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임상심리학/심리평가

[정신과 임상심리전문가의 정신장애 이야기 #26] 정신장애 진단기준의 효용에 관해

by 오송인 2019. 5. 16.
반응형

DSM-5에는 아스퍼거 증후군이 빠져 있지만 DSM-IV까지만 해도 이 진단이 유효했다. 아스퍼거 증후군은 언어 능력 발달에서의 뚜렷한 지연이 없고 외부 환경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DSM-IV의 자폐 장애(Autistic Disorder)와 차이가 있다.

 

아스퍼거를 고기능 자폐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들이 자폐를 지닌 아동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상호작용 및 의사소통에서 어려움을 경험하지만 학습이나 고차적 문제해결에서 뚜렷한 어려움을 보이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아스퍼거와 고기능 자폐가 구분된다는 주장과 구분되지 않는다는 주장이 있는데 아마 후자의 주장 또한 DSM-5에 아스퍼거 진단이 사라지게 되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DSM-5에서 아스퍼거라는 진단적 개념을 사용하지 않게 된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자폐에도 기능 손상이 경한 정도와 심한 정도가 있는데 아스퍼거와 같은 진단명을 굳이 사용하기보다 자폐 스펙트럼이라는 연속선상에서 평가하자는 것이다. 즉, DSM-5에 자폐 스펙트럼 장애(Autism Spectrum Disorders)라는 개념이 도입된 데는 1) 사회적 상호작용 및 의사소통에서의 뚜렷한 어려움과 2) 매우 제한된 관심사/상동증적 행동/자극에 대한 과민감성이라는 두 축을 토대로 자폐를 지닌 아이들을 '연속선상'에서 구분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아스퍼거 증후군이라는 개념이 여전히 유효한 측면이 있다고 보지만 굳이 무게를 두자면 이러한 '의지'에 더 두고 싶다.

주지하다시피 원래 정신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도 어떤 부분에서는 다른 사람 눈에 '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 쉽고, 정신장애를 지닌 사람이라고 해서 항상 심각한 정신병리를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그 누구보다 기능적인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기존의 진단체계에서는 정신장애를 지닌 사람과 지니지 않은 사람은 그야말로 한끝 차이다. 즉, 다섯 개 증상 중 네 개면 어떤 정신장애에 해당하고 세 개는 그렇지 않다는 식이다( DSM이 이런 식이다). 이런 식이라면 과연 이 기준에 근거한 정신장애 진단이 타당한가에 대한 상식적인 수준에서의 질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DSM-IV, DSM-5나 ICD-10, ICD-11 같은 국제적인 정신장애 진단 체계가 매우 표면적인 증상과 증상의 갯수에 근거하여 정신장애를 범주화하고 있으나 이러한 구분을 하기 전에 정신병-경계선-신경증이라는 스펙트럼상에서 정신장애의 유형을 범주화하는 것이 진단체계로서 더 쓸모 있었을지 모른다. 실제로 조현병에 쓰이는 약과 정신병적 증상이 수반되는 우울증에 쓰이는 약이 겹칠 수 있다. 둘 다 항정신병 약이 쓰일 때가 많다. 조현병에는 항정신병 약이 더 자주 쓰이고 우울증에는 SSRI 같은 항우울증 약이 더 자주 쓰이지만, 근본적으로 조현병 약이 따로 있고 우울증 약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정신장애 구분에 관한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자폐 스펙트럼 장애로의 변화는 반길 만한 것이다. 장애 심각도의 Level을 1, 2, 3단계로 구분하려는 시도는 레벨 구분의 과학적 근거가 없다는 점만 빼면(이게 심각한 문제긴 하지만..) 환영할 만한 것이다. 하지만 약간 기이한 행동을 보이는 아이와 자폐 스펙트럼 안에 속하는 아이를 구분하는 기준을 증상의 갯수로 구분하는 지금의 방식은 여전히 문제가 있다. 매우 임의적인 기준에 의한 정상/비정상 프레임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정신장애를 범주적으로 구분하려는 노력이 연구 결과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고 임상적으로도 쓸모가 있는 게 사실이지만(예를 들어, 정신병적 증상이 수반되는 우울증과 수반되지 않는 우울증은 눈에 띄게 다르다), 이러한 구분이 애초에 매우 자의적인 것일 수 있고,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각각의 정신장애에 특화된 치료 전략이 현재로서는 미흡하다는 사실도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한 지난 백년 간의 노력이 있었지만 심리학이나 정신의학 모두에서 아직은 원시적인 수준의 진단 및 치료가 이뤄지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지금 가능한 최선을 하고 있다며 위로해 보아도 인간을 정상/비정상으로 구분하려는 낡은 프레임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낙인을 조장하는 언론을 위한 프레임인가? 진단기준 확립을 위한 TF에 참여하는 정신과 의사에게 로비하는 제약회사를 위한 프레임인가?

 

병원에서 일하는 임상심리전문가로서 날마다 심리평가 보고서 말미에 DSM-5나 ICD-10에 근거한 진단을 달며 살아가지만 기존 진단 체계에 대한 회의감이 강하고 아마 이러한 회의감은 정신과가 아닌 곳으로 이직하는 날까지 계속 될 것 같다. 정상/비정상이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 인간을 보다 다양한 차원의 연속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진단기준이 확립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관련 글) 정신장애 진단을 내려놓는 지점에서부터 심리치료가 시작된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