막연하게 불쾌한 감정이 들었으나 그게 두려움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왜 이런 불가해한 일이 내게만 일어났을까 내 잘못인가 자책했을 수도 있고요


아무튼 여름방학의 어느 날 저는 수술을 하게 됐고, 수술 당일 불현듯 무서운 마음이 들어 잠을 설쳤던 것 같습니다. 동이 트기 전에 침대에서 내려와 홀로 몸을 씻고 예정된 시간이 되자 수술실로 향하게 됩니다. 차가운 수술대 위에 올려졌고 의사가 마취를 할 것이라는 얘기를 듣자 마자 세상이 사라졌습니다. 당시에는 미처 인식하기 어려웠으나 지금도 이 때를 떠올리면 코끝이 찡해집니다. 수술을 받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야말로 온몸으로 체감한 순간이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다행히 수술이 잘 끝났고 마취가 끝나고 엄청난 아픔이 밀려오는데 간호사는 억지로라도 기침을 해서 가래를 뱉어야 한다며 채근했던 기억이 납니다. 재채기를 할 수도 없고 안 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짜증을 내며 울었고 그런 저를 보며 어머니도 제 앞에서 눈물을 보이셨습니다.

 

수술 후에 학교에서 제일 친했던 친구 중 한 명이 병원으로 놀러 왔습니다. 소변이 빠져나가는 구멍을 복부에 뚫어놓은 상태였고 전 그런 흉측한 모습을 친구에게 보여주는 것이 싫었습니다. 친구가 제 모습을 봤고 약간 당황하는 기색이 느껴졌습니다. 물론 처음에만 그랬고 이후에는 친구도 제 모습에 적응한 것 같았지만요. 한 달의 병원 생활을 마치니 방학이 끝났고 저는 학교로 돌아갔습니다. 복부 절개 부위가 아무는 중이었고 교복 안에 복대를 한 상태였는데 복대 때문에 괜스레 위축되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친구들이 나를 이상하게 보지는 않을까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왜 당시에 그런 생각을 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픈 것이 죄는 아닌데, 마치 죄를 지은 것 같은 기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죄에도 여러가지 종류가 있을 텐데 제가 지은 죄는 제게 수치심을 유발했습니다. 뭔가 남들이 손가락질 할 만한 죄를 지은 것 같았달까요. 표면적으로는 또래관계가 수술 전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친구가 많진 않았지만 몇몇 친구와 예전처럼 어울렸고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하지만 마음 한켠이 뭔가 허전했고 수술 이후 사회적으로 더 고립되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수술 후의 내 삶은 뭔가 달라져 있었으나 그걸 말로 표현하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도 전 그 경험을 표현할 수 있을 만한 언어를 찾지 못 했습니다.

 

병의 의미를 삶이라는 맥락 안에서 통합적으로 생각해 보기에는 당시 제가 너무 어렸고, 그저 어떤 이해하기 어려운 불행한 일이 내게 닥쳤고 그 앞에서는 나는 너무 약한 존재라는 것을 막연하게 느꼈습니다. 저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어머니와 염려해주는 친척 및 친구들이 있었음에도 그 모든 일을 홀로 감당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의지할 데라고는 병원뿐이었습니다. 얼굴 보기 힘들고 얼굴 보더라도 대화를 한다기보다 저는 그저 치료 과정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조용히 들어야 하는 관계가 되는 주치의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었던 것이죠. 생사여탈권을 쥔 의사에게 질환의 '기전'이나 '예후' 등에 관해 1도 모르는 제가 괜히 허튼 소리를 해서 밑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가 하는 모든 말을 의심 없이 믿어야 했고, 무엇보다 치료 과정에서 제 의견이나 감정은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을 수 있습니다. 질환을 가장 잘 처리할 수 있는 것은 의사니까요. 당시에는 경황 자체가 없어서 이런 생각조차 할 겨를이 없었을지라도, 돌아보면 어린 마음에도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했을 수 있을 것 같네요.

