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을 처음으로 병력이라는 맥락에서 바라본 사람은 히포크라테스였다. 그는 질병에 일정한 경로가 있어서 첫 징후에 이어 위기가 오고 그 다음에는 다행스러운 결말 혹은 치명적인 결말이 따른다고 보았다. 이렇게 해서 그는 '병력' 즉 질병의 자연사에 대한 기술이라는 개념을 내놓을 수 있었다. 이러한 이야기 혹은 역사는 자연사의 한 형태이다. 그러나 병력은 개인에 대해 그리고 그 개인의 '역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병력은 질병에 걸렸지만 그것을 이기려고 싸우는 당사자 그리고 그가 그 과정에서 겪는 경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전해주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좁은 의미의 '병력' 속에는 주체가 없다. 오늘날의 임상 보고에는 주체가 '삼염색체백색증에 걸린 21세 여성'과 같은 피상적인 문구 안에 넌지시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 이런 식의 병력은 인간이 아니라 쥐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인간을 인간으로 바라보고 기록한 병력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주체 즉 고뇌하고 고통받고 병과 맞서싸우는 주체를 중심에 놓기 위해서는 병력을 한 단계 더 파고들어 하나의 서사,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무엇이?'뿐만 아니라 '누가?'를 알게 된다. 병과 씨름하고 의사와 마주하는 살아 있는 인간, 현실적인 환자 개인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 올리버 색스가 쓴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서문에서 발췌. 밑줄은 제가 침.
이 책을 예전에 읽었는데(관련 글), 발췌한 부분을 보니 새롭네요.
요즘 제가 하고 있는 생각과 비슷하다는 데 놀라게 됩니다.
아마도 기억 어딘가에 이런 내용이 들어 있을 테죠.
제가 이런 내용을 읽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이 책을 읽은 것은 분명하니, 요즘 제가 하고 있는 생각들에 올리버 색스가 영향을 미쳤다고 봐야 할 것 같아요.
확실히 제가 왜 올리버 색스를 좋아하는지 발췌한 부분을 보고 더 잘 알게 됐네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