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사람의 인생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두꺼운 책이다. 그 책을 다 읽는 건 불가능하지만 목차 정도는 훑어볼 수 있다. 하지만 목차를 읽었다고 해서 그 책을 다 읽은 것이라고 착각하면 안 되는데, 늘 그런 우를 범하고 사는 게 인간이다. 더욱이 그 목차라는 것도 챕터라기보다 섹션에 가깝다. 전체를 왜곡시킬 수도 있는 세부적인 것들. 가령 키가 몇이고 학교는 어딜 나왔고.. 집이 어디에 있고 등등. 내가 보고 있는 건 목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 한켠에 되새긴다면 비판단적으로 상대방을 대하기가 한결 수월할 것이다. 상대방이 책이라고 상상하고, 그 책 안에 어떤 사건들이 펼쳐지고 있는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 보는 것. Q & A 기능도 갖춘 책이라 궁금한 것을 물어보면 알려주기도 하니 얼마나 편리한가.
- 지리산 갔을 때 대낮에 산장에 도착한 젊은 외국인 커플이 입실 가능한 시간이 되기 전까지 나란히 앉아서 각자의 책을 읽는 모습이 예뻐 보였다. 한 시간 정도 그들은 거의 대화 없이 각자의 책을 읽었다. 심지어 산장 안에서도 두 다리 쭉 펴고 벽에 기댄 채로 나란히 앉아서 책을 읽었다. 각자의 세계 속에 있었지만 그들은 꽤 단단하게 결속돼 보였다. 가끔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그런 것을 느꼈다. 사랑에 빠진 단계에서 사랑을 하는 단계를 지나 친구가 되는 단계로 접어든 장기연애 커플 같았다. 각자의 시간과 공간과 취향에 대한 존중은 상대방에 대한 신뢰에 기인한다. 그 신뢰가 쌓이기까지 얼마나 지지고 볶고 했을까.
- 절친인 배라톤은 철학을 사랑하고 논리적인 글쓰기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그런 사람으로 현재 서울 소재 모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밟으면서 시간강사로 인문학 관련 강의를 맡고 있다. 배라톤과는 학부 2학년 때 알게 돼 3학년 때부터 친해졌는데 그 계기는 철학 및 성경 스터디였다. 힐쉬베르거가 쓴 서양철학사를 반 년 동안 같이 읽었고 요한복음 해설서를 가지고 토론을 벌였으며, 심지어 대학원 4학기 때는 윌리엄 제임스가 쓴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을 일주일에 한 번씩 반 년 동안 같이 읽기도 했다. 나는 그가 지닌 풍부한 어휘와 유려한 글쓰기 및 논리적인 말하기가 부럽다. 같은 책을 읽지만 뽑아내는 아웃풋에서는 차이가 나는데, 그가 책 내용을 잘 소화해 자기 말로 풀어내는 모습이 꽤 멋있다. 닮고 싶은 부분이고, 특히 철학사를 그보다 더 정교하게 머리 속에 새기고 싶다는 다소 유치한 욕구가 틈틈이 서양철학사를 다시 읽게 만드는 동력이 되고 있다. ㅋ
- 개원 몇 십주년이라고 용돈 나왔다. 5만 원 나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20만 원이나 나왔다. 하나님은 늘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챙겨주신다. 내일 오전에 씨네큐브에서 영화보고 교보 들러서 책 살 생각에 신이 나 있다. 서양철학사 상권을 사고, 도스토예프스키의 가난한 사람들을 살 것 같다. 20대 내내 많은 책을 읽었지만 알바로는 용돈이 턱없이 부족해서 학교 도서관이나 시립 도서관에서 늘 책을 빌려 봤다(집에 있는 구립.시립도서관 대출카드를 다 모으면 한 여섯 개쯤 될 것 같다). 그 가난을 보상하고픈 마음에 취업한 이후 책은 꼭 사서 본다. 책이나 음악은 정신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물질적인 것이기도 하다. 읽지 않는 책, 비닐을 뜯지 않는 시디가 집에 가득한 사람들을 충분히 이해한다. 집 같은 집을 사게 되는 날이 오면 큰 서재가 있는 공부방과 음악을 듣거나 만들 수 있는 방음시설을 갖춘 방을 마련할 생각이다. 한 10~15년 후에는 가능하지 않을까. 더 걸릴까. ㅎㅎ
- 지금 읽고 있는 책 꽤 재미있다. 거기 달린 취향의 레퍼런스들을 좇기 바쁘다. 눈으로 형광펜을 계속 긋고 있다.
#일하기_싫은_금요일의_잡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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