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된 자기, 해리 스택 설리반의 정신치료 기술, 애착에 이어 고전 강독 스터디 네 번째 책으로 자살하려는 마음을 읽고 있습니다. 이 책은 총 9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완독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2019/11/10 - [심리학 일반/고전 강독] - 분열된 자기 / 로널드 랭
2020/01/27 - [심리학 일반/고전 강독] - 해리 스택 설리반의 정신치료 기술 / A. H. Chapman
2020/04/23 - [심리학 일반/고전 강독] - 애착 / 존 볼비
이 책은 기대했던 것보다 별로입니다. 책의 내용 자체가 별로라기보다 심리부검이라는 영역에 대한 무지에 기인하는 저의 회의적 시각이 이 책이 지닌 진가를 알아보지 못 하게 만드는 쪽에 가깝습니다.
5장에서 특히 심리부검을 통해 자살을 예방하고자 하는 방법론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는데, 5장을 읽고 단톡방에 공유한 소감을 옮겨옵니다.
저는 후향적으로 사례를 검토해서 자살자를 예측하는 작업을 가지고 자살을 예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언급하는 점이 왠지 모르게 좀 불편하게 느껴졌어요. 누가 자살자인지 모르는 상태였다 하더라도 후향적으로 자살자를 예측하는 것은 전향적으로 자살자를 예측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일전에도 말씀드린바 있지만 자살을 예방하려는 노력 자체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의미있는 일이지만 자살을 예측할 수 있는 단서들을 찾아내려는 노력은 그 성과보다는 유족들에게 미리 막지 못 했다는 죄책감을 더 남기면서 심한 부작용을 나을 우려가 크다고 생각해요.
더욱이 자살이라는 것 자체가 개인내적 차원의 미시적인 문제가 아니라 가난이나 차별 같은 사회적 문제의 영향을 많이 받는 것이기 때문에 개인이 살아온 내력에서만 포커스를 맞추게 되면 전체적인 그림을 보지 못 하고 자살예방사업이 산으로 가게 될 우려도 많아 보여요.
이 책의 초점이 개인내적인 것이긴 하지만 절반 이상 읽은 상황에서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습니다.
실제로 심리부검이 어떤 식으로 진행이 되는지 잘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지닌 반감은 앞서 말했듯이 무지에 기인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살자들이 지닌 공통점을 토대로 자살을 예측하고자 하는 의지가 느껴지는 문맥들이 있어서 그런 부분이 거슬립니다.
아시다시피 이것은 논리적인 오류입니다.
"심리학에 ‘사후확신편향’이라는 말이 있다. 사후설명편향·뒷북편향이라고도 하는데, 영어로는 ‘knew-it-all-along-effect’라고 쓴다. ‘그럴 줄 알았어’ 효과쯤으로 해석된다. 사건 전에는 알 수 없던 징조나 단서 같은 것을 사건 이후 쉽게 알 수 있는데, 이것이 판단에 오류를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실제로 어떤 사건의 결말을 안 다음에 돌아보면 그런 결말이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사후확신편향은 자신이 훌륭한 예언가라고 믿게 만들기 때문에 매우 위험하다. 사람을 오만하게 만들 뿐 아니라 그릇된 판단을 내리도록 인도한다." 출처: https://jmagazine.joins.com/economist/view/321833
오늘 읽고 있던 MMPI-2 책에서도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postdictive context에서 추론한 내용을 가지고 앞으로 벌어질 일을 예측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죠.
Given its origins, a major application of O-H is in the classification of male prisoners convicted of violent offenses. That is, the value of O-H primarily belongs in the postdictive context, providing a means for construing and classifying offenders following incidents of extreme assault. Because of the low base rates for violence in most other populations, it is unsuitable as a basis for predictions of assault, violence, or dangerousness. - Psychological Assessment with the MMPI-2/MMPI-2-RF 3rd Edition, 459쪽.
모르긴 몰라도 심리부검을 하는 심리학자는 사후 편향의 가능성을 인지하여 조심스럽게 접근할 것입니다. 사후적으로 자살자들의 공통점을 예측하려는 노력이 지닌 방법론적 한계를 인식한 상태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보려는 시도일 수 있습니다.
이 글의 제목으로 돌아가 볼까요. 자살 가능성을 예측하여 미연에 방지하려는 시도가 의미 있을까요. 심리부검을 이러한 시도의 일환으로 이해할 때, 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살을 100% 예측하는 것은 아마 앞으로도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현재 우리가 지닌 능력하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봐야죠. 생과 사의 기로에 처했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대할 때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당연히 위험 조짐이 조금이라도 보일 때 극성 떨며 뭐라도 하는 게 낫습니다. 방법론에 대한 회의감과는 별개로 말이죠.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자살이 개인내적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와도 관련 깊다는 생각이 강하기 때문에 이 책을 읽으며 애꿎게 반감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덧. 자살과 사회 구조적인 문제의 상관에 관한 탁월한 저술로서 김승섭의 책을 추천합니다.
2020/04/20 - [하루하루/서평] - 아픔이 길이 되려면 / 김승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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