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에 앞서 이 책에서 자기연민으로 번역한 개념은 자기자비로 번역되고 있기도 합니다. 학자에 따라 어떤 번역이 더 적절한지에 대한 이견이 있습니다.
저처럼 과제중심으로 being보다 doing에 온전히 포커스가 맞추어진 사람들의 밸런스를 맞출 수 있게 돕는 것이 마음챙김 명상이죠. 다른 하나는 자기연민입니다. 이 둘은 공통집합을 갖고요. 자기연민(self-compassion)은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끌어내기 위해 애쓴다거나 기분을 좋게 만들려는 노력이 아니라 이런 식의 문제해결 노력을 멈추는 것에 가깝습니다.
"애써 노력하길 그만두고 부드럽게 죽음의 경험에 동참하는 것이다."
노력을 인생의 모토로 삼는 사람에게 이건 너무 가혹한 주문입니다. 그래도 정말 힘들 땐 이 말을 따라야 한다는 걸 압니다. 하지만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별개일 수 있고, doing에서 being으로 가려면 영혼이 한 번 죽다 살아나는 것 같은 극적인 경험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래도 희망이 있는 것은 첫 문장에서 말했듯이 이 둘이 꼭 상호배타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존하는 가운데 밸런스를 맞추는 게 가능합니다. 제 생각이 아니라 MBCT(마음챙김에 기반한 인지치료)를 개발한 심리학자의 얘기고요.
being의 한 방법으로 호흡명상을 5분 정도 할 때가 있습니다. 마음이 유달리 산란해지면 일기를 쓰거나 호흡명상을 합니다. 아직까진 호흡명상보다 일기가 더 제게 맞는다고 느끼지만 호흡명상은 만원버스에서도 할 수 있는 것이니 접근성이 탁월합니다.
올 상반기에 이 호흡명상을 루틴으로 만들려고 시도한 적이 있고 두 달 정도는 잘 됐으나 이후 흐지부지 됐습니다. 명상이라는 존재방식과 루틴이라는 존재방식이 애초에 모순되는 개념임을 깨닫지 못 한 결과죠.
"일벌레는 '존재하기'를 '행동하기'로 변화시킨다. 일벌레는 설사 자애명상을 한다 해도 스트레스만 받을 것이다." 실상 별로 웃긴 말이 아닌데 저는 혼자 웃었습니다.
being의 다른 한 방법은 자기연민이죠. 자기연민의 다양한 방식이 있겠으나 정서적 고통의 순간에 흔히 하듯 '분노', '수치심', '죄책감', '시기심', '슬픔' 혹은 단순히 '상처' 같은 단어를 반복하며 감정을 라벨링하고, 그에 더해 '그저 내가 편안하기를', '다른 사람도 편안하기를' 혹은 '평안', '고요'와 같은 말을 되뇌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음을 배웠습니다.
아울러 뭘 열심히 준비해도 늘 부족한 것 같은 느낌에 힘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시간을 들여 더 준비합니다. 하지만 이 일만 준비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 일을 동시에 해내야 하니 스트레스 받죠. 자기연민과 반대되는 특성입니다.
"결코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고통을 겪는 완벽주의자들은 바로 그 고통의 자리에서 수행을 시작할 수 있다."
고통을 느끼는 바로 그 순간을 자기연민을 시작하는 cue로 삼으라는 저자의 제안입니다.
저는 그래서 아예 어떤 일을 할 때 그 일에 소요되는 시간을 정하고 일이 잘 준비됐든 아니든 그 시간 이상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워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찝찝하고 다소 불쾌한 기분이 들 때 '할 만큼 했다'를 되뇝니다. 저의 자기연민 만트라입니다.
"...더 나은 어떤 존재가 되려고 안달하지 않는 것이다. 이미 우리 자신인 것에 벗이 되어주는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있는 문장입니다. 목표지향적으로 열심히 살다가도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는 자기를 다독이는 게 제 수준에서는 현실적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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