 

"전문가다운 대화는 이런 식으로 흐른다. '어떤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이고, 생각보다 더 심각해 보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이 문제를 처리할 수 있습니다. 계획은 이렇습니다. 질문 있습니까?' 이런 식의 말을 들었을 때, 거래를 제안 받는 중임을 나는 너무도 잘 알았다. 내 대답이 똑같이 냉정하고 전문가답다면 '경영진'에서 최소한 낮은 자리라도 얻을 수 있을 것이었다. (중략) 거래를 받아들이는 대가가 무엇인지 당시엔 알지 못했다. 경험은 살아야 하는 것이지 처리해야 하는 일이 아니다. 몸 또한 처리해야 하는 일이 아니다. 관리자가 나라도 그렇다. 몸은 삶의 수단이며 매개체다. 나는 몸 안에서 살 뿐만 아니라 몸을 통해서 산다. 정신을 몸에서 떼어내라고, 그러고는 몸이 어디 바깥에 놓여 있는 사물인 양 이야기하라고 요구해서는 안 된다. 몸이 고장 났다는 말을 들으면서 여전히 냉정하고 전문가답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의학의 치료를 받는 환자들은 언제나 냉철하게 행동하라고 요구받는다. 몸이 고장 났지만 공포와 절망은 고장 난 일부가 아닌 것처럼 대해야 하고, 삶 전체가 바뀌었지만 바뀌지 않은 듯이 행동해야 한다." p. 24-25

 

아픈 사람은 자기 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고자 적극적으로 노력한다. 자기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과 자기 인생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둘 모두에 잘 대처하려 애쓴다. 하지만 환자가 되어 의사들이 몸을 접수하면 의사들은 그 몸을 환자의 삶에서 분리해서 이해한다. 예를 들어 의학이 이해하는 통증은 아픈 사람의 경험과는 거의 관계가 없다. 통증을 겪는 사람은 모든 것이 조각나고 뒤죽박죽되고 있다고 느낀다.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는 어려워지고 일도 하기 힘들다. 자기가 있을 자리가 어디인지 감각이 희미해지기 때문에 다시 제자리를 찾기 위해 애써야 한다. 반명 의학은 통증이 삶에서 갖는 의미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통증은 질환의 증상일 뿐이다. 의학은 아픈 사람의 통증 경험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며 치료법이나 관리법에만 관심을 둔다. 의학은 분명 몸에서 통증을 줄여주지만, 그러면서 몸을 식민지로 삼는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의학의 도움을 구하면서 맺는 거래 조건이다.” p. 87

 

