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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일상

완벽한 아이 팔아요

by 오송인 2018. 1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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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대가 되지는 않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이 제일 꼰대가 되기 쉽다.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딸이 제일 엄마처럼 살기 쉽다.


누구누구처럼 행동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하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말은 너무 가볍다. 신뢰할 수 있는 것은 행동뿐인데, 그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행동이 어떤 양상으로 나타날지는 자신조차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자신을 너무 믿지 않는 것이 좋다.


자신을 너무 안 믿어도 문제지만 너무 믿으면서 호언장담하는 것도 문제다.



나 또한 다른 사람(그게 엄마든 꼰대아저씨든)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사람임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나 또한 강물에 유유히 떠내려가는 다른 수많은 낙엽들과 다를 게 없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함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실상 누군가가 '저 사람처럼은 되지 말아야지'라고 말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렇게 되는 사람은 없다.


살다 보니 세월의 풍파가 그 사람을 그렇게 조각해 놓은 것에 가깝지 않을지.


싸이코패스라고 해서 태어날 때부터 싸이코패스는 아니었을 것이다.


죄에는 책임을 묻되 사람은 포용해야 한다는 말의 뜻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최소한 지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모든 죄는 대물림되는 것이다. 방임하고 학대하는 부모가 있다면 그 부모의 부모에게 죄가 없다 할 수 없고, 또 그 부모의 부모의 부모에게 죄가 없다 할 수 없다. 아담과 이브의 원죄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도 해본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없고, 인간은 누구나 취약점을 지니며, 타인도 나처럼 약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는 것이 필요하다.



나 또한 여러 이해관계의 어느 한 쪽에 위치해 있는바, 이 사람도 옳고 저 사람도 옳다며 완전히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사실 살다 보면 내가 옳고 저 사람은 틀리다고 생각할 때가 너무나 많다.


하지만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삶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태도를 견지할 때, 타인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엄마처럼 혹은 꼰대처럼 살지는 말아야지 하면서도 엄마처럼 혹은 꼰대처럼 살고 있는 자기에 대한 자비가 가능해지는 것 아닐지.



부모로서의 기준이 너무 높고, 그래서 아이에게도 높은 기준을 설정하는 것 같다는 자각이 든다.


자신의 약함과 불완전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없게 만드는 과대자기(grandiose-self)가 내 안에 있고, 그래서 아이의 취약성조차도 인정하기 어려운 것 같다.


아이가 불완전한 만큼 부모로서의 나도 불완전하다는 것을, 심지어 가족은 내팽개치고 돈 벌어오는 것을 무슨 벼슬처럼 여기던 우리네 가부장적 father figure와도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그럴 때 오히려 아이 마음의 주파수에 안테나를 보다 잘 맞출 수 있을 것이다.


직업적 커리어와 아이 양육 모두에서 완벽한 아빠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빠는 수퍼맨이 아니고, 둘 중 하나는 내려놓기 쉽다. 때로는 아이한테 화도 내지만 대체로 아이를 사랑하는 good-enough father 정도면 족한 것이다. 그래야 아이에게도 관대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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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http://item.gmarket.co.kr/Item?goodscode=933105257


딸이 요즘에 즐겨보는(정확히 말하면 읽어달라고 자주 요청하는) 책 중 하나다.


완벽한 아이가 마지막에 하는 말이 이 글의 내용과도 관련이 있다. 완벽한 아이를 바라는 부모의 정곡을 찌른다.


이 두서없는 글을 관통하는 주제가 있다면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이 당연한 명제를 받아들이지 못 해서 삶의 많은 영역에서 어려움이 초래된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싶거나 다른 사람의 어떤 행동을 납득하기 어려울 때, 그 사람에게 높은 기준을 적용하듯 자신의 삶에도 높은 기준을 적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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