심한 질환이 몸에 발생하게 되면 그 질환이 발생한 병소를 찾아내 제거하는 것이 의학적인 개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너무 단순화시켰다고 생각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전 이것이 현대의 의학적 개입의 본질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의학적 개입의 과정에서 질환을 지닌 한 개인이 어떤 경험을 하는지, 삶에 어떤 변화가 생기고 암 환자, 정신분열증 환자 등등의 라벨이 붙게 되는 한 개인이 병을 지닌 채 살아가며 경험하게 되는 감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의학적 개입의 주체는 대체로 관심이 없습니다. 병원에 입원해 보았거나 가족 중 누군가가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는 사람은 이게 무슨 말인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제 개인적인 경험이라기보다 보편적인 경험이라 해도 무방할 만한 것인데요. 의학적 개입에서 환자의 삶과 희망과 고뇌는 사라집니다. ‘다수의 환자를 치료해야 하는 병원 안에서 치료진에게 그런 것을 기대해 봤자 실망만 클 뿐이다, 자신의 속내를 의사에게 드러냈을 때 의사가 보인 사소한 말이나 행동으로 인해 상처 받을지 모른다, 그들도 그럴 만한 사정이 있을 테니 애초에 그런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의학적 개입은 과장이 심하다 여기실 수도 있겠으나 본질적으로 환자를 질환과 등치시킵니다. 질환을 제거하여 환자가 다시 질환이 없는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게 도우며, 질환에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제거함에 있어 환자 본인, 환자를 돌보는 가족들의 도움은 별로 필요하지 않습니다. 필요로 하더라도 치료 과정의 아주 지엽적인 부분, 예를 들어 수술한 환자가 목욕하는 것을 돕고, 기침하는 것을 돕고.. 그런 정도의 역할에 국한되죠. 어쩌면 환자와 환자를 돌보는 사람에 대한 몰이해와 존중의 부족은 환자를 질환으로 등치시키고 질환을 객관적으로 수치화된 물적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의학적 관점 자체에 기인하는 것일지 모릅니다. 질환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환자가 한 인간으로서 경험하는 많은 것들이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되지 못 한 채 사장됩니다. 질환의 치료 과정에서 그런 경험을 표현하는 것은 치료진에게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 면이 있습니다. 그들이 감당해야 하는 환자의 수가 너무 많기 때문이기도 하겠죠. 병동 안에서는 감정 표현을 안 하고(하더라도 다른 사람들 안 보는 데서 혼자 하고) 치료진에게 자기주장을 안 하는(하더라도 공손하고 우회적으로 하는) 순응적인 환자가 환영 받습니다. 표현되지 못 한 당시의 경험이 이후 제 삶의 많은 부분에 영향을 미쳐 왔을 것임을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수술 전이나 후나 저는 OOO이라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수술을 기점으로 삶의 연속성과 한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에서 다소 균열이 발생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쯤에서 두 번째 중병인 허리 디스크를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허리 디스크는 정식 명칭이 요추 추간판 탈출증인데 추간판이 요추에서 탈출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다른 것은 다 제쳐놓고 통증이 밀려옵니다. 그 통증이란 것이 사람이나 병의 진행 정도에 따라 차이가 크겠지만 대체로 급작스럽게 발생하는 허리 디스크의 통증은 일상생활을 심각하게 저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의자에 앉아서 생활하는 시간이 많지 않은 사람에게도 디스크는 그야말로 재앙입니다. 디스크가 심한 경우 세면대에서 세수를 하는 것도 힘들고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는 것도 힘듭니다. 힘들다기보다 굉장히 아픕니다. 세수를 하거나 용변을 보는 것은 많은 근육과 관절이 관여하는 복합적인 운동 과정입니다. 통증이 없을 때는 이 과정이 무의식적으로 진행이 됩니다. 수천 수만번의 경험을 통해 자동화된 과정이기 때문이죠. 통증은 이 과정이 원래 얼마나 자잘한 단계들로 이루어져 있는지 매우 명확하게 알려줍니다. 근육 한가닥 관절 한 부분 움직일 때마다 그것들이 움직이고 있음을 통증을 통해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이죠. 통증은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줍니다. 매우 고통스러운 감각 및 정서와 함께 말이죠. 겪을 때마다 좀 둔감해지면 좋으련만 통증은 매번 새롭습니다. 인내해 보려는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매번 고통스럽죠.

 

허리 디스크가 위궤양처럼 급작스럽게 찾아오지는 않았습니다. 수술을 해야 했던 제 위궤양도 점진적으로 발생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위궤양이나 위암은 간암처럼 증상이 없는 경우도 흔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느 날 병원에 갔더니 위암 말기다 라고 진단 받기 쉽습니다. 통증은 병을 알아차릴 수 있게 만드는 선물인데 위는 이런 선물을 줄 능력이 다소 적을 수도 있겠습니다. 반면 디스크는 이미 21살 때부터 제게 지속적으로 경고를 해왔습니다. 나이를 기억하는 것은 21살 때 국토대장정을 했고 당시 100명이 생활할 텐트나 식자재 등을 트럭에 실었다 내리는 작업을 하는 것이 저의 역할이었기 때문입니다. 국토대장정을 하는 한 달 동안 허리 때문에 고생을 꽤나 했습니다. 걷는 데는 무리가 없었지만 짐을 상하차 하는 과정이 허리 통증으로 인해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부터 허리 통증이 지속적으로 경고를 해왔으나 제가 몸에 둔감한 면이 있어서 잘 알아차리지 못 하고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임상심리전문가 수련 과정에 있던 2014년 무렵부터 허리가 다시 자신의 존재감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매우 급작스럽게 한 번씩 허리 통증이 밀려왔고 2주 정도 고생하면 다시 사라졌습니다. 병원에 가지 않을 때가 더 많았고, 별로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죠. 그저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불청객이거니 했습니다. 내 몸에서 발생한 것이었지만 그것이 마치 외부의 어떤 침입자인 것마냥 생각했죠. 버티면 어느 순간 사라지는 침입자. 무사히 전문가 자격을 취득하고 그 해 3월 제주도로 여행을 갔습니다. 3일 동안 자전거로 제주도를 한 바퀴 돌고 4일째 되는 날 한라산에 오르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운동을 좋아하고 꾸준히 운동을 해왔기 때문에 무리가 되지 않는 스케줄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집에 돌아온 다음 날부터 누워있던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이전에 경험한 허리 통증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심각한 허리 통증이 발생했고 서울 OOO 병원에서 23, 34, 45번 척추뼈의 추간판 탈출을 MRI를 통해 눈으로 확인하게 됩니다. 척추 측만은 2014년경에 CT를 통해 확인했으나 그것도 가시적으로 다시금 확인하게 되죠.

 

OOO 병원에서 MRI를 찍고 검사 결과를 전해 듣는 과정을 여기에 적는 것이 중요해 보입니다. 환자를 인간으로 대하지 않는 것은 그렇게 하기 어려운 병원의 구조적인 문제라 여기더라도,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환자의 약해진 마음을 이용해서 지나치게 경제적인 이익을 창출하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병원도 수익 창출을 해야 합니다. 당연한 것이죠. 다만 최소한의 윤리는 지켜야 하는데 제 입장에서는 제가 MRI를 찍었던 병원이나 그 병원에 소속된 원장이 돈에 눈이 멀어 윤리 따위는 개의치 않는 것 같았습니다. 정황을 설명하겠습니다. MRI를 찍은 후 결과가 나왔고 의사는 MRI 결과에 대해 5분도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말했음에도 제 말을 듣지 않는 느낌이었습니다. 제가 느끼는 통증의 정도를 비롯하여 아주 기본적인 것에 대해서도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질문은커녕 다짜고짜 육백만원에 달하는 허리 시술을 권유했습니다. 그 시술의 단점이나 예후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하지 않은 채 말입니다. 환자를 무슨 돈으로 보는 듯한 이런 불친절함과 상식 이하의 행동에 대한 분노는 병원비 영수증을 보며 극에 달했습니다. 진단이나 치료와 1도 관련 없어 보이는 고가의 비급여 항목들이 눈에 띄었고 설령 그것들이 진단이나 치료와 관계되는 것이었다 하더라도 저는 그 비급여 검사 결과에 대한 설명을 듣지 못 했습니다. 원무과 직원에게 이에 대해 하나하나 따지니 그제서야 물리치료사인지, 전문간호사인지가 와서 검사 결과를 설명해 줍니다. 검사라고 해봤자 간호조무사의 간단한 지시에 따라 기계 위에 올라가 몸의 열분포도를 보는 검사였고 비상식적으로 비쌌습니다. 열분포 결과를 설명하는 이도 이런 경우는 처음인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합니다. 이 병원은 MRI 패키지 장사, 즉 과잉처방으로 수익을 올리는 시스템인 것 같았습니다. 의사에게 시술을 권유 받았을 때 한템포 쉬었다가 결정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고 지금도 생각되네요. 시술도 실비 처리가 되기 때문에 병원에서는 아무 환자에게나 이를 적극 권장하는 느낌입니다. 환자는 착취 당하고 병원과 민간 보험은 윈윈하는 전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착취 구조는 PD 수첩에서도 방송됐던 내용인데 그게 제 얘기가 될 줄은 몰랐죠. 육백만 원짜리 시술을 받아도 실비 처리가 되면 실제로 나가는 돈은 백만 원 안팎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백만 원이 어디 적은 돈인가요. 의사가 권유한 시술은 PD 수첩에 따르면 효과가 제대로 검증되지도 않았고 하반신 마비와 같은 심각한 부작용을 낳기도 합니다. 그런 시술을 그렇게 쉽게 권유한 그 의사 얼굴을 떠올리면 아직도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이 경험을 통해 새삼 여러 병원에서 진단 및 설명을 듣는 것이 중요함을 느꼈고, 무엇보다 환자가 하는 말을 듣고 그 다음에 설명하고 설명한 것을 잘 이해했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식의 치료진의 친절함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병원에서 심리평가로 밥 벌어 먹고 살아왔지만 환자 입장이 돼 보니 환자 마음이 더 잘 보였던 것이죠.

 

위궤양 수술 때는 최소한 병이 고쳐졌으니 병을 고치는 과정을 비롯하여 질병 경험이 제게 갖는 의미가 제 삶에 통합되지 못 했다 한들 그것을 전적으로 병원이나 치료진에게 돌리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그 정도로 추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나이도 아니었던 것 같고요. 앞서 얘기했듯이 의사나 간호사나 환자수에 비해 인력이 너무 적은 게 다반사이고 환자 얘기를 경청할 시간적 여유가 그들에겐 없습니다. 현재 한국 의료시스템에서 치료진이 환자의 얘기를 들어주기에는 어려운 측면이 있죠. 다른 나라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환자들도 대부분 그런 것까지 기대하진 않습니다. 질환을 잘 처리해주기만을 바라는 경우가 더 많지 않을까요. 최소한 위 수술 당시 치료진은 제가 그들에게 기대하는 일을 잘 해냈고, 저는 회복하여 일상으로 복귀하였습니다. 하지만 디스크 때는 달랐습니다. 디스크를 치료한답시고 앉아 있던 그 의사는 저를 인간이 아닌 질환으로 취급했을 뿐만 아니라 돈에 눈이 멀어 질환을 지닌 사람의 약한 마음을 이용하려 했습니다. 통증이 제게 어떤 의미인지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제가 경험하는 슬픔과 두려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렇게 평생 고통스럽게 살아야 하나, 꿈도 목표도 다 포기해야 하나 싶어 큰 두려움을 경험하고 있었는데 그 의사는 허리 디스크로 인한 통증이 일시적인 불편인양 여겼고, 인간을 무슨 고장난 차량으로 보는 듯한 의사의 태도에 진저리를 쳤습니다. 그 정형외과 의사와 OOO 병원이 시술을 통해 제 허리병을 고칠 수 있었다 하더라도 다시는 그 병원에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후 OO 병원에서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정형외과 의사를 만났고, 병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일반화되는 것을 막는 경험을 했습니다. OO병원 정형외과 의사는 제 얘기를 잘 들어주었고 수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소염진통제를 먹어 가며 운동을 통해 통증이 완화될 수 있다는 진심어린 희망을 전했습니다. 허리 디스크란 것이 수술을 통해 완치될 수 있는 병이라기보다 수술을 하더라도 언제든지 재발 가능하고 그렇기 때문에 평생 관리해야 하는 병이라는 가르침을 얻기도 했죠.[각주:1] 결국 이 의사의 말이 맞았습니다. 가벼운 걷기와 꾸준한 소염진통제 복용을 통해 통증이 거의 가라앉았고 저는 다시 한 번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기까지 3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고통스럽게 지냈고, 통증이 완화되어 예전처럼 거의 통증을 느끼지 않고 살 수 있게 되었다고 믿었을 즈음 공연장에서 오래 서 있었던 것이 촉발요인이 되어 다시 통증이 재발해 한 달을 더 고생스럽게 보내야 했습니다. 통증이 완전히 사라지기까지 4개월이 걸렸고, 이 기간은 제 인생의 전환점이 됐습니다

  1. 그리고 무엇보다 한 개인의 잘못된 습관이 원인이 돼 디스크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저는 제가 잘못된 생활습관을 유지해서 디스크가 온 것인가 생각할 때가 많았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직접적으로 말은 안 했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 같았구요. 하지만 디스크가 어떻게 발생하는지 그 직접적인 원인은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질환이 발생하는 데 있어 개인의 성격이나 습관 같은 것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는 시각은 사회적 통념과 연관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편하죠. 나는 저런 병이 안 걸렸으니 내 성격이나 생활습관은 괜찮은 것이라고 위로할 수 있습니다. 내가 건강한 것이 내게 문제가 없음을 증명하는 강력한 증거가 되는 것이죠. 정부도 이런 사고를 환영할 수밖에 없습니다.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암이나 디스크 등등이 사회적인 문제이며 사회가 책임지고 caregiver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면 결국 질환을 예방하기 위해 국가는 예산을 써야 합니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은 그런 쪽으로 들어가는 예산의 비율이 적죠. 최소한 MB나 박근혜 정부는 이런 데 돈을 쓰기보다 질환을 한 개인의 문제로 돌리는 데 애썼을 것 같습니다. 질환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각은 국가가 국민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에 대한 바로미터입니다. 정신건강증진센터나 외상센터가 어떻게 굴러가고 있나요? 예산이 늘 부족하고 사람은 자주 바뀌고.. 지금까지의 국가는 국민의 육체적 및 정신적 건강에 큰 관심이 없었다는 주요한 사례입니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어떨지 조금 더 지켜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질환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려는 모든 시도에 분노하고 반대 의사를 표현해야 합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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